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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78화 (78/113)

78화

얼굴을 가린 베일 너머, 터져라 내리 문 입술에서 결국 피가

비치더니 아릿한 고통과 함께 은은한 피 맛이 감돌았다.

옷자락을 말아 쥔 라티아는 아브타크를 지나쳐 인적이 드문

정원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를 유유자적 따르던 아브타크는 들꽃으로 채워진

정원 한가운데서 딸을 마주하자마자 베일로 손을 뻗었다.

라티아가 차마 피할 새도 없이 아브타크는 그것을 험하게 들춰

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이럴 수가.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구나. 께름칙하기

그지없어.”

벌겋게 달아올랐던 여자의 얼굴이 단번에 표독스러워졌다.

차분히 가라았은 표정은 어딘가 기괴하기까지 하다. 피붙이가

소리 없이 무너져 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아브타크는

말을 이었다.

“이제는 그 어떤 사랑도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런 꼴을

한 여자를 아껴 줄 남자는 없으니 말이다. 물론 내게도 너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아. 오늘로서 마주하는 일 없었으면 한다.”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요.”

아브타크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인

후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멀어져 갈 뿐이었다. 아버지의 등은

나이가 무색하게 꼿꼿하기만 했다.

라티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황비 자리에 올랐다면…… 그랬다면 당신은 나를

인정했을까.”

여전히 등을 돌린 채 걸어가던 아버지의 걸음이 멎었다.

그래, 그대로 뒤를 돌아봐. 한 번이라도 나를 동정해 줘.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그럼 나는…… 망가져서라도 당신이 원하는

걸 손에 가져다줄 테니까.

“그거라면 만족했을까요. 이 모든 건 내가 황비가 되지 못한

탓인 건가요.”

“당연한 걸 묻는구나. 네가 제대로 황비가 되었다면 내가

황제와 척을 질 일도 없었을 거고, 너도 제국의 황비로서 평탄한

삶을 이어 나갔을 거다. 뭐, 그런 너를 내가 아끼지 않았을 리

있나. 그런 너는 당연히 자랑스러운 내 딸이었겠지.”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린 라티아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제 손으로 걷어 냈다. 똑바로 마주한 아버지의 눈은 야욕과

뒤섞인 광기를 품고 있었다. 바닷물처럼 아무리 퍼내도 끝을 볼

수없을 그런.

“라티아, 벼랑 끝에 몰린 네가 선택해야 하는 건 하나다. 혼자

덩그러니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황금 의자에 았아 서로만을 눈에 담던 두 사람이 아른거린다.

늘 저보다 윗자리에 았아 순진한 척 깔아뭉개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지. 내 자리를 훔친 주제에. 죄 없는 사람들을

개미처럼 짓밟아 죽인 살인자 주제에! 이렇게 순결한 나를

망가뜨렸어.

“끝까지 움켜쥐고 끌어내릴 것인지.”

아아, 왜 진즉 알지 못했을까. 한결같이 간절했던 남자의

눈빛을. 내가 아닌 오로지 그 여자 하나만을 위해 나를 이용하던

남자의 비겁함을.

왜 이제야 깨닫고 만 걸까. 차라리 영영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연회의 불이 꺼지자 잔혹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언제부턴가

모든 것을 포기한 여자의 침실 안은 빛을 잃고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훤히 뚫린 풍경 너머 비치는 들꽃 정원을 보고 싶지 않아

두터운 커튼을 치고 먼지가 쌓여도 걷지 않았다.

“불행을 원해.”

삐걱거리는 테이블을 쓰다듬자 여린 손에 크고 작은 가시가

박혔으나 라티아는 히죽거리기만 했다. 움켜쥐고 있던 마지막

끈을 놓아 버린 여자에게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나처럼 바닥없는 불행을 떠안기를 바라.”

그래서 잃을 것이 없다.

“내가 가지는 건 이제 바라지도 않아. 그냥 나처럼 망가져

버렸으면 좋겠어. 저 여자가 평생 불행했으면 좋겠어. 나보다

더, 나보다 더 괴로워야 한단 말이야!”

네 목에 칼을 꽂고 싶어. 너를 죽이면…… 내 자리를

되찾을지도 몰라. 나는 되찾고 싶어. 거기는 원래 내 자리잖아.

너만 없었다면 내 것이 될 자리였잖아.

억울해.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너무 억울해. 나만

당신을 사랑하는 게 억울해 미쳐 버릴 것 같아.

사랑은 이제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불행한 당신이다.

거치적거리는 천을 내던진 라티아는 밤마다 쑤셔 오는

상흔을 손끝으로 더듬더듬 짚어 나갔다. 아픔이 되살아난다.

우둘투둘한 흉터가 뜨거워지더니 다시금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만 같아.

“그래서, 요즘 상태는 어떻지?”

“입덧이 심하지 않은 편입니다. 음식을 조금 가리시기는

하지만 그것 말고는 큰 문제 없습니다. 때마다 드나드는 의사도

경과가 좋다고 하고 황제께서도 특별히 신경을 쓰시기에……,”

“그만.”

라티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있던 하녀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평소보다 훨씬 히스테릭한 라티아를

마주하고 있자니 숨 쉬는 것마저도 의식이 되었다.

온몸에 꽂혀 드는 소름 끼치는 시선에 하녀는 숨을 깊고 길게

내쉬었다. 이윽고 쉬어 버린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가 도움을 주시기로 하셨다. 네가 할 일은 뭔지 잘

알고 있겠지. 지금까지 뒤를 봐준 은혜를 잎지 말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잘 마무리되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을 내릴 테니까.”

“예. 맡겨만 주세요, 라티아 님.”

하녀는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려 실성한 라티아와 눈을

맞추었다. 붉은 머리칼과 광대뼈 위로 잘게 흩어진 주근깨.

모르는 이가 보면 순수하게만 보일 온화한 미소까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셀리는 오만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왜, 왜 갑자기 이러는 거예요. 네? 안 그랬잖아요! 나갈 수

있게 해 줬잖아요!”

“포기하십시오. 황제께서 한 걸음도 침실을 나서게 하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벌써 한 달이 넘었구나. 침실 안에서 들려오는 절박한 외침에

호위병은 얼굴을 흐렸다. 아무리 윗선의 명령이래도 죄책감을

지우기 어려운 탓이다. 현 상황은 누가 봐도 지나친 구석이

있었고 지극히 비정상적이었다.

“그럼 그 사람 불러 줘요. 지금 당장 불러 줘요. 내가, 내가 잘

말해 볼게요.”

“안 됩니다. 저녁 식사를 남김없이 드시면 그 이후에 찾겠다

하셨습니다.”

“……미쳤어.”

뒤늦게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당신네들 다 미친 거야! 다 한패야!”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여자는 이내 발작하듯 외쳤다.

두터운 문을 손이 터져라 두드리는 소리 역시 끊이질 않았다.

저러다가 정말 주먹이 터져 손에 흉이 질지도 모른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열어 줘요! 열어

달라고요!”

“몇 번을 말씀드리지만 잘못하신 것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그저 황비님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것뿐입니다.”

그 변명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말을 건넨

호위병마저도.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요. 그건…… 기만일 뿐이잖아요.”

에즈라는 쓸리고 까진 손을 감싼 채로 훌쩍였다. 등을 기댄

문은 야속하게도 차갑고, 너무 굳건하다. 문 너머의 호위병의

얼굴 같은 건 익혀진 지 오래. 연회가 열렸던 날을 기점으로

침실 안에 갇혀 단 한 번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마지막 기대를 걸고 조심스레 건넸던 보내 달라는 한마디는

불씨가 되어 바짝 마른 남자의 마음을 태워 나갔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런 말 따위는 입에 담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미치광이 같은 남자가 저를 강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처음에는 거칠게 반항했다. 끔찍하게도 손을 뻗은 남자는

뺨을 맞아도, 온몸으로 저항하며 주먹질을 하고 깨물어도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피를 볼 때마다 그는 마치 벌을

주듯 험악하게 굴었다. 그 아래서 엉엉 울고 빌며 손톱을

세웠지만 결국 진이 빠지는 건 저 혼자였다.

어느 날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불쌍한 척 자비를 구했지만

오히려 분노에 기름을 부운 양 그는 끝끝내 제 몸속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끈적이는 흔적을 몇 번이고 남긴 후에야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하루도 빠짐없이 늘어진

몸을 달래 주고 손수 닦아 주었지만 차갑게 식은 몸에 닿는

가증스러운 손길은 소름만 끼쳤다.

그를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도망칠 수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 이후로 에즈라는 그에게 몸을 내주었다.

차라리 그가 원하는 게 이것이기를 바랐다. 행위에 질리면

놓아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예전과 다른 너라도 상관없어. 몇 번이라도 기억을

잃는대도 괜찮아. 그때마다 다시 가지면 되 니까.’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이 남자를 사랑했던 걸까. 에즈라는

망설임 없이 부정할 수 있었다. 사랑했을 리 없다고. 이렇게

잔악하고 공포스러운 사람을 사랑했을 리 없잖아.

‘이쯤 되면 받아들이는 게 편할 텐데"

아니, 이제는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포기한 것이 분명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네모난 공간 속에서 하는 것은 그저 먹고

씻으며 남자를 받아 내는 것뿐이라니. 길거리 창부를 대해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제발 내보내줘.”

눈을 감고 머리를 쥐어뜯어도 밤새도록 놓아 주지 않던

남자의 열띤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데 필사적이었다.

괴로움과 쾌감에 신음하며, 가슴에 물기 어린 숨을 내뱉다가

홍조를 띤 채로 입술을 내린다. 입맞춤만은 싫어서 얼굴을

돌리면 머리칼을 험하게 잡아채고 파고들었다.

혀를 깨문 적은 있었지만 그는 잠시 움찔하다가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피가 싫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지 만.

젖은 뺨을 마구 닦아 낸 에즈라는 냉기가 올라오는 바닥에서

힘겹게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걸음마다 아래가 얼얼하고

허리가욱신거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겨우 침상에 걸터앉은 에즈라는 축 늘어진 몸을 한껏

웅크렸다.

“시프나드.”

나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아.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내가 계속

여기 갇혀 있으면 나를 찾지 못하겠지. 어쩌면 이미 여기저기서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몰라.

쉽지 않겠지만…… 나를 찾는 걸 포기하지 말아 줘. 나는

이곳에서 이 남자와 살아갈 자신이 없단 말이야.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시야가 점멸했다. 둘러싼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곳은 어둠밖에 없었다. 눈물로 얼룩진

여자의 얼굴이 잠시나마 평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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