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쯤 되면 거절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히폴로테스의 얼굴빛이 단번에
환해졌다.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셀리와
하녀들이 줄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비를 부족함 없이 모시도록 해라.”
“예.”
“늦지 않게 데리러 올게.”
늦게라도 거절의 말을 들을까, 히폴로테스는 대답도 듣지
않고 큰 보폭으로 침실을 나섰다. 에즈라가 여전히 갈팡질팡
고민하는 동안에도 하녀들은 셀리의 지휘하에 에즈라를 보석
다루듯 하며 채비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시작된 일련의 과정은 황혼이 져 갈 무렵에야 모두
끝이 났다. 어찌나 준비할 것이 많은지 여러 손길에 이리저리
휘둘린 에즈라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앉아만 있으면
된다면서 이렇게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일일 줄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거절했을 것이다.
막심한 후회를 하면서도 에즈라는 제 모습을 판판한 거울에
비춰 보았다. 살짝 부른 배를 고려한 넉넉한 키톤은 결코 부해
보이지 않는다. 어깨 위에 얹은 케이프는 흘러내릴 듯 부드럽고
가장자리를 따라 섬세한 자수를 수놓았다.
마지막으로 키톤을 고정한 금빛 피불라에는 와스터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그것을
만지작거리자 셀리는 흡족함에 어깨를 쫙 폈다.
“제국의 황비님께서만 사용하실 수 있는 피불라예요. 전대
황비 님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물건이지요."
“그렇군요.”
“그럼 이만 가실까요. 모시겠습니다.”
셀리와 하녀들이 양쪽으로 비키며 길을 내자 에즈라는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고 그 앞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보였다. 연회라면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간소한 차림이었으나 그의 허리에는 선명한 금색 띠가 둘러져
있었다.
허리띠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다. 질끈 감은 눈앞에 나타난 희미한 환영.
잡아끄는 우악스러운 손길과 흐느적거리는 제 옷자락과
앞서가는 이가 허리에 둘렀던…… 검은 띠.
하늘에서 펄럭이는 깃발에 선명한 와스터 제국의 문양까지
기억해 내자 단번에 식은땀이 맺혔다. 주변의 온도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것만 같아 에즈라는 몸을 옹송그렸다. 어깨 위에
얹어진 피불라를 떼 내 던지고만 싶었다. 창백해진 채로 어깨를
더듬자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히폴로테스가 손목을 아플
만큼 꽉 죄어왔다.
살짝 비틀어 보아도 벗어날 수 없었다. 체념하고 힘을 뺐으나
히폴로테스는 어림도 없다는 듯 더욱 세게 잡아 오기만 했다.
그렇게 에즈라는 반강제적인 손길을 따라 연회가 열리는
트리클리니움으로 향했다. 수많은 별채 중 하나에 마련되어
있는 트리클리니움은 자그마한 목소리도 울릴 만큼 웅장했고
활짝 개방된 채로 성대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서 에즈라는 사치와 향락에 젖은 이들을 얼빠진
얼굴로 둘러보았다. 기다란 테이블마다 늘어져 있는 저 푸짐한
음식들은 각자의 맛과 풍미를 뽐낼 것이다.
귀퉁이마다 즐비한 와인 통과 귀족들 사이사이를 누비며
시중드는 하녀들. 값비싼 리라를 타는 악단의 섬세한 손길. 그
음률에 맞추어 손짓하는 무희들의 옷자락 끝에 달린 금술은
잔잔한 물결처럼 찰랑인다.
슬럼가의 사람들은 세상에 이런 낙원이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차라리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닿았다. 쓰라린 웃음을 흘리자
히폴로테스는 빈틈없이 맞잡은 손을 성마르게 잡아끌었다.
에즈라는 히폴로테스를 따라 홀 중앙을 가로질러 열댓 개의
계단 위로 올랐다. 가식을 두른 채 옹기종기 모여 술잔을
기울이던 이들은 두 사람이 황금 의자에 자리하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어렵게 마련한 자리에 참석해 주어서 고맙군.”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 속에 히폴로테스의 감미로운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옆에 선 시종장이 트레이를 내밀자
히폴로테스는 지나치게 번쩍이는 축배를 들어 올렸다.
“다른 일은 모두 잊고 이 자리만큼은 즐겨 주었으면 좋겠어.”
그가 자리에 았자 악단들은 다시금 연주를 시작했다. 경쾌한
선율에 달아오른 이들은 직위 고하에 따라 순서대로 황제와
황비의 발아래서 예를 갖추었다.
수많은 이들의 대화와 엉켜 드는 곡조에 정신은 어지러웠고
속이 울렁거렸다. 와중에 이름 모를 이들의 아부는 모두
후계자의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탐욕스러운 눈빛이 예외 없이
배를 향할 때마다 에즈라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고 싶었다.
점점 새파랗게 질려 가는 에즈라를 아는지 모르는지
히폴로테스는 무감한 얼굴로 귀족들의 찬사를 대충 홀려
넘기고 있었다. 꽂혀 드는 시선들이 두려워 애꿎은 손끝만
괴롭히는데 우글거리는 사람들 속 누군가의 인영을 발견한
에즈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멀미가 싹 달아날 정도로 놀란 에즈라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파리한 안색의 여자가 갑자기
일어서자 남몰래 그녀를 흘깃거리던 시선들이 대번 노골적으로
변했다.
“에즈라.”
옆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쏟아지는 인조적인 빛 무리 너머, 그림자가 진 곳에 숨어서 저를
지켜보던 검은 인영은 분명 시프나드의 것이었으니까.
새까만 머리칼과 찦어져 치켜 올라간 눈매 등, 이목구비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그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약속대로 나를 데리러 온 것이라면 이곳에 있는 내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에즈라는
환영처럼 금세 사라져 버린 자취를 좇으려 발꿈치를 들고
그곳을 샅샅이 살폈으나 어디론가 가 버렸는지 시프나드는
그곳에 없었다.
초조함에 입술을 마구 깨물던 에즈라는 참지 못하고
재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말하려는
그녀의 계획은 히폴로테스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썰물처럼
쓸려 나가고 없었다.
불시에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멍하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한 남자는 기대를 짓뭉개고 희망의 불씨를
꺼트렸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에 휩싸인 에즈라는
자신을 찢어발길 듯 노려보는 히폴로테스를 마주한 채로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가엾게 보일 정도로 파들파들 떠는 제게 다가오는 그의 손이
느리게 보였으나 그것은 그저 그리 느꼈을 뿐이다. 매가 먹이를
사냥하듯 팔을 낚아챈 남자의 눈은 배신감과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자리를 지켜야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그냥 내 옆에 앉아만 있으라고 했잖아. 그것마저도
그렇게 힘든 일인가?”
애써 기워 놓은 갈가리 찢어진 조각들은 조금만 힘주어
당기자 여러 갈래로 갈라져 망가져 버렸다.
“말라 죽어 버릴 듯한 얼굴을 해서는, 고작 닮은 그림자
하나에 나를 뒤로하고 내달릴 만큼이나?”
살벌한 비아냥이 퍽 충격이었는지 에즈라는 눈 한번
깜빡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우스워? 아아, 그래. 구걸하듯 손도 못 대고
울면서 벌벌 기니까 그럴 만도 하겠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머저리여서 너를 곁에 두고 손가락만 빤 건 아니야.”
“나, 나는 그게……?
무서울 만큼이나 빨라진 맥박이 가녀린 목덜미 한구석에서
펄떡이는 게 보였다. 더듬더듬 말을 내놓았으나 히폴로테스는
더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솔직히 말해 봐, 에즈라. 시프나드를 사랑해?”
사랑하냐니. 그 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문이 턱
막혔으나 곧 평정을 찾았다. 저는 제 감정 하나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시프나드를 향한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쯤은
자신이 제일 잘 아는 일이기도 했다.
사랑이냐는 물음에 하마터면 고개를 내저을 뻔했으나 지금은
부정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에즈라가 부정도 긍정도 않자
히폴로테스는 미끈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렇게 나를 뒤로하고 돌아가고 싶을 만큼?”
한 가닥의 희망을 붙든 에즈라가 뻣뻣한 고개를 끄덕이자
히폴로테스는 뒤늦게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열린 창
너머로 밤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칼을 잔잔히 혼들고
지나간다. 나른하게만 보였던 붉은 눈동자에 생생한 분노가
비쳤다.
“안 돼.”
히폴로테스는 태연하게 턱을 괴며 대놓고 에즈라를
비웃었다. 하찮은 거부와 반항에 순순히 포기하고 놔줄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끝까지 울고불고, 아등바등 놓아 달라
매달리겠다면 그조차 내 품에서 해야만 해.
“불쌍한 에즈라, 어쩌지? 나는 지옥 끝까지 너를 놔줄 생각이
없는데. 네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시체라도 껴안고 살아갈
생각이거든.”
매일 밤, 곁을 지키며 빙빙 돌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제
곁을 떠날 수 없다는 걸 각인시키려는 듯 그는 씹어뱉듯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라만 보고 있는 건 적성에 맞지 않네.”
손대면 부서질까 머뭇거리던 남자는 꿈이었던 모양이다.
서슴지 않고 다가온 커다란 손길이 뺨을 감싸고 붉게 물든
입술을 엄지로 지분거렸다. 야릇하게 젖어 드는 눈동자에
정염이 불탔다.
“애원하는 건 이제 끝났어. 아주 지긋지긋해.”
“참고로 나는 예전과 다른 너라도 상관없어. 몇 번이라도
기억을 잃는대도 괜찮아. 그때마다, 몇 번이나, 계속해서 다시
가지면 되니까.”
에즈라는 그제서야 잘못 내디뎠다는 것을 깨달았다. 믿고
밟은 돌다리는 자그만 무게에도 와르르 부서져 버릴
것이었다는걸.
“그러니까 너도 이제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많이 저질스럽거든.”
음산한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려 퍼져 아무 말도,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기억이 날 것만 같아서. 이
모습이야말로 기억 속에 묻혀 있는 이 남자의 진정한 면모라는
걸느낄수 있었다.
그 모든 건 먼발치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연인의 다정한 눈 맞춤으로만 보였다. 흡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대에 걸쳐 황족을 보필해 온 고위 귀족들 주변에는
날고 긴다는 이들이 파리처럼 몰려들어 그들을 치켜세웠다.
곧 탄생할 후계자의 반려가 유서 깊은 가문들에서 나올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미 권력을 움켜쥔 양 으스대는
이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둘러보던 아브타크는 뒤돌아 성큼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중심을 벗어난 아브타크는 홀 밖을
서성이는 남자를 스쳐 지나가며 작은 주머니를 바닥에 툭
내던졌다.
“계획대로 되었다. 부른 것보다 값을 더 쳐주었으니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
묵직한 소음을 내며 떨어진 주머니를 주워 든 멀대 같은
남자는 입술을 핥으며 작게 소곤거렸다.
“암요, 충분하고말고요. 그…… 혹시 또 달리 부르실 일이
생긴다면 꼭 다시 찾아 주십시오.”
“글쎄 두 번 다시 나를 볼 일은 없을 거다.”
차분한 대답을 내놓은 아브타크는 자연스럽게 빙 돌아
다시금 연회가 열리는 곳을 향했다. 아둔한 놈은 아마 황궁을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살수들에게 목이 댕강 잘릴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겠지.
무엇보다 오늘의 목적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아브타크는
멀찌감치 떨어져 모든 것을 관망하는 여자를 발견하곤 샐쭉
웃음 지었다. 늘 중심에 서 있던 라티아는 예전과 달리 몸을
숨기고 기척을 죽이는 쪽을 택했다.
그녀의 회피 성향이 모두 비참한 흉터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아브타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동정? 피붙이에 대한
동정 따위는 그에게 잊혀진 지 오래였고,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녀를 충동질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오랜만인데 잠시 이야기라도 하는 게 어떠냐.”
“인사만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서요.”
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라티아의 앞을 아브타크가 은근슬쩍
가로막았다. 라티아가 차갑게 일갈한 후 지나쳐 가자
아브타크는 이죽거렸다.
“언제부터 그리 사람을 피하게 된 건지. 겨우 흉터 하나
때문에? 한때 황제가 아끼는 여인이 추락하더니 마음까지
추해졌나 보구나.”
대놓고 아픈 곳을 찌르자 모래 위의 성처럼 위태롭던 여자는
비명처럼 내질렀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당신이, 당신이 내게 그 서신만
전하지 않았어도……!”
“우습구나. 너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건 황제와 너지. 네 선택이
아니었나? 나는 네게 그리하라 명한 적 없다.”
뭐?”
“화살을 애꿎은 사람에게 돌리다니 한심하기는. 그러니까
네가 그 꼴인 거다.”
믿을 수 없게도 유쾌한 어조였다. 하나뿐인 딸의 절망과
괴로움마저 제 장기말로 쓰려는 남자는 아버지의 탈을 쓴
괴물이었다.
“어때. 여기서 계속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