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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76화 (76/113)

76화

탄식 섞인 혼잣말에 에즈라는 절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얼굴이 베일에 가려져 어떤 표정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뚫어져라 응시해 오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에즈라는 너무도 당연해진 물음을 내뱉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눈망울과 불안에 살짝 움츠러든 어기!!.

손끝을 맞잡으면서도 잔뜩 경계심을 내비치는 에즈라의 모습에

라티아는 돌처럼 굳고 말았다.

“뭐?”

“기,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높으신 분 같은데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퍽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싸늘한 분위기에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으나

여자는 이내 하하, 작게 웃기만 했다.

“기억을 잃었나 봐요.”

“네, 네.”

“어쩌다가?”

“물에 빠지는 사고 이후. 제 이름조차 잊었습니다.”

“그거참…… 편하겠네요.”

뒤늦게 돌아온 대답은 마치 신음 같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말꼬리와 희게 질린 목덜미를 알아챈 에즈라는 또다시 짙은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에 아문 상처가 일순 욱신거린다.

단말마의 신음을 내며 뺨을 감싸 쥐자 에즈라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걱정스레 살피기까지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불공평할 수가 있나. 수많은 이들을 죽인 여자는

황비가 되고, 내 자리를 꿰차는 것도 모자라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았다.

정도를 넘은 증오에 머리를 마구 헝클이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땅을 구르고 당장 이 여자를 바닥으로 밀쳐 마구

짓밟고도 싶었다. 내 모든 걸 빼앗은 여자. 마녀와 다름없이

저주를 몰고 다니는 혐오스러운 존재. 이 여자가 가진 건 원래

내 것이란 말이야!

그리 윽박지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뺨을 후려치고 싶어

한 발자국 다가서려던 그때 결국 몸이 휘청이고 말았다.

에즈라가 기민하게 부축하려 다가섰으나 호위병이 한발

빨랐다.

“괜찮으십니까!”

차마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달려들어 검은

머리칼을 마구 잡아 뜯고 싶음에도 힘 빠진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으니까. 호위병을 붙들고 한참 헐떡이자 뒤를

지키고 있던 하녀들이 호위병에게 급히 눈짓을 했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대로는 안 되겠는지 호위병은 라티아의 허리를 받쳐

완전히 그녀를 들어 올렸다. 발 빠르게 멀어져 가는 이들을

멀거니 서서 지켜보던 에즈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특한 기운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내려앉은 듯한

공포에 팔뚝을 감싸던 에즈라는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을 가린 하얀 베일이 팔랑이던 찰나, 뽀얀

뺨을 가로지르는 붉은 흉터가 드러났더랬다.

가로로 새겨진 반 ‘쎰 정도의 상흔. 내보이고 싶지 않아 숨겨

두려던 치욕을 엿본 기분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뒤를 지키고 서 있던 호위병이 나직이 일러 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즈라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도망치듯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낮에 있었던 소동을 전해 들은 히폴로테스가 침실 안으로

걸음한 것은 자정이 가까워진 늦은 밤이었다. 혹여라도 잠을

깨울까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느릿한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그런 자신이 우스워 웃음이 났다.

히폴로테스는 침상 뒤로 비치는 작은 인영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저 바라만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에즈라의 곁에 매

순간 머물고 싶었지만, 그녀가 저를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너무도 잘 알아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한 채로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주변을 맴돌던 그는 어둠 속에 잠겨 뒤늦게 용기를 냈다.

침상맡에 무릎 꿇고 았은 히폴로테스는 잠든 에즈라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리운 눈에 새겼다.

기억을 잃어서 그런 걸까. 에즈라는 악몽에 시달리기는커녕

곤한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한참 망설이던

손끝으로 흐트러진 잔머리를 정리해 주는데 자꾸만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늘 너를 아프게만 했어.”

이미 바닥인 여자, 나 때문에 진창에 처박힌다고 뭐가

달라질까 했었다. 가식과 거짓으로 그녀의 진심을 유린하는

것은 지극히 재미있었다. 살아오며 저질렀던 그 어떤

일탈보다도.

내가 전부가 되어 버린 여자는 이별을 고하면 발밑에서

떠나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네 곁에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그래서 네가 나를 떠나지 못한다는 그 사실이 나를 충만하게

했었던 거야.

아주 작은 중얼거림 끝에 울며 아프다고 말하던 에즈라가

비쳤다. 울듯 웃으며 옷자락을 쥐어 오던 여자는 처음으로

아프다고 고백했었다. 일말의 동정 없이 너를 무너뜨릴 생각만

하는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사랑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나 봐. 살아만 있길

기도하다가도, 기억해 내기를 원하더니 기어코 예전처럼

사랑해 주길 바라고 있잖아.

“너는 내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었어. 어차피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이제 나를 사랑하는 너는 없어. 너를 사랑하는 나만 남고

말았다.

“그게 한결같을 줄 알았어. 네가 내게 쏟던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거든.”

나는 외로워졌어. 너를 이렇게 잡아 두고 있는데도 지금 나는

너무 외로워.

“……그래서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어.”

이렇게 소중한 줄 알았더라면 조금 달랐을까. 이런 어둠 속이

아니라 빛줄기 아래서 환한 너를 마주할 수 있었을까.

언제부터인지 모를 눈물이 턱 끝에 맺혀 침상 자락을 조금씩

적셔 갔다. 볼품없이 달아오른 눈가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눈 깜빡하는 시간도 아까워 너를 담고 또 담기만 했다.

그 아래서 에즈라는 남자의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유 없이 따라 우는 아이처럼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주먹을 세게 말아 쥐고 가빠 오는 숨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싫다, 싫다 하면서도 이런 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정하려 해도 울컥 솟구치는 설움이 버거워지더니 결국 감은

눈 사이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이상하지. 눈을 뜰 용기는 없으면서 점점 당신을 기억해

내고 싶어진다는 게. 이보다 더 다가오진 못한 채로. 나를

이렇게 바라만 보다가 기어코 울고 마는 당신 때문에 마음이

너무 먹 먹해져서. 자꾸만 당신을 아프게 만드는 게 미안해져서.

나는 당신을 기억해 내고 싶다.

설사 그것이 아픈 기억이라 해도. 기억을 잃기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분명 더 아프기를 택했을 것 같아.

기원을 알 수 없는 눈물은 쉽게 멎지 않았다. 부디

지긋지긋한 악몽을 꾸는 거라고 생각하길 바라며. 그렇게

한참을 따라 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에즈라는 요즘 그 말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중이었다. 닥친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한 삶에 몸은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덕분에 진정 저는 황비였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몽글몽글 자리 잡고 있었다.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에 가까웠다. 지금처럼 이렇게

유능한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수 있으니까.

“입덧은 어떠십니까? 지금쯤이면 가라앉을 때가

되었는데요.”

“가라앉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원래 심한 편은

아니어서요. 몇몇 음식만 조금 가리는 편이었어요.”

“다행입니다. 황자님께서는 벌써부터 효심이 깊으시군요.”

아버지‘뻘인 의사는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뢰감을 주는 푸근한 인상에 불룩해진 아랫배를

다독이듯 쓰다듬자 그 감동적인 모습을 눈에 담던 의사는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었다.

“두통이 생길지도 모르니 많이 불편하시다면 편히 불러

주십시오. 두통을 가라앉히는 약을 지어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시고, 아! 피곤하지 않을 만큼 몸을 움직여

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당긴다고 해서 너무

많이는……"

의사가 꼼꼼한 당부의 말을 줄줄이 내뱉자 에즈라는 지루한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열정적으로 눈을 빛냈다. 그런

그녀를 멀뚱히 구경하던 히폴로테스는 해가 저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의사의 말을 뚝 끊어 냈다.

“이제 됐으니 가 보수. 귀에서 피 날 것 같거든.”

“이런, 죄송합니다. 늙으니 잔걱정과 말만 많아지는군요.”

“아니에요. 저는 정말 좋아요. 자주 오셔서 이런저런 말씀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걸까. 자신보다 퍽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히폴로테스는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등

뒤를 태워 버리려는 듯 맹렬하게 쏘아보는 시선을 느낀 의사는

급히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뒷걸음질로 침실을 나섰다.

“들었던 말 또 듣고 또 듣는 거 안 힘들어? 의사 바꿔 줄까?”

“아니요. 저는 저분이 좋아요. 세심하게 잘 챙겨 주시느라

그러시는 거니까요.”

“아쉽지만 네가 그렇다니까 어쩔 수 없네.”

심통 난 아이처럼 툴툴거리다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남자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안타까워서 에즈라는 고개 숙여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어. 네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니까

참석해 줬으면 좋겠는데.”

에즈라가 반응하지 않자 히폴로테스는 변명하듯 내뱉었다.

“몸을 움직여 주는 게 좋다잖아. 내 옆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면 되거든. 딱히 무리할 일은 없을 거야.”

창틀에 기대어 있던 남자가 몸을 떼며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침상에 앉아 있는 에즈라의 머리 위로 큼직한

그림자가 진다. 줄 수 없는 감정을 갈구하는 남자를 차마

올려다볼 수 없었다.

굳어 가는 입꼬리를 어렵게 끌어 올리던 히폴로테스는 손을

내밀었다. 살짝 떨리는 손끝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힘든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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