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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75화 (75/113)

75화

황궁 안에 간자를 심어 놓은 아브타크가 히폴로테스의

움직임을 눈치채기란 어린아이 사탕 뺏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라티아를 모질게 협박하고, 그녀를 통해 황손의 존재를 알게 된

그가 에즈라를 되찾으려 들 거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건 여자라더니. 제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히폴로테스를 지켜보며 그는 비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황제에게 시프나드를 내어주면 그대로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그리 둘 수는 없는 법.

아브타크는 히폴로테스보다 한발 빠르게 시프나드를 안전한

제 성 안으로 피신시켰다. 황제라도 마땅한 명분 없이 들어설 수

없는 자신의 성이야말로 지금으로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안 그래도 병사들은 푼 것인지 요 며칠 황궁 병사들이 골목을

쥐 잡듯 뒤집고 다녔다. 잡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경고하기 위해

괜한 짓을 하는 것이다. 아브타크는 조소를 삼키며 식탁에 마주

앉은 시프나드를 훑어보았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저를 닦달해 대고 있었다.

“대체 언제 움직일 거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벌써

며칠이 흘렀어.”

“에즈라, 그여자 때문인가?”

송아지 고기를 자르던 아브타크가 무심한 어조로 묻자

시프나드는 무언의 긍정을 했다.

“생각보다 순정파군. 겨우 몇 달 함께했다고 홀딱 마음을 줘

버린 건가? 슬럼에서 야만스럽게 구르던 이가? 아니면 그

여자에게 남자를 홀리는 재주라도 있나 보지.”

“뚫린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 한 번만 더 비아냥대면 너를

베어 버리고 이 성을 차지하는 수가 있으니까.”

“그거참, 무서운 일이군. 그럴 수야 없지. 암. 그렇고말고.”

명분으로 이용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면 이런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양아치 따위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목을 따 버렸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는 히폴로테스를 제외하면 황실의 피가 섞인

유일한이였다.

머리가 돌로 이루어져 앞뒤 꽉꽉 막힌 유서 깊은 귀족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시프나드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필요한 것이라도 쓸모를 다하면 꼬리를 잘라 낸

후 깔끔하게 태워 버리는 것이 자신의 방식이었다. 시프나드의

쓸모가 다하는 날. 아브타크는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리라

다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모든 게

파도에 쓸려 나간 모래성이 될 거고. 그러면 그 여자를 영영 가질

수없게 되겠지.”

“그러니까 언제쯤이냐고. 그 적당한 때가!”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들어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물에 젖어 가듯 눈치채지

못하게 들쑤셔야 하는 아주 번거로운 일이란 말이야.”

“내가 알 바야? 머리 굴리는 건 네가 알아서 하란 말이야.”

“시프나드, 나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네. 기다리면 알아서 네 손에 여자를

쥐여 줄 테니 이리 닦달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럼 네 계획을 말해 봐.”

시프나드가 들고 있던 나이프를 식탁 위로 버리듯 내던지자

금속이 부딪치는 소음이 크게 울렸다. 마뜩잖은 듯 쯧, 혀를 찬

아브타크는 횐 천으로 손가락을 세심하게 닦았다.

“황제의 곁에는 내 딸이 있지. 버려지고 또 거부당해 증오와

복수심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사리 분별이 흐려진 멍청한

여자가.”

“……딸을 이용하겠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지 모르겠군. 알다시피 나는 이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잖나. 그러니까 시프나드 자네는 내 편임을

감사하게 여기는 게 좋아.”

“미쳤군. 당신은 완전히 돌아 버렸어.”

설명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시프나드는 역겨운 구더기라도 본

듯 얼굴을 구겼다. 빤한 시선을 기꺼이 웃어넘긴 아브타크는

더없이 품위 있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미래의 황제께서는 천천히 마저

식사하게.”

속을 벅벅 긁는 말에 험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자 시프나드의

의자가 뒤로 벌러덩 넘어가 나뒹굴었다. 소음에 깜짝 놀란 종들의

시선에도 그는 사나운 눈빛으로 아브타크의 등 뒤를 노려볼

뿐이었다.

실종되었던 황비를 찾았다는 소식은 곧 수도를 넘어 작은 항구

마을까지 널리 퍼져 나갔다.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맨 만큼

백성들은 환호하며 황비의 귀환을 반겼으나 귀족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했다.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다. 미리 손을 써서 죽여야

했다. 악심을 품으며 놓친 기회를 아쉬워하는 이들까지 있었으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허나 황비가 황손을 품었다는 소식이

이어지자 귀족들은 돌연 눈을 반짝 빛내며 태도를 바꾸었다.

황자를 수태한 황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황자를 무사히

낳게 된다면 에즈라는 황실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테고, 그렇게

되면 에즈라의 출신 같은 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곧 태어날 황자의 반려 자리를 두고 다른 귀족들과 경쟁하는

것이 먼저였다. 에즈라에게 꼬리를 흔드는 건 어디로 보나 밑질

게 없는 장사인 셈이다.

덕분에 요 며칠 에즈라는 줄줄이 들어오는 황금 상자에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황비께 바치는 것이라며

온갖 귀한 것들이 방 몇 칸을 채우고도 남았으니까.

이쯤 되니 아무리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정말 저 같은 것이 제국의 황비였던 걸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아니라고

마음을 다독였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거부감만 드는데, 그럴 리가

없잖은가.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저…… 황비님. 괜찮으세요? 오늘 도착한 귀중품들은 우선

모두 다른 곳으로 치웠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말씀 낮추시래도요.”

제 시중을 드는 붉은 머리 하녀가 울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분명 이전에 자신을 아는 것처럼 행동했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자꾸만 기억해야만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저를 기억하는 이들에 대한 죄책감과 기억해 내야 한다는

의무감. 그것에 짓눌리는 하루하루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제가 말을 낮추었나요?”

“그럼요! 에즈라 님께서는 황비님이셨는걸요. 아니, 지금도

황비 님이시잖아요.”

“죄송해요.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기억나지도 않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기억나실 거예요.”

하지만 기억이 돌아오는 게 그녀에게 좋은 일일까. 셀리는

그늘진 에즈라를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힘겨웠던 기억들을 모두

잊고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는 게 그녀에게는 훨씬 더 나은 일일

거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어색한 미소를 띤 셸리는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에즈라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에즈라 님, 히폴로테스 님께서 외출을 허락하셨어요. 날도

좋으니 저와 함께 산책을 하시는 건 어떠세요?”

이 역시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일과였다. 셀리의 제안에 몸이

무겁다는 핑계를 대려는데 거절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녀는

급히 말을 이었다.

“황궁 안에는 정원은 물론이고 커다란화까지 있어요.

황비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에도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고

더욱 아름답게 가꾸었답니다. 이게 모두 황제께서 심혈을 기울인

덕이죠.”

“겨우화 하나에요? 어째서요?”

“음, 그러니까 그게

에즈라 님께서화를

좋아하셨으니 까요.”

"제가요?”

딱히 물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물에 빠져 생사를

넘나든 이후에는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다. 에즈라는 티 나게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곳에 있는 게 마음 편해서요. 저한테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셀리가 단번에 실망 어린 표정을 했으나 그것을 헤아려 주기엔

혼란이 거셌다. 에즈라가 말없이 침상 끄트머리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자 셀리는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라며 축 처진

어깨를 한 채로 방을 나섰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셀리가 충분히 멀어졌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자 에즈라는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선 그녀는 귀를 대고 문밖의 동향을 살피려 애를

썼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인기척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호위병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게 가둬 둔 게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생각해 주는 척.

아끼는 척하면서 자유를 억압하고 속박하려 드는 남자를 좋아할

수 있을 리 없다. 그저 어떻게든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화,황비님?"

열린 문이 등 뒤에 닿자 호위병은화들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구한 녹빛 눈을 깜빡이는 여자는 어리숙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끝내 문턱을 넘었다.

“ 안녕하세요.”

“예? 아. 예. 그런데 갑자기…… 달리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조금 답답해서요. 혹, 제가 이곳을 나서면 안 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폐하께서 황비님의 안위를 잘 보필하라

하셨습니다.”

“그럼 가둬 두라 명하신 것은 아니네요.”

똑 부러진 말투에 두 호위병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상홤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일생일대 중요한

갈림길 앞에 선 그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에즈라의 앞을

막아섰다.

“허락이 있기 전까지 이곳을 홀로 나서시는 건 안 됩니다.”

“하지만 방금 셀리는 정원이나화를 산책해도 된다고

했는걸요.”

뭐가 잘못됐냐는 말투와 당당한 표정에 병사들은 또다시

곤란해졌다. 한 명은 그냥 보내자는 듯 눈짓을 했지만 에즈라의

앞을 막아선 호위병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보필하겠습니다.”

에즈라는 복도 끝을 흘금거렸다. 빠르게 뛰면 어떨까, 잠시

고려해 보았으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금세 붙잡혀 아예 꽁꽁

묶어 버릴지도 모르지. 포기해야 하는 건가. 에즈라가 푸시식

상심하던 그때였다.

“……에 즈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에즈라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는 복도 끝에 걸음을 멈춘 채 저를

바라보았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데 여자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겨 제 앞에 버티고 섰다.

“돌아왔다더니 진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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