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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74화 (74/113)

74화

실은 궁금했다. 어째서 이 남자가 꿈속을 떠나지 않는 건지. 이

남자에게 나는 뭐고, 내게 이 남자는 뭐였는지. 뭐길래 나를 보며

이토록 어렵게 웃는 건지.

“ 돌아가자.”

황홀한 얼굴이 딱딱히 굳어 간다. 마디가 길고 수려한 손가락이

입술을 슥. 스치고 지나가자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뭔가를

알아챈 듯 고심하던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픽, 조소했다.

“잡자마자 입술부터 도려내야겠네.”

잔혹한 말에 움찔하자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어깨에 두 팔을

올리며 느른하게 시선을 맞춰 왔다.

“너 말고. 내가 어떻게 네 입술을 도려내겠어. 내가 네 입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를 위해서라도 그건 못 하지.’’

가슴이 튀어 나갈 듯 격렬하게 쿵쾅거렸다. 이러다가 갑자기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팔딱거리고 숨결이 거칠어졌다.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과 공포에 떠는 걸 모를 리 없는데도 그는 손을

이끌뿐이었다.

시프나드와 함께한 몇 달 동안 에즈라는 단 한 번도 슬럼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답답하다거나. 슬럼 밖의 세상이

궁금하다거나.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아늑하고 안심이 되었다.

슬럼을 벗어나기라도 하면. 폭풍처럼 닥쳐올 무언가를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기라도 한 듯이.

“왜 이렇게 굳어 있어. 긴장 풀고 주변을 좀 둘러봐. 슬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깨끗한 수도잖아.”

옆에 서 있는 남자가 어깨를 감싸 오자 에즈라는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무장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음 놓고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종아리 부근까지 덜그덕거리며 진동하는 전차 우1. 은근히 부푼

배를 한 팔로 감싸 안은 에즈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은근슬쩍 몸을 비틀었다.

“이런 상홤에서 넋 놓고 구경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

아닌가요?”

내가 없는 사이에 많이 변했네.”

“저,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아니. 너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었어. 적어도 내가 아는 너는.”

“그럼 저를 잘못 알고 계신가 봐요. 적어도 지금의 저는

이래요. 바. 바뀔 생각도 없어요.”

생각 없이 툭툭 내뱉은 말에 남자의 얼굴이 매섭게 굳어 간다.

어딘가 충격받은 것도 같고화난 것 같기도 하고, 고요하지만

포효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그시 눈을 맞춰 오는 남자를 피하며

에즈라는 습관처럼 배를 쓰다듬었다.

히폴로테스는 이제는 티 나게 불룩해진 배를 보며 착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뭐라 해야 할까. 감격스럽다거나, 마음이

간질거리며 애정이 솟는다거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자그마한 안심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이 여자를 곁에 두어도 된다는 정당성을 부여해 준, 딱 그

정도의 의미.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건가요?”

나지막한 물음에 히폴로테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즈라 역시

두 번 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저 멀리 가까워지는

으리으리한 성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너무 광대해서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금빛

성문을 보자마자 압도당했다. 처음 보는 게 당연할 텐데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만큼 거부감이 들었다.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삼켜지는 듯도 했다.

“……당신은 누구예요?”

“히 폴로테스.”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에즈라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덧붙였다.

“네 진짜 남편이자, 와스터 제국의 황제.”

믿기 힘든 발언에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마침 성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길이 잘 든 명마는

있는 힘껏 질주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는 이름 모를 꽃과

나무의 향긋한 내음이 담겨 있었다.

꼬질꼬질한 하수구 냄새가 나던 슬럼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고,

평범한 이들은 평생 상상조차 하지 못할 꿈같은 곳. 그리고 딱

그만큼 거북한 곳.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고. 성문 너머

거대한 궁전까지 이어진 길에는 흔한 돌멩이 하나 없었다.

매끄럽게 굴러가는 전차는 성 안을 가로질러 황궁 앞에 멈추어

섰다.

에즈라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전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드리운

황궁은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사치스러운

황금문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먼지가 된 기분이었다.

병사들과 전차가 병영으로 되돌아가는 동안에도 에즈라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황궁을 흁어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 에즈라를 구경하던 히폴로테스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당겼다. 어어,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르자 병사들은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문을 열었다.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널따란 홀과 여러 방향으로 내어진

계단들. 길을 알 리 없는 에즈라는 그저 잡아끄는 손길을 따랐다.

길게 이어진 복도 끝으로 다가가자 병사들은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오늘만 해도 몇 개의 문을 보는

건지 머리가 다 어지러웠으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저를 이끌기만

했다.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는 잡았던 손을 놔

주었다. 살짝 땀이 찬 손바닥을 낡은 키톤 자락에 문지르는데

그는 방 한편으로 걸어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금속이 나뒹구는 소음에 흠칫 몸을 떨던 에즈라는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누운 채로 이리저리 굴러도 될 법한 침상에는

붉은 발이 쳐져 있었고, 옆에 놓인 협탁에는 양피지가 쌓여

있었다.

한구석에 널려 있는 무기와 갑옷. 벽을 따라 여러 개의 램프가

타오르며 방 안을 밝힌다. 황제가 머무는 침실이라기에는

너저분하고 조금 삭막해 보였다.

“기억나?”

“뭐. 뭐가요?’’

“여기서 우리 매일 뒹굴었잖아.”

그가 뒤를 돌며 가슴께에 팔짱을 꼈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불가능한 일이다. 병사들이 지키고

있을뿐더러 분위기를 보아하니 눈앞의 남자가 득달같이 달려와

목덜미를 잡아챌 것만 같았다. 심기가 불편한 황제를 눈앞에 두고

할 수 있는 일은 납작 엎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고귀하신 황제께서 슬럼에 걸음하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주, 죽을죄를 지었어요.”

에즈라는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짚었다. 당장 용서를 구해도

시원찮을 상황이 아닌가. 방만한 말을 쏟아 내는 것도 모자라

황제의 등에 칼을 꽂았다. 당장 목을 벤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죄목이었다.

“내가 황제라는 건 믿으면서 왜 네가 황비라는 말은 부정하는

거야?”

용서하겠다는 말 대신 여유롭게 걸어온 히폴로테스는 고개를

조아린 에즈라 앞을 지키고 섰다. 살짝 들어 올린 시야에 질 좋은

가죽 샌들이 들어왔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라고 생각해?”

정도를 넘은 긴장 때문일까, 배가 당겨 오자 에즈라는 배 속의

아기를 다독이며 속삭였다. 괜찮을 거라고,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가 꼭 너를 지켜 주겠다고.

“시프나드가 아이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너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은 거야?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건…":’

나긋나긋한 말투는 자신을 어린아이 어르듯 했다. 덕분에

경계심이 조금 허물어져 흔들리는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치고

말았다. 솔직해지자면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시프나드의

행동은 여느 남편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사납게 과민반응 하다가 뒷수습을 하기 위함인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었다. 아이를 원치 않았다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을

만큼이나 기껍지 못한 기운에 얼마나 실망하고 가슴이 아팠던가.

실은 의심하고 또 외면해 왔던 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리고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 너는 기억을 잃기 전, 와스터 제국의 황비였고 네가

품은 건 내 자식이야.”

작고 여린 등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히폴로테스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너는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을 가던 길이었고, 습격한

살수들에게 쫓기다가 강물에 바지고 말았어. 나는 실종된 너를

미친 사람처럼 찾아 헤맸지. 비천한 시프나드가 기억을 잃은 너를

가지고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말이야.”

“꽤 재밌었나 봐. 소꿉장난이.”

“송구스럽지만 저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제게는 슬럼이 더욱 익숙해요.”

“그래서 못 믿겠다?”

“그럼 그날 저를 찾아오셨을 때는 어째서 물러나신 건가요?”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잠시 멈칫한 히폴로테스는 평정을

가장하며 더욱 능글맞게 대꾸했다.

“네 배 속의 아이가 내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거든.”

“지, 지금은 어떻게 확신하시나요? 감히 제가 말씀

올리자면…… 황제께서도 아이의 아버지라기엔 그리

기뻐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요.”

“모든 아버지가 아이를 원하는 건 아니니까.”

“……원하지 않으셨나요?”

에즈라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 주눅이 들었지만 을곧은 눈동자로 그를 끝까지 마주했다.

“예전에는 그랬지. 지금은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생각해.”

허탈한 미소를 짓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음영이

드리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믿을 수 없게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황자를 가진 너를 내 곁에 묶어 둘 수 있으니까.”

소름 끼치는 대답에 에즈라가 슬슬 고개를 내젓자

히폴로테스는 어찌할 줄 모르고 입술을 질끈 물다가 이리저리

시선을 배회했다. 불안한 듯 한참을 머뭇거리는 남자는 마치 애가

단아이 같았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에즈라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다 해 줄게. 그때 못해 준 거 다 해 줄게.”

“……네?”

“네 말대로 혼자 두지도. 이용하지도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네 발아래 바칠게. 나를 끝까지 기억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그러니까……:’

창을 가리는 두터운 커튼과 어둠에 잠긴 침실 안, 꽁꽁 닫아

놓은 방 안은 스산하기만 했다. 꿈속에서 저를 지켜보던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그는 태양이 되었다. 건너편은 암흑뿐인.

반쪽짜리 태양.

“나를 사랑해 봐.”

나를 비추지 않던 그가 명령했다.

“예전처럼 나를 사랑해줘.”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은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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