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아주 중요한 일이지. 황비와 황자를 데리러 가야 하거든.”
“황비와 황자요?”
“응.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에즈라의 배 속에 움튼
새끼가 내 새끼라는데 어떻게 에즈라를 놔주겠어. 황실에
황손은 귀하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그렇지?”
이건 집착도 사랑도, 소유욕도 그 무엇도 아니야. 그냥, 그냥
에즈라가 내 아이를 품었으니까. 당연히 내 곁에 있는 게 순리에
맞으니까 그런 거야.
찰나가 너무 길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푸른 새벽빛에
번뜩이고 이채가 돌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히폴로테스를
곁에서 모셨으나 그는 늘 파악하기 힘든 주군이었다. 그러니
이처럼 당혹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지금처럼 그를 알기 쉬운
적은 결코 없었기에.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어긋나 버린 남자를 간파할 수 있었다. 그의 어딘가가 엉켜 버린
실타래처럼 꼬여 망가져 버렸다는 걸.
‘라티아 님은? 조금 진정되셨나?’
‘동이 트고 나서야 기절하듯 잠이 드셨습니다.’
집무실로 향하는 이른 새벽, 종들이 두런두런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잠들기 어려운
일이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는 흔한 것 아닌가. 별일
아니겠거니 지나쳤었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주제도 모르고 대답을 안 해.”
“아닙니다.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돌변한 남자는 피를 뒤집어쓸 때처럼 뜨겁고, 또 싸늘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은 따르는 자리일 뿐.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발 앞에 바칠 것이다. 혹, 그것이 잘못된
길이거나 끝이 추락뿐인 결말을 맺는다 해도.
“무엇이든 따를 것입니다.”
그 시각, 슬럼에도 아침은 찾아왔다.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에
눈가를 비비적대자 흐린 시야가 점점 초점을 찾는다. 에즈라는
침상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망토를 두르는 시프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프나드? 어디 가요?”
“언제 깼어?”
“방금요. 그런데 웬 망토를 다 꺼내 입어요?”
시프나드는 대답 없이 몸을 일으키는 에즈라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서글픈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렸다.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가 뚜벅뚜벅
가까이 다가왔다.
“나 일하러 가.”
“무슨 일이요? 그러고 보니 시프나드 지금까지 매일
뒹굴거리기만 했잖아요. 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럼 왜 말해
주지 않았어요?”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일 일하고 있었어. 솔직히 너무
즐거웠지. 지금 이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아쉬울 만큼.”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너 내가 무슨 일 하는 줄은 알아?”
순진한 얼굴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의심
한 점 하지 못하다니. 메에 하고 우는 어린 양 같은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셨다.
“……몰라요. 호, 혹시 사람한테 피해를 입히거나 그런 건
아니죠?”
“지금 나 떠보는 거야? 완전 의심하는 얼굴인데.”
빙글빙글 말을 돌리며 능글거린다. 그가 무언가를 감추려 할
때 쓰는 수법이라는 걸 모르지 않기에 에즈라는 눈살을 좁히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한 발자국을 남겨 놓은 채로 가슴께에
팔짱을 끼며 설교를 시작하려는데 그가 손을 “벋은 것이
먼저였다.
“홉!”
아플 만큼 턱 끝을 잡은 그가 고개를 내려 입술을 겹쳐 왔다.
뜨거운 입술에 놀라 멍하니 굳어 있는데 그가 애단 눈빛으로
재촉해 온다. 기다리지 못한 남자가 턱 끝을 잡아 내리자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가 불쑥 넘어와 입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하아……"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흐르는 신음. 살그머니 눈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던 그는 다시금 고개를 틀며 더욱 깊이
침범했다. 커다랗고 단단한 몸체에 밀려 비틀거리자 그는
등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더니 뒷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틀어쥐었다.
“숨쉬어.”
도망갈 수도, 밀어 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혀를 얽는 야릇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움찔거리는 작은 혀를 쫓으며
간지럽히다가 그는 킥킥 웃기도 했다. 파들거리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내 남자는 이마를 맞댄 채로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놀라 벙찐 여자의 뺨이 불그스름하다. 그가 손끝으로 톡톡, 뺨을
다독이더니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머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에즈라가 두 팔로 그의 가슴팍을 힘 있게
밀치자 시프나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훌쩍 뒤로 물러섰다.
집요했던 입맞춤 탓에 부푼 입술은 열감을 뿜어냈다. 입을 한
손으로 가린 채 에즈라는 더듬거렸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왜,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하, 하는
거예요?”
“나 없는 사이에 보고 싶다고 울지 말고. 사지 멀쩡하게
기다리고 있어. 영웅처럼 짠, 하고 데리러 올게.”
“……시프나드.”
기다리라니. 데리러 오겠다니.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
같은 말투에 발밑이 아득해지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저를 홀로
남겨 두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걸까. 늘 멋대로인 이 남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에즈라는 문득 자신이 이 남자를 무척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절박하게 그의 망토 자락을 움켜쥘
리 없으니까.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도, 돈 벌어 오지 않아도 돼요. 제가 일을 구하면 되잖아요.”
“……뭐?”
“저 일 잘해요. 사지 멀쩡하고요. 돈이 필요해지면 나도
일자리 구해서 뭐든 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자는 이내 매달리듯 두 손으로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눈동자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다.
하마터면 손을 뻗어 눈물을 훔쳐 줄 뻔한 그는 손끝을 잘게
떨었다.
“그냥여기 있으면 안돼요?”
가지 마. 나를 버리지 마. 나를 혼자 두지 마. 혼자는 너무
무서워. 죽어도 혼자 남고 싶지 않아.
에즈라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울먹이고 말았다.
“가지 마. 가지 마요, 제발.”
“에즈라.”
“또, 또 키스해도 돼요. 혹시 여자가 필요한 거면…… 나,
나도 할수있어요.”
“에즈라, 에즈라 진정해!”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잠재웠던 끔찍한 곳을 건드린 것인지 에즈라는 반쯤 미친
여자처럼 자신의 옷자락을 들추며 그에게 몸을 부대껴 왔다.
그건 열망이 아닌 발악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젠장, 시프나드는 작게 욕을 중얼거리며 여자의 가느다란
팔을 금세 제압한 후 꽉 끌어안아 주었다. 뭐가 그리 괴로운
것인지 헐떡이며 엉엉 우는 여자의 몸이 곧 내려앉을 재처럼
위태롭다. 이런 상태인 너를 두고 가야 한다니. 그 미치광이의
품으로 다시 보내야 한다니.
그가 턱이 불거질 만큼 이를 악무는데 문 너머에서 배회하던
기척이 결국 소리를 냈다.
“시프나드 님. 시간이 없습니다.”
한풀 기운이 꺾인 여자는 품 안에서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조금이나마 진정된 에즈라를 침상에 앉히며
시프나드는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때 다시 밖에서
그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황제가 이리로 올 겁니다. 지금도 많이 늦었습니다.
촉박합니다.”
“알겠으니까 조용히 해.”
날 선 목소리로 일갈한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껏
누그러진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에즈라, 너 버리고 가는 거 아니야. 데리러 갈 거야.
맹세할게.”
맹세? 거짓말. 그런 건 더 이상 믿지 않아. 버리고 가는 게
아니라면서 이건 뭐야. 왜 혼자 두는 거야. 어째서 나를 데리고
가지 않는 건데.
선택하는 사람은 모르는 거야. 나는 기다릴 자신이 없는데
무책임하게 기다리라고 하는 건…… 기다림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사람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라는 걸.
그러니 내게 나중을 기약하지 마.
“시프나드님!”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즈라는 무릎을 감싸 안으며
고개를 묻었다. 받아들이기보다는 포기한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망설일 새는 없다. 날카롭게 창밖을 살피던 시프나드는 곧
빠르게 뒤를 돌았다.
“조금만 기다려줘.”
대답 없는 부탁이 허공을 맴돌더니 이윽고 홑어졌다. 남자가
떠난 자리에 아침 공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얼마나 한참을
그렇게 웅크려 있었을까.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을 고요함이
일깨워 주었다.
“기다리지 않을거야.”
이제는 떠나갈 사람 따위 기다리지 않을 거다. 늘 이렇게
혼자 남겨지고 말 거라면. 차라리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게
좋잖아.
뺨을 적신 눈물이 턱 끝에 고여 뚝뚝, 침상을 적셨다.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입을 틀어막는데 일순 밖이 시끌시끌해졌다.
눈물이 멈출 만큼 커다란 소란에 에즈라는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일사불란한 발소리와 날붙이들끼리 맞붙는 뾰족한 소음.
후다닥 창에 다가서서 까치발을 들어 아래를 내려다본
에즈라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저 남자는
고작 한 번 마주친 게 다인데도 모든 게 익숙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남자와 운명처럼 재회한 순간, 에즈라는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오로지 어둠뿐인 꿈속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 떠나지 않던 악몽의 주인.
그가 웃었다. 맑고화창한 날과 더없이 어울리는 해맑은
미소로.
“끌어내.”
먼저 시선을 돌린 남자가 곁을 지키던 병사 둘에게 명령하자
그들은 곧장 목조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릿하고 절도 있는 발소리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더니 단숨에 문 앞까지 도달했다. 공포에 덜덜 떠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반항해 봤자 문제를 크게 만들기만 할
것이다.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병사는 정중했고, 그만큼 위협을 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열지 않으시면 부수는 수밖에 없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에즈라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부술 수는 없다. 시프나드와 함께 머물었던
안식처를 그렇게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벌컥 문이 열리자 손쉽게 문을 열어 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는지 병사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곧바로 무표정하게
돌아온 병사는 에즈라의 한쪽 팔을 단단히 잡고 조심스럽게
끌어냈다.
에즈라는 끝까지 반항하지 않았다. 그런 건 권력자들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아니라
밑에서 저를 기다리는 남자와 이야기를 하는 게 최선임을
모르지 않았다.
다른 병사가 반대쪽 팔을 잡아끌자 에즈라는 마치 죄인이
호송되는 모양새로 건물을 벗어났다. 한낮의 볕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남자의 은발에 닿아 반짝이며 부서진다.
“에즈라.”
나지막하게 이름을 되뇌인 남자는 반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코앞에서 저를 내려다보았다.
“데리러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