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아, 어제 급히 다녀올 곳이 있었거든요.”
“어 딜 다녀오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히폴로테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겨우 그것뿐인데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일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것보다 상처를 치료하고 물기를
말려야겠어요. 하녀에게 수건을 가져오라 이를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딱 잘라 거절하는 히폴로테스는 한 발짝, 두 발짝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저를 향해 늘 부드럽게 웃음 짓던
남자였으나 지금만큼은 달랐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젖은 게 불쾌하다면 당신이야말로 물기를 닦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흠뻑 젖어서 그러고 있으면 꼴릴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대체 나를 뭐로 생각했길래.”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나던 라티아는 등 뒤에 턱, 닿아
오는 차디찬 창틀의 감촉을 느꼈다.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다. 시뻘건 눈동자와 제대로 눈을 맞춘 그녀는 한쪽 팔로 제
가슴팍을 가리며 벌벌 떨었다.
이것이 이 남자의 본모습일 것이다.
“젖은 고깃덩이는 전쟁터에서 너무 많이 봐 와서 감흥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허튼짓하지 말아요. 뭘 해도 너한테는
안서거든.”
신랄한 조롱에 라티아는 하, 실소를 흘렸다. 두렵고
수치스러우면서도화가 났다. 그런 라티아를 무감하게
이리저리 살펴보던 히플로테스는 한숨 쉬듯 내뱉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너보다 내가 더 예쁘게 생겼잖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며 싱글거리던 남자는 제
턱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왜 거짓말을 했어요.”
“무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아, 정말. 이런 상황까지 왔으면 분위기 파악을 해야죠. 내가
너를 못 죽여서 이러고 있는 것 같아?”
키득거리는 남자의 표정이 곧장 기이하게 뒤틀린다. 소리도
없이 칼을 빼 든 남자의 칼날에는 이름 모를 이의 핏물이 엉겨
붙어 있었다.
“안 그래도화가 나서 미치겠는데 너 하나 다져 버리는 건
일도 아니야.”
그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으며 가슴께에 팔짱을 꼈다.
라티아는 사납고 잔인한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희게
질려만 갔다.
“에즈라가 질투 났어? 내가 너 말고 에즈라를 황비의 자리에
앉혀서? 너한테는 안 서는 게 에즈라 앞에서는 발딱발딱 잘도
서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거짓말을 하면 어떡해.”
“거짓말한 적 없어요. 저도, 저도 정말 에즈라가 죽은 줄
알았어요! 아, 아버지께서 찢어진 키톤을 주면서 에즈라가
죽었다고 했다고요!”
“네가 알았든 몰랐든 중요한 게 아니야. 확실하지 않으면
내게 지껄이지 말았어야지.”
순 억지나 다름없었지만 반항할 수 없는 건 지금 이 말조차도
거짓이기 때문이었다. 실은 알고 있었지 않나. 에즈라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이 남자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그냥 죽이고 싶지 않아. 이왕 죽인다면 조각조각
내고 살과 뼈를 발라서 개돼지 먹이로 던져 주고 싶어. 그러니까
개돼지 배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거야. 지금 너를 당장 죽이지 않는 건,
내게 들을 말이 있어서거든.”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 비틀거리는 라티아는 창틀을 짚은 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는
여자의 위로 에즈라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이가, 아이가 있어요. 그러니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아이가 있다고 했어. 자그마한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며
그리웠던 눈동자로 울먹였지. 아이가 있으니까 제발 살려
달라고, 남편을 살려 달라고. 내 밑에서 달아오른 얼굴로 신음할
때는 언제고. 그 근본도 없는 새끼를 남편이라고 부르면서……
그 새끼의 애를 배고. 아이가 있다고. 아이가, 아이가 있다고.
아아, 생각하면 할수록 저를 좀먹는 일이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니으 이미 미쳐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눈앞이 자꾸만
벌겋게 물들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울컥 치미는 감정은 더러운
증오와 질투, 그리고 추악한 분노였다.
정신이 비틀렸다. 감정이 손바닥 뒤집듯 뒤바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에즈라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그녀에게
잘된 일이라고 성자처럼 굴 때는 언제고. 눈앞에 에즈라가
아른거릴 때마다 모든 순간이 후회로 점철된다.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나를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그냥 껍데기라도 붙잡아 옆에 두는 게 옳았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생각해 주는 척, 뒤로하고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더라면…… 괴로워하는 너를 보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게
더 고통스러울 줄 알았더라면 !
“필요 없는 건 살려 두지 않아.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알아서
잘 기라고. 응?”
“우욱!”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티아는 구역질을 해 댔다. 몇 번이나
신물을 쏟아 내던 여자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허리를 들자
시뻘겋게 달아올라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가 보였다. 고인
눈물을 감흥 없이 응시하던 히폴로테스는 입을 뗐다.
“에즈라가 임신했다는 거, 알고 있었지.”
“……네.”
“그럼 그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겠네.”
“시프나드라고는 하는데 솔직히 믿을 수가 없어서.”
“믿기 싫은거겠죠.”
“사실 그것도 그래.”
“에즈라가 실종된 기간만 해도 서너 달이에요. 그동안 그
남자랑 지내며 아이 하나 만드는 게 어려웠을 것 같아요?”
질투에 눈이 멀어 악에 받쳐 소리치자 뒤늦게 공포가
몰려왔다. 당장이라도 저 검을 치켜들어 제 가슴팍을 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하얘진다. 내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여자를 보며 그는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대답하라고. 에즈라가 밴 새끼가 내 새끼가 아니면
그냥 죽여 버릴 생각이거든. 근데 죽이고 보니까 내 새끼라고
하면 되게 곤란하잖아. 황손이 얼마나 귀한데.”
“몰라요.”
“몰라?”
쉽게 굽힐 수 없는 자존심에 뻗대기도 잠시, 망설임 없이
쳐드는 칼날의 궤적을 좇던 그녀는 급히 방어 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다,당신! 당신 아이라고 했어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흐느끼는 말에 히폴로테스는
허공에서 검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그제야 핏기가 돌았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희열에 그의 두 눈이 짐승의 것처럼
확장된다.
“아버지가…… 황제의 아이라고 했어요.”
미약하게 말을 이은 라티아는 결국 털썩, 자리에 주저았고
말았다.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춘 칼날을 떠올리자 온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눈앞이 빙글 돌았다. 라티아가 받아들이기 힘든
일에 혼절하기 직전, 히폴로테스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칼을 돌려 쥐었다.
“사람을 갖고 놀았으면 벌을 받아야지.”
반항할 수도, 살려 달라 말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그가 가볍게 던진 단도가 뺨을 스치고 지나가
창을 깨버린 것은.
쨍그렁, 유리가 사정없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 사이로
바람이 파고들었다.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뒤로, 뺨이
불붙은 듯 뜨거워진다. 이내 갈라진 상혼 사이로 피가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무언가 질질 흐르는 느낌에 뺨을 더듬던 라티아는 질척한
핏물을 확인하곤 그대로 까무러쳤다.
“아악!”
“라, 라티아 님! 괜찮으십니까? 라티아 님!”
-아아! 으. 으으……!”
아픈지도 모르고 피가 철철 흐르는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그녀는 억억거렸다. 홍터가, 홍이 질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추하디추한 흉터가.
“안 돼! 아악!”
“그래도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울지
말아요.”
발작하듯 고꾸라지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그는 진심으로
기꺼웠다. 에즈라를 데려올 명분을 착은 것이다. 이제는
에즈라를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와야 하는 거지. 그녀는 내
아이를 가졌으니까. 나를 잊었어도 에즈라와 나는 연결되어
있는거야.
기억을 찾는다 해도 아이가 있다면 내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할 거고, 오히려 내 곁에서 있을 수 있어서 잘되었다고
여길지도 몰라. 나는 그녀가 그리 아끼는 아이의 아버지잖아.
“시, 싫어…… 싫어!”
고개를 마구 혼들던 라티아는 결국 실신한 듯 바닥에 축
늘어졌다. 산뜻한 기분으로 그녀를 뒤로한 히폴로테스는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한 얼굴로 활짝 미소 지었다.
문 앞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만 이들은 모습을
드러낸 히폴로테스를 보곤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고개를 조아리는 것조차 할 수가 없다.
도를 넘은 공포에 떠는 이들을 둘러보던 히폴로테스는 침실
안을 턱짓했다.
“볼일이 끝났으니 들어가도 좋아.”
차마 대답하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 황제는 기쁨에 찬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복도를 걸어 나간다. 그의 뒤로 숨길 수
없는 흥분과 광기에 싸인 기대감이 느껴졌다.
하녀장은 시야가 어지러운 탓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침실 안에 늘어져 있을 라티아를 떠올린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실 문턱을 넘었다.
카코스가 소식을 전해 듣게 된 것은 생각보다 훨씬 이른
때였다. 일언반구 없이 집무실에 들이닥친 히폴로테스는
양피지 더미를 막 들어 올리던 카코스를 보며 눈짓했다.
그는 곧장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았은
히폴로테스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조아렸다.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아직 동도 트지 않았는데요.”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무덤에 기어들어 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몰골은 어디 가고
세상만사 즐거운 사람처럼 활짝 웃는 얼굴이라니.
히폴로테스를 은근슬쩍 살피던 카코스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루 만에 사람이 이토록 바뀔 수 있는 건가. 커다란 충격에
아예 돌아 버리신 것인지도 모른다. 급물살 같은 변화에 불안이
엄습했다. 일렁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카코스는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요.”
좋은 일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면서,
비아냥대는 것도 아니고. 저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물음이다. 뚫어져라 빤한 시선에 등줄기를 타고 삐질삐질
식은땀이 맺혔다.
“역시 너는 눈치가 빨라. 어떻게 알았어?”
“예? 아니, 그게, 이른 아침인데도 상쾌해 보이셔서
그랬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해야 할 일이 있거든. 당장 따를 수 있는
정예병들을 모아. 백 명은 심하고 음, 한 오십 명 정도면 좋겠네.
웬만하면 일당 둘은 할 줄 알아야겠지. 아브타크가 무슨 함정을
파 놨을지도 모르니까;
“……정예병을요?”
설마설마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굳은 표정을
갈무리할 생각도 못 하고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