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폭풍 같은 하루에 무척이나 곤했는지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에즈라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이 눕기에 딱 좋은
침상 맡에 은근슬쩍 다가간 시프나드는 미미한 불그림자가
지는 조막만 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저 새끼 말고, 이번에는 나를 황제로 만들어 보는 게 어때?’
언젠가 그녀의 귓가에 그리 속삭였던 날이 있었다. 물론 그
물음에 에즈라는 대답하지 않았었다. 아니, 대답할 틈도
없었지. 내가 아득한 아래로 너를 밀어 버렸으니까.
그때는 진심이 아니었다. 슬럼에서 나고 자란 제게 권력이니
뭐니,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중요한 건 오직
삶이었다. 넌덜머리 나는 가난에서 벗어나 온전한 한 끼를 먹는
그런 평범하디평범한 삶.
“……너기억 찾지 마. 찾기만 해봐."
시프나드는 피딱지가 엉겨 붙고 홍터투성이인 손으로
에즈라의 뺨을 살짝 문질러 보았다. 보송하고 매끄러운 뺨은
따끈했다. 퍼석했던 삶을 녹여 버릴 만큼이나.
“사람 이따구로 만들어 놓고 가겠다고 하기만 해 보수. 이제
그래도 안 놔줘.”
왜 나를 살렸나. 내 뒤에 숨고, 내 옷자락을 쥐고, 나를 위해
그 남자에게 칼을 꽂았냐고. 묻고 싶은 건 수십 가지였으나,
이상하게 퉁명스러운 말만 튀어나왔다.
“아파하지도 마.”
그는 천천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심하게 턱을 괸
채로 고요한 여자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열망 어린 눈빛에
눈을 뜰 법도 한데, 에즈라는 작게 골골거릴 뿐 깨어날 기색이
없다.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들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런 거 다 잊고, 그냥 지금처럼 살래?”
황제니 황비니, 반란이니. 그딴 거 다 집어치우고 나랑
여기서 평범한 부부로 사는 거야.
“그러자.”
툭, 이번에는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쥐어 보았다. 으음,
손길을 느낀 에즈라가 움직거리자 바짝 몸을 굳힌 채로
긴장하다가 그녀의 얼굴이 풀어지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킥킥거렸다.
네가 가겠다고 하면, 나는 너를 보내 줄 수 있을까.
“……진짜 그러면 안될까?”
솔직해지자면, 그건 고백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멋없고
볼품없고 양심도 없고 이기적이지만…… 내 생에 가장
간절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
얼마나 그렇게 시간을 죽였을까. 완전한 어둠이 지고 나서야
시프나드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고 몸을 일으켰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새까만 망토를 뒤집어쓴 두I,저벅저벅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문턱을 넘기 직전, 그는 어깨 너머로 뒤척이는 작은 인영을
살피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불필요하다.
그는 굳게 문을 닫은 후 슬럼을 벗어 났다.
작정한 사람처럼 두터운 검을 허리에 찬 남자에게 다가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슬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차에 올라타
빠르게 아브타크의 성을 향했다.
수도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은,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사치스러운 성. 제 젖은 발을 들이민 홀은 오직 내보이기
위해 처바른 금과 기이한 석상들이 즐비했다. 그 모든 것을 혐오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시프나드는 곧 자신을 인도하는 시종의
뒤를 따랐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프나드는 고개를 조아리는 시종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시종이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턱짓하자 그들은 양쪽 문을
느릿하게 밀었다. 드러나는 응접실 안에는 이미 빼곡하게
머리통들이 들어차 있다.
모두의 시선이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시프나드를 향했다.
그를 재단하고 또 가늠하는 시선에도 시프나드는 주저 없이
그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란 테이블에 비어 있는 자리는 아브타크와 마주 보는
가장 상석뿐이었다. 자리의 주인을 기다렸다는 듯 시종이
다가와 의자를 빼자 그는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았다.
“와스터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하나뿐인
핏줄이어야 하지요. 하지만 황실의 혈통은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종마가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으나 시프나드는 두 주먹을 꽉
쥐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머릿속에 단 하나의 얼굴만 그려
나갔다. 오롯한 녹색 눈동자로 저를 올려다보던, 옷깃을 꼭 쥐어
오며 해맑게 웃음 짓는 얼굴을.
“시프나드는 전전대 황제의 조카입니다. 황제에게 아비를
잃었으나 천한 어미의 존재를 알지 못한 황제께서 죽이지 못한
황실의 혈통이지요.”
“그, 그럴 리가……"
“그게 정말입니까!”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시프나드를 바라보던 귀족들은
아브타크의 말에 숙덕이기 시작했다. 이내 경악한 눈동자들이
조심스럽게 그를 샅샅이 살피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눈동자는 아니었으나 사람을 압도하는
위용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위세를 부린다는 귀족들
앞에서도 주눅 들기는커녕 되레 그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기까지 하자 주춤하며 시선을 회피한 것은 그들이었다.
시프나드에게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는 귀족들을 느긋하게
둘러보던 아브타크는 술잔을 들어 올려 입을 축였다.
“나는 황제를 갈아 치울 겁니다. 언제까지 황제의 권위에
짓눌려 조용히 숨만 쉬고 살 수는 없지요. 다들 피해 본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황제를 갈아 치운다는 말에 그곳에 모인 모두의 움직임이
멎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개만 삐그덕 돌린 귀족들이 입을
벌린 채로 아브타크를 바라보았다. 쨍그랑, 술잔을 놓친 한
귀족의 옷자락이 붉은 포도주로 젖어 든다.
“무력으로 귀족들을 악인 취급 하며 억압하려 드는 황제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겁니다. 다들 알겠지만 나는그럴 만한 힘도,
자신도, 그리고……,”
나직한 어조로 말을 잇던 아브타크는 내리깐 눈을 들어 올려
오만한 표정의 시프나드를 마주했다.
이경분도 있지요.”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압박이자 협박이었다. 이곳에 모인
상태로 반란을 입에 담았고 그곳에 몸을 담았다. 끝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틀어막은 것은 시프나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프나드가 문 앞에 서더니 칼을 빼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가 환하게 웃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목 닦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돼.”
“살아서 문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널따란 응접실 안을 휘영청 밝은 반달이 비추었다. 굳게 닫힌
문 앞을 지키는 남자에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도한 이에게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들 수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지독하게 고요한 밤이었다.
히폴로테스가 황성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땅거미가 져 갈
즈음이었다. 비 갠 후의 하늘은 오묘하고 아름답게 물들어 갔고,
곧 드리울 어둠을 준비했다. 황성 앞에 도달하자 버리듯 말에서
내린 그는 흙탕물이 튀어 엉망이 된 망토를 풀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망토를 짓밟으며 나아가는 걸음은 무척이나 사나웠으나
얼굴은 평소처럼 온화하기만 하다. 그 간극이 더욱
공포스러웠지만.
“히폴로테스님!”
차마 말도 붙이지 못하고 눈치만 보던 카코스는 저만치
멀어져 가는 등 뒤에 외쳤으나 역시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를 뭐 마려운 사람처럼
바라보며 전전긍긍하자 제논이 카코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카코스, 진정해. 히폴로테스 님께서는 언제나 분별이
확실하신 분이다.”
“언제나? 제논, 너는 너무 눈치가 없어. 지금 상황에서
히폴로테스 님께서 사리 분별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황비님께서 사라지신 이후, 완전히 망가져서 술에 취해
하루하루를 버티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봐 왔잖아. 완전히 재기
불능 상태셨다고. 황비님을 찾았으니 이제 겨우 되돌아오나
했더니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살아 계시다면서 대체
왜 황비님을……!”
“기억을 잃으셨다.”
“……뭐?”
흥분에 차 열변을 토하던 카코스가 신음같이 되물었다.
나무토막처럼 굳어 버린 그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무표정한
제논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기억을 잃으셨어. 거의 모든 기억을. 에즈라 님께서는……
히폴로테스 님도, 나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리고 황비 님 곁을
시프나드, 그자가 지키고 있었지.”
제논의 말에 모두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이 피부로 와닿았다.
“어쩌다가 기억을 잃게 된 건지는 모르고?”
“못 들었다.”
개중 가장 먼저 평정을 되찾은 테르모스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리며 머리를 헝클였다. 맨 뒤에 장승처럼 서 있던
데몰레온은 에즈라를 지켜 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날, 제대로 황비님을 지켜
냈더라면…… 히폴로테스 님께서 저리 망가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분명 히폴로테스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어디로 가시는지 나는 알 것도 같다.”
“네가? 네가 알 것 같다고?”
“우리는 따르지 않는 편이 좋겠어.”
제논의 우직한 경고에 남은 이들은 이미 사라진
히폴로테스의 흔적을 좇았다. 황궁 안으로 모습을 감춘 주군은
분명 위태로웠으나 지금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히폴로테스는 따르는 수족들을 뒤로하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발견한 이들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으나 그는 오로지 앞만 보고 나아갔다. 휙, 빠르게
지나쳐 가는 히폴로테스를 곁눈질하며 종들은 의뭉스러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히폴로테스가 단숨에 걸음한 곳은 본궁 중심에 위치한
황제와 황비의 침실이었다. 오래전, 에즈라와 첫날밤을 보냈던
곳이자 지금은 라티아 혼자 머물고 있는 방이기도 했다.
초저녁이었지만 침실 앞에는 잠자리에 들 라티아를 위해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른 시각에 찾은 적이 없는 터라 하녀들은
황제를 발견하고는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하녀장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며 떨리는 손끝을
맞잡았다.
“라티아 님께서는 지금 욕실에 계십니다. 걸음하셨다 말씀을
올릴까요.”
“그럴 필요 없다. 안에서 기다리지.”
“예.”
하녀장이 대답하자 문 앞을 지키던 호위병들은 침실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그곳은 에즈라의 방과는 달리 고급스럽고
품위가 있었다.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는 쓸데없는 귀중품들.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조각상 하나에 슬럼의 백성들 몇 명이
먹고살까. 그런 의미 없는 생각을 하던 중, 뒤에서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어떻게…… 이리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말을 올리지 않겠다 했지만 언질을 한 게 분명하다. 일부러
덜 말린 듯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금빛 머리칼과 어렴풋이
비치는 침의. 피부에 달라붙은 그것은 은근슬쩍 그녀의 굴곡진
몸을 드러 내고 있었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미소를 무어라 해석했는지는 몰라도 라티아는 뺨을 붉히며
물방울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꼭 쥐어짰다.
“급히 오셨나 봐요. 비를 맞으신 건가요?”
자신의 감정에 취해 있던 라티아는 뒤늦게서야 히폴로테스를
살필 수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비를 맞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머리칼과 옷자락은 살짝 젖어 있었고, 흙이 조금 튀어
있었으며 허리에는 검을 찬 채였다.
무엇보다 은근한 피 냄새가 감돌았다. 점점 짙어지는 혈 향은
익숙지 않은 것이라 라티아는 긴장에 침을 꼴깍 삼켰다.
무장을 한 그대로 침실을 찾은 이유가 뭔가. 라티아는 곧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가 자신이 기대한 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