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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70화 (70/113)

70화

“ 훗!"

잠시 주저하던 에즈라는 두어 걸음 앞에 있던 남자의 등줄기에

단도를 콱 박아 넣었다. 예리한 날이 사람의 살을 가르는 섬뜩한

감촉. 오히려 신음을 흘린 것은 자신이었다. 단도가 등에 꽂히는

것과 동시에 남자는 시프나드의 검을 허공으로 쳐 냈다.

차마 박힌 칼을 빼내지는 못했다. 그저 뒷걸음질 치다가

날아가는 검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털썩 주저앉으려는 자신을

남자가 와락 끌어안은 건. 그때였다.

“아……,”

“에즈라.”

어느새 뒤를 돈 남자가 품 안 가득 저를 감싸 안는다. 분명

순식간인데 어쩐지 그 모든 게 너무 느렸다. 등허리를 받쳐 주는

단단한 팔이, 얼굴에 맞닿는 가슴팍과 그에게서 흘러드는 익숙한

향기까지도.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마음이 놓이는 건 왜일까. 분명 그는

적인데. 나와 시프나드를 위협하는 나쁜 사람인데. 자신의 입으로

악당이라고 했으면서, 차라리 죽지 그랬냐며 탓할 때는

언제고…… 왜 이토록. 이런 얼굴로 우는 건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먹먹해지더니 기어코 미어지는 제

마음이었다.

“저, 정말 죄송해요. 그게 그, 시, 시프나드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래서……”

“더 세게 찌르지 그랬어.”

그가 헐떡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서 그냥 죽여 버리지 그랬어.”

“……이봐요.”

“언제 죽어도 좋으니까. 죽는다면 나 네 품에서 죽고 싶어.’’

불쑥 정신이 들어 그의 품에서 도망치려 발버둥 쳤으나 그는

더욱 놓을 수 없다는 듯 온몸을 옭아매 왔다. 죽여 달라는 말과는

달리. 너무도 간절하게 매달렸다.

살려 달라고. 지옥에 싸진 사람이 손을 뻗으며 외치는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울고 있었던 것인지 혀끝에 짭짤한 눈물 맛이

났다. 피어오르는 혈 향이 그의 것이라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내가 준 상처에 아이처럼 울어서.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것마저도.

“거기까지 하지.”

밀어 내지 못하는 손끝을 말아 쥐는데 차디찬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남자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니 어느새 남자의

목덜미에 검을 바짝 겨눈 시프나드오I,시프나드의 목에 검을 겨눈

이름 모를 기사가 보였다.

“이 칼 되게 무겁다. 손에 힘 빠지면 그대로 모가지 댕강일 것

같은데.”

번뜩이는 칼날이 무서울 법도 한데 남자는 여전히 제 몸을

끌어안은 채 미동조차 않는다. 인내심이 닳아 버린 시프나드가

검을 더욱 들이밀자 남자의 목덜미가 베이며 비릿한 피 냄새가

피어올랐다.

덕분에 두려워진 것은 저였다.

“이거 놔주세요!”

퍽. 소리가 날 만큼 그의 등을 때리고 몸부림쳤으나 여전히

그의 품을 벗어나기란 힘들었다. 수렁 속에, 가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 치면 칠수록 딱딱한 팔이 등허리를 세게 감싸 안을

뿐. 돌처럼 단단한 몸에 빈틈없이 안기자 헛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놔 달라고요! 이거 놔. 놓으라고!”

“정말 왜 이러세요! 저는 그쪽 몰라요. 모른다고!”

결국 지쳐 버려 반항을 포기하고 나서야 남자는 천천히 몸에서

저를 떼어 냈다. 온기가 떠나가자 서늘한 바람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도망치듯 물러서자 그는 헛웃음을

터뜨린 후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문질렀다.

“진짜 베어 버리고 싶다.”

“안돼요. 시프나드!”

시프나드가 이를 악문채로 뇌까리자 제논은 살기를 펄펄

풍기며 시프나드에게 겨눈 칼을 더욱 고쳐 잡았다. 방울방울

맺히는 피에 놀라 에즈라는 급히 시프나드에게 다가갔다.

시프나드는 여전히 히폴로테스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시프나드, 뭐 하는 거예요! 할리, 빨리 검을 거둬요. 네?”

"에즈라 님.”

제논은 절박한 어조로 에즈라를 불렀으나 그녀는

시프나드에게 정신이 팔려 발만 동동 굴렀다. 검을 든 탓에 피가

멈추지 않는 시프나드의 팔에 손을 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도

잠시. 그녀는 제논에게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이 사람이 뭘 몰라서 그래요. 부디 검을 거두어 주세요.”

히폴로테스가 제논에게 매달리는 에즈라를 멀거니 바라만

보자 제논은 드물게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히폴로테스 님, 지금이라도 죽여야 합니다.”

“야, 네가 나를 죽이겠다고? 죽일수 있을것 같아? 이게 사람을

뭘로 보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시프나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귀를 파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제논은 시프나드의 목에 칼을 더욱 바짝 들이 밀었다. 그는 오로지

히폴로테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뗐다.

“히폴로테스님.”

“그놈의 히폴로테스, 히폴로테스. 진짜 지겨워 죽겠네.”

도를 넘은 조롱에 참고 참아 왔던 분노가 터진 모양이었다.

뺨을 실룩이던 제논이 칼을 치켜든 그때, 에즈라는 겁 없이

제논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그녀가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시프나드는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발 저희를 그냥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물러나주십시오.”

“물러나야 할 사람은 그쪽이에요. 가, 갑자기 나타나서 칼을

겨누고 사람을 다치게 하고!”

처음 보는 에즈라의 윽박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제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도 칼을 겨눌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에즈라는

시프나드가 쥐고 있는 칼을 빼앗아 들더니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칼날이 위태롭게 혼들리자

히폴로테스는 텅 빈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보내 주세요.”

예상은 했다만.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여자를 보며 시프나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자신을

위하는 여자가 기껍다가도 가슴 가득 일렁이는 이름 모를 감정이

불쾌했다. 위험을 감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내게 틈을 만드는 여자는 위험하다. 그리고 딱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하기도 했다. 시프나드가 흡족한 웃음을 머금는 동안

히폴로테스는 한결같이 에즈라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제논. 검을 거둬.”

“ 진심이십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싸늘한 일갈에 제논은 겨누었던 칼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에즈라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보내 주시는 거죠? 그러면 우리 돈. 안 갚아도 되는 거예요?”

우리. 시프나드와 자신을 한데 묶는 말에 히폴로테스는 드물게

고개를 툭 떨구었다.

“나 너한테 돈 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뭘 가지러 오신 거예요? 대체 뭐길래 사람을 갑자기

공격하고……”

“몰라. 그런데 이제 필요 없어졌어.”

에즈라는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보내 주겠다는데 이제 용건이 뭐든 상관없다. 그보다

반응을 보아하니 더 이상 쫓을 기색도 아니었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는 없는 법.

그녀는 히폴로테스를 곁눈질하며 시프나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멋대로 풀어 둔 사냥개처럼 제멋대로 굴 때는

언제고, 다행히도 그는 얌전하게 제 손에 이끌려 주었다. 여전히

칼을 제 목에 겨눈 채로 점차 그들과 거리를 벌리던 에즈라는

한순간. 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뛰어요!”

이번에는 에즈라가 시프나드의 손을 세게 잡아끌었다. 빗물

고인 웅덩이가 발을 온통 적시고 앞서 달리는 여자의 검은

머리칼이 등에서 둥글게 굽이치며 흔들린다. 문득 가녀린 몸으로

절박하게 달려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차올랐다.

잠시 멍하니 질질 끌려가던 시프나드의 두 눈에 이채가 돌았다.

가볍게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는 매끈했다. 그가 단숨에 앞으로

치고 나가자 에즈라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녹빛 눈동자를 마주한 그때, 그는 진심으로 결심했다.

너를 가질 수 있는 황제가 되겠노라고.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게 뭐든 하겠다고.

그렇게 두 사람이 도망치고 난 자리에 남은 히폴로테스는

그제야 등에 꽂힌 단도의 아픔이 밀려들어 목덜미를 문질렀다.

시프나드가 겨눴던 칼에 베였던 것인지 그곳에서도 피가 묻어

나온다.

“어째서 그냥 보내신 겁니까.”

“죽겠다는데 어떡해.”

히폴로테스는 아무렇지 않게 단도를 빼낸 후. 바닥에 그것을

내동댕이쳤다. 불에 덴 듯한 통증에도 그는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까마득히 잊어버릴 만큼 내가 밉다는데 월 어떡하냐고.”

기억이야 다시 찾으면 될 일 아닌가. 익숙한 생활로 돌아간다면

기억 따위 금세 되찾을지도 모른다. 제논이 할 말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히폴로테스는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나를 기억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사실은 기억을 되찾은 후의 반응이 두려웠다. 혹여라도 나를

기억해 낸 후 괴로움에 몸부림친다면 그 모든 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지나온 모든 일을 후회하며 나를 원망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다 포기하고 다시 죽고 싶어질 것 같아서.

분명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이렇게 미운 걸까.

“ 돌아가자.”

기어코 너를 사랑하게 만든 네가.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

분노는 포기를 잊게 한다. 에즈라와 시프나드가 달아난 골목을

응시하던 히폴로테스는 턱을 슬쩍 치켜들었다. 말아 쥔 주먹이

떨려 왔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돌아선 남자의 망토 자락이

힘없이 흔들렸다.

슬럼을 빠져나가자 막 도착한 것인지 카코스와 그가 데려온

황실 정예병들과 맞닥뜨렸으나 히폴로테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지나쳐 갈 뿐이었다.

주군의 참담한 심정을 파악한 카코스가 눈짓하자 그들 모두는

숨죽인 채 발길을 황성으로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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