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뭘 또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조금 늦는다고 안 죽어. 봐 봐.
누가 봐도 무럭무럭 아주 잘 크고 있다고.”
“은근슬쩍 만지지 마세요!”
에즈라는 거리낌 없이 제 배로 손을 뻗는 시프나드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찰싹, 소리가 날 만큼 손등을 때려 주자 그는
과장하며 아픈 척을 해 댄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의원에 가는 날인 데다가 비 갠 후의 청명한
하늘에 기분이 퍽 좋았는데. 이렇게 또 시비를 거는 것이다.
“에이, 겨우 배 쓰다듬는 것 가지고 그렇게 굴 거야? 가슴
만지게 해 주면 안 그럴게. 어때?”
능글거리는 남자를 올려다보던 에즈라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시프나드는 그런 얼굴을 할 건 또 뭐냐고
투덜거렸으나 에즈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즈라! 같이 가! 길도 잘 모르면서.”
“누가 길을 몰라요. 저도 이제 다 외웠거든요.”
“그러신 분께서 그쪽으로 가냐. 이리 와. 이쪽이거든?”
“……알고 있었어요.”
대책 없이 귀엽기는.
아차 싶었는지 아랫입술을 지그시 내리 무는 게 기꺼웠다.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려 보이던 시프나드는 아까부터 신경을 살살
긁어 오는 기척을 느끼곤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저렇게 대놓고 쫓아오는데. 더 이상 모른 척하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에즈라, 잠시만.”
“또 왜요?”
옆에서 자박자박 걷고 있던 여자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자
에즈라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쉿. 누가 우리 뒤를 밟고 있어.”
“네? 누, 누가요? 왜요? 시프나드 또 이상한 짓 했어요?”
“에즈라.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심각한 상황임에도 다그치는 여자의 순수한 눈망울에 그는
시선을 빼앗겼다. 고개를 짧게 털어 낸 시프나드는 맞잡은 손에
꼭 힘을 주고는 그녀를 데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시프나드! 나 뛰면……!”
손을 빼내려 팔을 휘둘러 보았으나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올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그를 따라 달음박질치게 된 에즈라는 이내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등골을 뻣뻣하게 굳혔다.
정말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누군가가 저와 시프나드를 뒤쫓고
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에즈라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것은 시프나드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을 단단히 빛내며
시프나드의 뒤를 따라 제 발로 뛰었다.
“ 여기로.”
“어어!”
휙. 코너를 돌아 시프나드는 구불구불한 골목으로 꺾고 또 꺾어
들어간다. 오가는 사람들과 부딪칠 뻔할 때마다 시프나드는
가느다란 팔을 잡아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녀를
보호했다.
.
아슬아슬하게 사람들을 피하며 에즈라는 뛰고 또 뛰었다. 숨이
턱 막혀 오고 심장이 아플 만큼 죄어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자꾸만 힘이 빠지더니 기어코 눈앞이 흐려진다.
“시프나드, 나, 나더이상……:’
한계를 넘은 신체와 험한 뜀박질에 걱정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혹시라도 배 속 아기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겠지. 울먹이며 한쪽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던 그때였다.
“ 그만.”
시프나드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두 인영에 에즈라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시프나드가 뜀박질을 멈추자 에즈라 역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 시프나드의 널따란 등이
가쁘게 오르내린다.
헉헉대며 숨을 고르는 저와 달리 눈앞을 가로막고 선 두 사람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시프나드만큼, 아니 그보다 더 훤칠한
키와 몸집. 허리춤에 찬 무지막지한 검.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러쓴 질 좋은 검은 망토까지.
슬럼가에서는 본 적 없는 이질적인 차림새 덕분에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시프나드와 저를 쫓은 이들이라는 것을.
“술래잡기는 여기서 그만하지.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보기보다 집착이 심하시네. 제국을 다 가지신 분께서 한낱
필부의 아내를 다 탐하시고.”
시프나드의 나지막한 말에 에즈라는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콕 집어 말하는 게 자신인가. 제국을 다
가지신 분이라면 저 사람은 대체……,
혼란에 젖은 녹빛 눈동자를 멀거니 응시하던 히폴로테스는
깊이 뒤집어썼던 망토를 느릿하게 벗었다. 스르륵. 망토가
물결처럼 흘러내리자 한낮의 볕에 더욱 찬란한 은발이 드러났다.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에즈라는 가슴께를 틀어쥔 그 상태
그대로 굳었다.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태양같이 발광하는
눈동자에 놀란 것은 둘째 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내비 치는 눈빛에 압도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건가. 내게 저 사람은 처음
본 낯선 이일 뿐인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얼굴을
구겼다. 문득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더니 울컥하며 솟구치는
감정에 숨통이 뫅 막혀 들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인
에즈라의 손을 시프나드는 힘주어 맞잡았다.
“에즈라, 남편 속상하게 외간 남자를 그런 눈으로 보면
어떡해.”
“ 남편?”
“응. 나 얘 남편.”
그제야 남자의 눈이 저를 떠나 시프나드를 향했다. 저를 바라볼
때와는 달리 지옥 불처럼 지글거리는 눈빛은 시프나드를 태워
먹을 듯 무시무시하다.
"에즈라, 이리 와.”
짧지만 길었던 침묵 속에서 남자가 제 이름을 불렀다. 차마
손을 뻗지 못한 것인지 그의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이름을 알고
있다는 충격보다도 더없이 애절한 목소리에 절로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나를 알아요?"
“그쪽. 누구예요?”
당연한 물음이었건만. 뭔가 잘못된 것일까. 틀린 대답을
내놓은 것처럼 꽂혀 드는 시선에 주눅이 들었다.
그 순간. 바람이 돌고 지나갔다. 막다른 골목에 바람이 불 리가
없는데 그리 느꼈다. 여전히 마주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바람
한 점에 바스라지는 것 같아서 왈칵 두려워졌다.
피어오르는 기이한 죄책감에 또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가 당신의 무언가를 짓밟고 무너뜨린 것만 같아. 나는, 정말
당신을 처음 보는데.
“히 폴로테스.”
그는 한참 만에 자신의 이름을 전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밤새
내린 빗물이 어린 듯 축축하다.
“여기까지.”
역시 한 조각의 기억조차 없는 생경한 이름. 몰아치는 혼란에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배회하자 시프나드가 앞을 가로막아
주었다. 그의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시프나드는 놓을 수
없다는 양 맞잡은 손을 더욱 꽉 감쌌다.
“남의 부인한테 그렇게 애절하게 굴면 안 되지. 남편이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응?”
명백한 비아냥에 말없이 히폴로테스의 곁을 지키던 남자가
유려하게 칼을 뽑아 들었다. 그가 번뜩이는 칼날로 시프나드를
겨누자 시프나드는 사냥개처럼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주인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 똥강아지 주제에 기세 좋네.
뺏고 싶으면 어디 한번 죽여 보던가.”
“시프나드!”
대체 월 믿고 이렇게 대책 없이 구는 건가. 에즈라가 기함하며
시프나드의 팔을 뒤로 잡아끌자 일순 남자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활활 타오르는 눈에 더욱 기가 죽었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시프나드는 저들처럼 마땅한 무기도 없을뿐더러 이 대 일이
아닌가. 딱 봐도 그들은 범상찮은 사람들이었다. 시프나드와 그들
사이로 파고든 에즈라는 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시프나드가 뭔가 잘못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행동에 두 남자와 시프나드의 표정이
극명히 엇갈린다.
“정말 죄송합니다. 돈 문제라면 시간을 주세요. 당장은
아니겠지 만 차차 갚을게요. 꼭 갚겠습니 다. 맹세해요.’’
“……에즈라.”
“아이가, 아이가 있어요. 그러니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적막이 내려앉길 잠시, 먼저 반응한 것은 시프나드였다.
“바닥이차, 일어나.”
그는 지금껏 없었던 억센 손아귀로 팔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놀라 비틀거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시프나드는
차마 칼에 손을 뻗지 못한 히폴로테스를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 맹세해?”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맹세가 가슴을 쥐어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애처럼 울음이 터질 뻔!했다.
히폴로테스는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킥킥거렸다.
“그렇게 쉽게?’’
“저……히폴로테스님?”
잔인하기도 하다. 무구한 눈으로 자비를 구하며 내 이름을
부르다니. 다른 남자의 품에서 안도하며, 나를 생전 처음 마주한
불한당 보듯 하는 네가.
“차라리 죽지 그랬어.”
“그럼 나도 곧 따라갔을 거 아니야.”
다른 건 몰라도 그곳에서는 네가 나를 기억했을 거 아니야.
그럼 나는 네 발밑에서 잘못을 구하고, 너는 어쩌면 나를
용서했을지도 모르잖아. 이렇게 잃어버리면. 나를 잊어버리면.
네게 빌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미안한데. 내가 되게 나쁜 악당이어서 어쩔 수가 없어.”
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
“네 남편이 다 뺏어 가서…… 내게 남은 게 없거든.”
“무슨 그런……,”
히폴로테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거침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당황한 에즈라는 급히 시프나드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끝이 올라간 날카로운 눈꼬리로 눈앞의 남자를 찢어발길 듯
노려볼뿐이었다.
“물러나 있어.”
차라리 죽지 그랬냐는 말이 머리를 떠돌았다.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무언가를 할퀴고 찢은 듯 쓰라리고 서러웠다. 처음 보는
사람이 하는 말인데도 그랬다.
뒤로 떠미는 시프나드의 손길에 힘없이 나부끼며 밀려나던
그때, 손을 뻗었지만 남자에게 달려드는 시프나드를 막을 수
없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멀거니 칼을 맞붙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쇠붙이들이 진동하는 소음과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바람 소리.
날을 가까이 맞붙인 채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곧 서로에게서
물러났다. 빈틈을 탐색하던 시프나드가 반 바퀴 돌아 옆구리를
파고들었지만 남자는 노련하게 날을 피하더니 자세를 낮춰
시프나드의 정강이로 칼을 휘둘렀다.
“읏!”
재빠르게 물러났으나 남자의 검은 피할 수 없이 빨랐다. 스친
칼날에 눈썹을 찡그린 시프나드는 검을 수직으로 내리찍었으나
남자는 검을 들어 올려 단번에 시프나드의 공격을 막아 냈다.
남자의 무도한 검과 달리 시프나드의 검은 턱없이 초라했다.
첨예하게 맞붙는 두 칼날이 떨어졌다가 허공을 그었다가 결국
또다시 시프나드는 한쪽 팔뚝을 내주고 말았다. 아까와는 달리
깊게 베였는지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논은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두 사람에게 다가서는 에즈라를
알아차렸으나 끼어들지 말라는 히폴로테스의 눈빛에 검을 꽉
말아 쥐기만 했다.
기회는 남자가 제게 등을 보였을 때, 그 한 번뿐이다. 에즈라는
긴장감에 목을대를 꿀렁이다가 언젠가 시프나드가 내어주었던
단도를 만지작거 렸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끝내 그것을 빼 들고 기회만 엿보던 순간,
시프나드의 검을 피하려 남자가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에즈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