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더럽다며 슬럼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던 새끼가
여기까지 왜 온 걸까. 최근 성을 착지 않은 것 때문일까.
에즈라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쯤은 이미 보고받아 알고 있을
테고…… 임신 사실까지 알아챈 건 아니겠지. 아니, 몰라야
했다. 절대 비밀에 붙여야 해.
그러려면 자연스럽게 굴어야 하는데…… 머저리같이 그게 잘
안됐다.
‘시프나드, 하나하나 따지다가는 이 험한 세상 못 살아
나간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입은 다물고 귀를 열어 두는 것뿐이지. 시키는 일만 하고 손을
떼는 거야. 잘 알아둬,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건 인간에게 가장
큰 위험이라는 걸.’
슬럼가에서 나고 자란 남자아이. 잠시였으나 아버지라
불렀던 이가 더벅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으며 했던 말이
머 릿속을 파고들었다.
‘봐라, 세상은 너무 명확해. 그리고 변하지 않지. 인간이 하는
일. 그리고…… 짐승 같은 우리가 해야 할 일. 명확하고
분명하다.’
“배 속의 아이는 잘 크고 있나 해서 온 건데. 돈독한 사이에
궁금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리 날 세우지 말게.”
“아…… 씨발.”
검은 머리칼이 눈가를 가린다. 시프나드는 아주 작게 속된
말을 중얼거렸다. 타인의 삶에 너무 깊이 끼어들고 말았다.
이제는 발을 빼지 못할 정도로 아주 깊게.
“다음에 올 때는 꼭 부인과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하고 싶네.
나는 이만 가지, 여기는 공기가 너무 탁해서.”
젊다고 하기에는 낡았고, 노인의 것이라기엔 끈적한 야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거북함이 밀려 들어왔으나 시프나드와
아는 분이니 정중하게 예의를 지켜야 했다.
“정말 죄송하……읍!”
“누군 줄 알고 죄송해. 아무거에나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실패로 끝났다. 뒤통수를 콱 움켜쥔 그가 가슴팍에 얼굴을
문대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으니까. 쿡쿡,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곧 뒤를 돌아 멀어져 가는 듯 발소리가
작아졌다.
그들이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시프나드는 아차, 하며
에즈라를 똑 떼어 냈다. 안겨 있던 탓에 얼굴이 벌게진 에즈라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머쓱함에
시프나드가 어깨를 토닥이자 에즈라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 낸 후 마구 거리를 가로질렀다.
은근히 성질이 있단 말이지. 어깨를 으쓱인 시프나드는
실소했다. 못된 장난을 치기에는 잘못한 것이 있으니
시프나드는 그녀의 뒤를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개미굴 같은 골목을 빙글빙글 돌며 노는 동안, 낡은
목조 건물 위에 앉아 있던 검은 새는 이리저리 바쁘게 고개를
돌려 댔다. 마치 그들을 따라다니듯 콩콩거리며 몇 번이나
자리를 옮기던 검은 새는 노을이 지는 하늘 위로 퍼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저물어 가는 주홍빛 해를 반으로 가로지르며 새는 훠이훠이
날았다. 자신을 기다리는 주인에게 희망적인 소식을 안고서.
“결국비가 내리는군.”
아브타크는 젖어 가는 로브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주홍빛 황혼이 지고,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에
조잡한 축제를 즐기던 슬럼 안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젖어 드는
바닥에서 흙탕물이 마구 튀었으나 장사꾼들은 오로지 팔던
물건을 급히 싸매고 걸음을 재촉할 뿐, 그 누구도 더러워지는
옷자락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래서 천한 것들은…… 쯧.”
스쳐 지나가는 이들을 대놓고 멸시하던 그는 휘황찬란한
금빛 전차에 올랐다. 기름 먹인 망토를 뒤집어쓰며 빗물 어린
이마를 훔쳐 내는데 옆에서 말을 타던 살수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방금 전, 말씀하신 대로 테르모스의 전령이 날아올랐습니다.
슬럼의 이야기를 전할 듯합니다.”
“그래. 그럴 줄 알고 있었지.”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자신이 하는 일에 토를 단 적도, 의문을 가진 적도 없던 이가
조심스레 물어 오자 아브타크는 짧게 실소했다. 우매한
아랫것에게 하나하나 설명하기 귀찮았으나 자신의 뜻대로 술술
풀려 가는 일련의 상황이 기꺼웠던 터라 그는 친히 설명해
주었다.
“죽여도 의심을 살 거다. 이미 히폴로테스와 테르모스는
시프나드를 의심하고 있었어. 그 여자가 슬럼에 있다는 걸
들키는 건 어쩌면 시간문제였다.”
살수는 말을 몰 뿐, 무어라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브타크는 자랑스레
떠벌렸다.
“황제는 미친 듯이 그 여자를 찾았어. 그 여자는 황제의
유일한 약점이다. 약점을 쥐고 있는 한…… 황제는 내 손바닥
안이지. 그러니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와 곁을 지키는 시프나드. 더해서 그 여자가 수태한
아비 모를 아이까지. 고결하신 황제께서 어떻게 무너질지
궁금해 미치겠거든.”
상대는 물어 온 것이 무색하리만치 묵묵부답이었다.
아브타크의 말이 끊기자 전차를 때리는 빗소리가 침묵을
메웠다.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빗물 냄새에 숨이 텁텁해진다.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나?”
“무척 흥미롭습니다.”
어지간히도 말주변 없는 놈이다. 지루한 눈을 한 아브타크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브타크가 자신의 성 안으로 자취를 감추던 그 시각,
히폴로테스의 집무실은 사방에서 타오르는 램프 덕에 환했다.
급히 히폴로테스를 찾은 테르모스와 기별을 듣고 달려온
카코스와 데몰레온, 제논까지. 모두가 모인 가운데 집무실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에즈라가 살아 있다고?”
“예.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시프나드를 조사하라 명하신
이후부터 전령을 보내 슬럼가를 오랜 시간 뒤졌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넓어서 발견하기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슬럼에
축제가 열려 황비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 같습니다.”
“에즈라가…… 살았다고.”
살아 있다고.
그가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테르모스는 한껏 풀어진
히폴로테스를 곁눈질하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히폴로테스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이후, 그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늘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는 술에
취해 흐리멍덩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마냥 느른했다.
한 번도 밀린 적 없는 집무 역시 테이블에 수북이 쌓인
채였다. 빛을 잃은 은발과 몽롱한 붉은 눈동자. 어디로 보나
자신을 놓아 버린 듯한 모습에 테르모스는 그가 찢어져라
움켜쥐고 있는 뉙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뭐에 흘린 사람마냥 히폴로테스는 집무실 한편에 놓여 있는
간이 침상에서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곧장 검을 집어
들자 테르모스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입을 뗐다.
“그런데 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나중에 직접 확인하겠어.”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힘겹게 꺼낸 말이건만.
히폴로테스는 테르모스를 무심히 스쳐 지나간 후 급히
문고리를 잡았다. 답지 않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수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카코스는 결국 뛰어가 그를 가로막았다.
“히폴로테스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호위도 없이 이리
홀로 성을 나서시면 안 됩니다.”
“안된다?”
힘겹게 그와 눈을 마주친 카코스는 그대로 굳었다.
“네가 지금 내게 안 된다고 한 거야?”
분별을 잃은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가 피처럼 붉다. 거친 손등에 불거진 힘줄과 간헐적으로
떨리는 주먹. 카코스는 본능적으로 그가 치솟는 살의를
겨우겨우 억누르고 있음을 눈치챘다.
“내가 지금 에즈라가 아닌 사람은 그냥 다 베어 버리고
싶거든. 그러니까 잔말 말고 비켜.”
짐 치우듯 카코스의 몸을 가뿐히 밀어 낸 히폴로테스는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온 모두는
험한 발걸음에 펄럭이는 그의 망토 자락을 넋 나간 채
바라보다가 곧 그의 뒤를 따랐다.
허겁지겁 성을 나서자마자 히폴로테스는 주저 없이 말 위에
올랐다. 이른 저녁부터 내린 비로 사방이 축축했으나 그에게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옅어진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그는
사납게 말을 몰았다.
질척한 땅을 딛는 말발굽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여기저기 고여 있는 흙탕물 속을 아무렇지 않게 파고드는
남자의 표정은 섬뜩하리만치 무표정했고 눈가에는 시린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 혼란을,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하나. 그는 쥐고 있던
말고삐를 더욱 세게 말아 쥐었다. 살아 있다는 말 한마디에
온몸에 진이 다 빠지기도 잠시, 단 한 가지만이 분명했다.
에즈라가 보고 싶었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건 둘째 치고
그냥 보고싶었다.
아아, 만져 보고도 싶었다. 살아 있다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거잖아. 죽을까 말까. 매일 고민하던 눈앞에 가느다란
구명줄이 내려온 것만 같은 기분.
그것이 혹 환영이라 손을 뻗어 매달린 순간, 죽음의 늪에
빠지게 된다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어. 거짓이라는 걸 알아도
수십, 수백 번 나는 그것에 매달릴 거다.
“……히폴로테스님!”
상념을 끊어 내는 부름에 뒤를 돌아보자 말을 타고 쫓아오는
이들이 보였다. 긴장과 불안으로 범벅된 얼굴들을 보자 문득
자신도 저러할까 궁금해졌다. 아니, 아마 더욱 처절하고 흉할
것이다.
“이랴!”
그는 더욱 빠르게 말을 몰았다. 다시금 굵어진 빗물이 흘렸던
눈물만큼 온몸을 적셔 갔다.
너는 내가 죽지 못해 사는 동안 내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한
걸까. 사랑한다면서, 그렇게 사랑을 속삭이고 또 구걸했으면서
어째서 나를 찾지 않았던 건가. 내가 너를 그토록 찾아 헤맨 걸
알면서.
이젠 내가…… 미워진 걸까. 설사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살아 있는 너를 예전처럼 내 곁에 둘 수만 있다면. 평생 나를
증오해도 좋아.
다섯 필의 말은 눈 깜짝할 새 황성을 지나 수도 깊은 곳을
향했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고 돌아 슬럼으로 향하는 지하
굴이 나타나자 그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숨을 골랐다.
미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붉은 해가 넘실거리며 사위를
밝혔지만 하늘을 덮은 회색 구름 아래서는 여전히 부슬비가
내렸다.
“들어가자.”
히폴로테스가 먼저 걸음을 떼자 네 사람은 그를 뒤따랐다.
생전 처음 슬럼을 마주한 그들은 내린 비로 더해진 악취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테르모스, 에즈라를 보았던 곳이 어디지?”
“그것이…… 축제 기간이라 골목마다 가판이 즐비한 데다가
건물들이 워낙 마구잡이로 늘어진 터라 정확히 어디라고는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젠장. 어디론가 가 버린 건 아니겠지.”
“아직 시간이 이릅니다. 황궁 병사들을 불러 모을까요?”
카코스의 말대로 이른 시간이라 길목에는 나다니는 사람들이
적었다.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된 이들이 구석에 엉켜 코를 고는
것 빼면 정상적인 이들을 찾기 힘들었다.
“카코스, 너는 황궁으로 돌아가서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와라.”
“예.”
“테르모스와 데몰레온은 큰 길목을 지키고 제논, 너는 나를
따라 골목을 수색한다. 이상, 흩어져.”
“예!”
두 사람이 힘차게 대답한 후 멀어지자 제논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히폴로테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남루하고
너저분한 골목을 누비던 히폴로테스는 멀끔한 수도 아래에 또
다른 나라처럼 펼쳐진 슬럼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혹독하고 거친 삶의 기운이 낡아 빠진 골목 곳곳에서
느껴졌다. 황제나 되어서는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게 뭔가.
수도와 가까이 자리한 슬럼의 상황이 이러한데, 제국 전체를
통튼다면 하루 벌어 먹고살기 바쁜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들의 하루에 비하면 황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얼마나
한심하고 또 우스꽝스러운가.
착잡한 심정으로 얼마나 한참을 돌고 돌았을까, 해가 중천에
뜨자 허름한 목조 건물에서 하나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 드물게 멀끔한 차림새의 두 사람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훑어보다가 허리에 찬 검을 보고는 이내 허둥지둥 도망치기를
수차례.
히폴로테스 님."
“ 알아.”
막 골목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큰길가를 걸어가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멈추어 섰다. 차분히 멀어져 가는
두 남녀는 대놓고 투닥거리다가도 얼핏 다정하게 보일 만큼
온기 어린 시선을 마주하며 웃음을 흘린다. 무엇보다 남자는
여자의 좁은 보폭을 맞춰 주고 또 훤히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아주 살짝 부른 것 같은 손바닥만 한 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