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색 키톤 위로 페플로스를 두르던 에즈라는
그의 뻔뻔한 태도에 콧잔등을 찌푸렸다.
“에즈라, 치근덕의 정확한 뜻이 뭔 줄 알아?”
“뭔데요?’’
“나 참,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 왔는지는 몰라도 하나뿐인
남편한테 할 말은 아니지. 너는 내가 성가셔? 내가 만질 때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오면 혐오스러워? 밥
먹는 것도 꼴 보기 싫고 짜증 나?”
“또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서, 성가신 것 같기는 해요.”
“뭐?”
눈치를 보며 꾸물거리더니 꼴에 할 말은 꿋꿋이 내뱉는다.
같잖은 게 이따금씩 귀엽게 굴 때마다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픽,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자 여자는 또 뭐가 좋다고
샐쭉 따라 웃었다.
“빨리 나가요. 오늘은 축제 날이잖아요.”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는데 네가 붙잡은 거잖아. 덧붙이자면
에즈라, 남편이 부인한테 치근덕거리는 건 당연한 거야.”
“그래요?”
“그럼. 이렇게 깜찍하고 사랑스러워서 꼭꼭 씹어 삼켜 버리고
싶은 부인인데.”
문을 열고 나서며 시프나드는 섬뜩한 말을 내뱉었다. 꼭꼭
씹어 삼키다니, 죽여 버리겠다는 말과 다를 게 원가. 에즈라는
자신의 머리통을 껴안은 채 마구 부비적거리는 남자를 밀어
내지 못했다.
“으윽, 놔 주세요.”
“재밌다.”
다섯 살배기 아이처럼 키들거리던 남자는 잔뜩 머리칼을
흩트려 놓더니 두터운 팔로 목을 감싸 안았다. 졸지에 그의 품에
폭 안긴 상태였으나 익숙한 일이었기에 거리낌 없이 골목을
활보했다.
“수도 중심에서 닭장처럼 모여 사는 놈들은 어둑한 슬럼가에
축제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걸.”
“그런가요? 저는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시프나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지만
에즈라는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을 따라 늘어선
갖가지 가판들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디선가 풍기는 달콤한 향기에 고개를 돌려 보니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장사꾼이 현란한 손동작으로 아이들을
꼬여내고 있었다. 투명한 액체를 둥글게 말아 굳힌 뒤 흰 가루를
쏙 묻힌다.
사탕이 만들어지기 무섭게 가판 앞에는 어린것들이 줄 지어
서서 입맛을 다셨다. 맞은편에는 거나하게 취한 이들이 술병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소리를 질러 댔다.
좁은 가판 위에 놓인 세 개의 나무토막과 손톱만 한 빨간 공.
장사꾼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공을 이리로 저리로 옮겨 댔다.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신중하게 공을 좇던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말없이
사람들을 놀려 대던 장사꾼이 짝, 박수를 치자 그들은 공이
어디에 들었는지 돈을 걸고 내기를 한다.
그들의 긴장이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통에 에즈라도
발꿈치를 들어 결과를 확인했다.
“중간이다!”
“와아!”
누군가는 판돈을 잃고 다른 이는 기쁨에 폴짝폴짝 뛰어 댄다.
엇갈리는 희비 속, 조용히 가운데를 짚었던 에즈라는 폴짝폴짝
뛰어 대는 쪽이었다. 상기된 얼굴로 시프나드의 옷깃을 꼭 잡자
그는 알 만하다는 듯 에즈라의 뺨을 잡아 다른 쪽으로 비틀었다.
“저런 거 보면 못 써. 다른 거 봐.”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 다루듯이 하는 남자를 잠시 쏘아보던
에즈라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직접
담근 술을 파는 가게. 지글지글 기름 냄새를 풍기는 이름 모를
음식과 수도에서 공수해 왔다는 부들부들한 옷감들, 직접 만든
것인지 투박한 무기점까지 있었다.
크고 작은 길거리 가판들은 남루했지만 각각 모두 특색이
있었고, 손때가 묻어 어쩐지 친근했다. 다양한 물건을 내놓은
장사치들은 손짓하며 손님의 눈길을 한 번이라도 더 끌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면서도 바쁘게 고개를 돌려 대던
에즈라는 조그만 우리 안에서 삐약거리는 노란 병아리들을
보고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귀엽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에즈라는 병아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어느새 발길을 멈추고 복작거리는 어린 새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시프나드는 에즈라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아
날개를 포닥거리는 조막만 한 것들을 노려보았다. 여기 보고
저기 봐도 뭐가 귀엽다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그는 끄응,
신음을 흘렸다.
“한 마리 드릴까?”
“아, 아니요. 그냥 조금 구경만 할게요.”
“에이, 이왕 걸음 멈춘 거 한 마리 사지 그래.”
콧볼이 뭉툭하고 입꼬리에 점이 있는 장사꾼은 기름 낀
얼굴을 가까이 대며 히죽거렸다. 에즈라는 그에게서 슬쩍 몸을
물리며 두 손을 내저었다.
“키울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에이, 누가 처자보고 키우랬나. 하루 보고 그냥 밟아 죽이면
되는걸.”
장사치의 말에 병아리를 쓰다듬던 손이 절로 멎었다. 곧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의심이 갔다. 이 약하고 어린
것을 구경거리 삼다가 죽인다니.
찰나의 기쁨을 위해 이용하고는, 책임지지 않으려
내버린다니. 누군가 머리를 내리치는 듯한 충격에 에즈라는
입술만 달싹일 뿐, 무어라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자 눈치 없는 장사치는 에즈라가 고민하는 줄로만
알았는지. 그나마 건강해 보이는 병아리를 두툼한 손에 꽉
쥐고는 눈앞에 들이밀었다.
“자, 한번 받아 보슈. 아니지, 부부니까 아무래도 한 마리
더……"
“ 야.”
선득한 부름에 신중하게 병아리를 고르던 장사치는 어색하게
고개를 들어 시프나드를 마주했다. 눈썹을 들어 올리며 뭐 문제
있냐는 듯 의아해하자 시프나드는 쭈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았다.
광기 어린 검은 눈동자와 잔뜩 치켜 올라간 눈매. 찔끔한
장사꾼은 본능적으로 손에 쥐었던 병아리를 풀어 주었다.
그럼에도 시프나드의 커다란 그림자는 그의 머리 위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는데,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띤 시프나드는 자신이 다 버림받은 얼굴을 한 에즈라를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너무하잖아. 삐약거리는 게 얼마나 하잖고 귀여운데. 계속
보다 보면 홀딱 빠져서 죽이려 해도 죽일 수가 없어.”
“그…… 지금 무슨;
“완전 예뻐서 버릴수도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시프나드는 에즈라의 허리를 확 감싸 안더니
몸에 바짝 끌어안았다.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뜬 에즈라가
그를 올려다보든 말든 떨리는 어깨를 억세게 감쌌다.
“그렇지?”
차마 그렇다 대답할 새도 없었다. 시프나드가 가벼운
발놀림으로 병아리를 가두어 놓았던 나무 우리를 찬 것은
너무도 순식간이었기에. 뻑,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날아간우리는
흙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이내 망가져 버렸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뭐긴 뭐야. 쓰레기 처리했지.”
“아…… 그렇지. 그거 아주 잘됐구만. 아주 좋아. 안 그래도
바, 바꾸려고 했던 터라. 하하하……"’
한순간 기함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장사꾼은 시프나드와 눈을
맞추고는 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삐그덕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인중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 냈다.
시프나드는 장사꾼에게 경멸을 내비치며 에즈라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젠장.”
“시, 시프나드 저기 병아리들이 저러다가 사람들에게
밟히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너 같은 사람 만나면 사는 거고. 나 같은 사람 만나면 죽는
거지.”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의 완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미련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으로 자유롭게 흩어지는 병아리들을 살피던
에즈라는 시프나드의 넓은 등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충동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 사나운 행동은 늘
가늠하기 어렵고, 좀처럼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뭐……그런 게 운명이잖아.’’
그런데도 이상하지. 그는 가끔 가슴 한가운데가 꽉 막혀 올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곤 이렇듯 숨통을 트여 주었다.
“고마워요. 병아리 도와줘서.”
“그럼 키스해 주라.”
“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휘적휘적 앞서가던 이가 불쑥 걸음을 멈추자 에즈라는 그의
등 부근에 코를 박고야 말았다. 얼얼한 콧대를 손등으로
문지르는데 진득한 시선이 닿아 오자 행위는 점점 어색해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천천히 얼굴
부근을 가린 손을 내리자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코앞에서 멈춘
채였다. 댕그렁한 눈만 빠르게 깜빡이자 시프나드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킥킥 웃었다.
“왜?”
“……네?”
“왜 말 같지도 않은데.”
일순, 그가 표정을 굳히고 진지한 어투로 물어 왔다.
당혹감에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 며 우물쭈물하자 그가 고개를
조금 더 틀어 입술에 바짝 가까워졌다. 입술을 조금만 움찔하면
닿을 듯한 거리. 숨결이 섞이는 동안 그는 제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핥듯 응시해 왔다.
“내가 너한테 키스하고 싶은 게 왜 말 같지도 않냐고. 응?”
차라리 입술을 겹치는 것이 덜 부끄러울 듯한 기분에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그가 입술을 귓가로 옮겨 속삭였다.
“에즈라. 지금부터 긴장하지 말고, 태연하게 행동해.”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너는 지금 내 부인인 거야. 그렇지?”
당연한 것을 부자연스럽게 곱씹는 건 왜일까. 다가올
때만큼이나 멀어진 그는 제 등 뒤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
무표정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의 모습 중 가장 섬뜩해서
뒤돌아보기 저어될 정도였다.
“여기까지는 또 어떻게 알고 오셨대. 하나도 안 반갑게.”
시프나드는 여직 뒤돌아 있는 에즈라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곧 평소처럼 싱글거렸지만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오랜만이군, 시프나드. 얼굴을 보니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야. 아, 부인 덕에 잘 먹고 잘 자서 그런가?”
“뭐, 부인이 워낙 사랑스러워야지.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완전
돌아버리겠어.”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는 남자를 원망스레
쏘아보았지만 그는 유들유들하게 뺨에 입술을 맞추기까지
했다. 시프나드는 경악한 채로 굳어 있는 에즈라가 뒤를
돌아보지 못하도록 더욱 부여잡았다.
“보기 좋군. 그보다 인사시켜 주지 않을 건가? 아무리 그래도
부인에게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할 기회는 줘야지.”
“어떡하지, 아무한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나만 보고
옆구리에 끼고 살고 싶거든. 될 수 있으면 복면까지 씌우고
싶다니까? 에즈라, 복면 어때? 허락해 주면 복면 사다 줄게.”
“시프나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남자에게 눈을 부라렸으나 그는
하하 웃으며 제 품에 끌어당겨 숨 막히도록 끌어안았다. 아무리
밀어 내도 그가 밀릴 리 없다. 퍽퍽, 등을 두드리던 솜방망이는
곧 멎었다.
시프나드는 병아리를 보호하는 닭처럼 그녀를 품은 채로
다섯 발자국 뒤에 서 있는 아브타크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 사납고 야만적인 분위기를 즐기며 아브타크는 너그럽게
웃어 보였다. 여유 만만한 태도에 시프나드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