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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66화 (66/113)

66화

“……들여라.”

선잠에 들었던 걸까.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어조였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호위병들이 문을 열자 라티아는 옷자락을 쥔

채로 사박사박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침실 안은 에즈라가 떠나기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쓰던 침상도 그대로였고, 옆에 놓인 작은 협탁과

테이블도 마찬가지였으며 주인의 취향이 담긴 것인지

아기자기한 사슴뿔 조각상이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제국의 황비라기보다는 귀족 영애의 방 같았다. 자신의

침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초라했으나 확연히 다른

것은 분명한 온기가 감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남자가 뿜어내는 열기였다.

침상맡에 등을 기대고 앉아 양피지를 들여다보던

히폴로테스는 그제야 시선을 옮겨 멀거니 선 라티아를

바라보았다. 무감한 붉은 눈동자는 의아함을 담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야…… 황성에 모르는 이가 없으니까요.”

“황성 안의 것들은 어째서 다들 입이 가벼운지.”

그는 자조하며 양피지로 눈길을 돌렸다. 또 다른 양피지를

넘기는 히폴로테스는 라티아의 흐트러진 모습을 길거리 돌멩이

보듯 했다. 무정한 눈길에 울컥 원망이 치솟아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가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

“마리노스의 가문을 무너뜨렸다고 전해 들었어요.”

“그랬죠.”

“그의 딸과 남편의 가문까지 벌한 것은 조금 과한 처사가

아닌가요?”

그 말에 관심 없다는 듯 양피지를 한 장 더 넘기던

히폴로테스의 손이 우뚝 멎었다. 이제서야 반응을 보이는

남자가 밉다가도 라티아는 그가 제게 어떤 감정이라도

내비치기를 바랐다.

“과하다니.”

허나 그는 여전히 양피지에 시선을 못 박은 채로 고개만

갸웃할뿐이다.

“고작 귀족 나부랭이가 황비의 목숨을 대놓고 위협했는데.

과하다니?”

히폴로테스는 진정 우스운지 양피지를 내려놓으며 하하

웃었다. 광기 어린 웃음에 라티아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제대로 마주한 남자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히폴로테스 님, 저는……"

라티아는 침상 아래에 굴러다니는 술잔들을 착잡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히폴로테스는 이렇게 많은 술을 찾는 이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의 심정을 흐트러지게 만든 것도,

답지 않게 청승을 떨게 만드는 것도 사라진 여자 하나

때문이라니.

“너무 늦었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충동적으로 내지른 고백이었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이

후련해진다. 그러나 그의 감정을 마주할 자신은 없었기에 두

눈을 지그시 감아야 했다.

“알잖아요, 히폴로테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당신밖에는

없었다는 걸. 당신만 바라보았다는 거.”

“내게 항상 곁을 내주었잖아요. 당신 옆에는 내가

있었잖아요. 저는 지금 당신이 이러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요.”

어느새 라티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히폴로테스는 감춰 오던 취기에 흔들리는

시야를 느끼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나를 사랑해요?”

“네. 정말 사랑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무엇이라도 내줄 수 있을 만큼.”

“그럼 설명해 봐요.”

“……네?”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설명해 보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히폴로테스는 주인을 닮은 방 안을 흐려진

눈으로 담았다. 잠시 망설이던 라티아는 곧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당신을 보면 가슴이 뛰어요.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 주면

기대하게 되고, 무심한 눈을 볼 때면 마음이 쓰라리고 또화가

나고, 속상하고. 무엇보다…… 그 누구와도 당신의 관심을

나누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너무 갖고 싶어. 나만 바라봐 준다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나도 에즈라처럼 할 수 있어요. 나도 그 여자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주저 없이 당신을 택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라티아,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요?”

그는 격앙된 라티아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갖지 못하는 것보다 사람을 돌게 만드는 건 잃는 거예요.

그게 아무리 쓰잘데기 없는 거라고 해도, 분명 있었는데 사라진

건 잘 잊혀지지가 않아.”

처음에는 조금 동정했던 것 같다. 바보같이, 사랑한다는

한마디에 모든 지옥을 떠안은 여자를.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여자의 악몽을 대신 꾸고 싶었다.

내게 악몽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라,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해 주고 싶은 게 늘어나는

거야. 그 지옥으로 이끈 게 나인데도 염치없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점점 힘겨워져서.

고독 속에서 환영을 보는 여자의 눈을 감겨 주고 괜찮다

귓가에 속삭여 주고 싶었고, 내 곁에서 괴로워하는 여자를 놓아

주고 싶다가도 그건 내게 너무 지독한 일일 것 같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뒤집기도 했지.

필요하다는 거짓된 이유로라도 붙잡고 싶었어.

그래, 인정하기 싫었지만 분명 후회했다. 너를 내가 사는

지옥으로 끌어들인 것을.

“무서워졌어.”

나는 이렇게 될 거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어. 이 모든 건

내가 의도한 일도, 짜 놓았던 연극의 결말도 아니야.

덕분에 이곳에 홀로 남겨지고야 알았다. 지금 나는 네가 없는

삶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나는 한심하게도 내 곁을

떠나간 너를 미워하고 있어.

“라티아, 나는 에즈라를 갖고 싶지 않아. 나는 사랑하지 않나

보느 당신이 말한 대로 갖고 싶은 게 사랑이라면……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만약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누군가 내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다 버릴 테니까. 정말 다 버릴 수

있으니까. 너 하나만 세상에 남겨 두면 안 될까.

원한다면 무릎도 꿇을 수 있다. 평생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면, 몰래 바라만 볼게. 그러니까 제발

“그래서 곁에 없어도 되니까 살아만 있어 주면 좋겠어.”

히폴로테스의 한마디에 라티아는 하마터면 휘청일 뻔했다.

얼얼한 충격에 라티아는 가슴팍을 꽉 쥔 채로 헛웃음을 뱉었다.

홀러내리는 눈물을 험하게 닦아 내던 여자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에즈라가 없었다면 그와 자신의 관계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저였을

테고, 그가 제 아버지와 척을 져 입지가 좁아질 일도 없었을

거고.

이 남자가 이렇게 아파할 일도 없었을 거야.

에즈라, 너만 없었다면…… 여전히 저 남자 곁에는 나밖에

없었을 거야. 진정한 감정 한 자락 얻지 못한다 해도, 깨닫지

못했다면 평생 행복한 착각 속에서 살 수 있는 거잖아.

“너무 늦었지만 미안해.”

막 다가서려던 자신에게 남자가 건네는 말은 사형선고와

같았다. 미안하다니. 그런 말이 어딨어. 어떻게 이렇게 비겁할

수 있어. 내가,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알면서……

텅 비어 버린 남자에게서는 자신이 가져갈 감정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밑바닥을 확인하자 발밑이 사방으로 갈라지고

깨어져 습한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숨이 죄어들었다. 그 순간,

눈앞이 추악한 질투로 물들고 선악의 구분이 사라졌다.

그저 내가 아픈 만큼 당신도 아프기를 바라서. 지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해질 수 있어.

“아뇨, 죄송하게 된 것은 저예요.”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히폴로테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침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를 헤집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바라는 소원을 짓밟게 되었으니까요.”

라티아는 옷자락 안에 숨겨 두었던 것을 느릿하게 꺼내어

들어 그의 앞에 펼쳐 보였다. 훤히 드러난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실을 의미하는지 알아본 히폴로테스가 눈을 번뜩인다.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어디서 구했지?”

“이미 알고 있잖아요. 이번 일의 배후가누구인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와 피로 이어진 사람이죠.”

히폴로테스는 석상처럼 굳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라티아의 손에 들린 찢어진 키톤과 그 위로 번진 선명한 핏자국.

갈색으로 변색된 키톤은 낯익은 것이었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게 더욱 미치게 했다.

두 남녀는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오래도록 시간을

죽였다. 달빛이 지나간 곳에는 반쪽짜리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라티아였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옷자락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가느다란 팔 역시 축 늘어졌다.

믿을 수 없게도 옷자락이 바닥에 널브러지자 히폴로테스는

황급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덕분에 라티아는 처음으로

히폴로테스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젖어 있는 남자의 뺨과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까지도.

“비켜 봐.”

그대로 굳어 버린 라티아를 밀어 낸 히폴로테스는 곧장

옷자락을 주워 들고는 뒤돌아섰다. 등만 보여 주는 남자가

무엇을 하는지는 몰랐으나 곧 알 수 있었다.

“ 나가.”

“당장 나가!”

벼락같은 외침에 번쩍 정신이 든 라티아는 도망치듯

그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섰다. 평정을 잃은 그는 옷자락을 침상

위에 내팽개쳤다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가 얼굴을

가렸다가.

그러다가 다시 옷자락을 찢어져라 쥔 채로 먼지투성이인

그것에 얼굴을 묻는다. 심상찮은 분위기와 매서운 명령에

허겁지겁 침실 안으로 들어선 병사들이 양팔을 포박한 후

끌어내자 라티아는 힘없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그의 모습이 점점 가려진다. 믿을 수

없게도 남자는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는 온몸으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흐르는 내 눈물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그가 소리 없이 울었다.

우리 집은 슬럼가 중에서도 가장 외관이 깔끔한 건물이었다.

삼 층짜리 목조 건물은 퍽 그럴싸해 보였고 실제로 슬럼가에서

방귀 좀 뀐다는 사람들이 살았다.

에즈라는 요즘 일 층에 사는 빵집 아주머니와 이 층 사는

술집 여자 로아와 친밀한 관계를 다졌고, 시프나드는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도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대신 금이 간 찻잔 다루듯 과보호를 해 댔다. 아이를 가진

이유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구석이 있을 만큼

유별났기에 로아는 남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며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툴툴거 렸다.

게다가 민망한 것은 저 혼자뿐이었다. 언젠간 말해야지,

벼르고 벼르던 에즈라는 홀깃 시프나드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뗐다.

“시프나드, 그……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치근덕거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프나드는 뒤에서 들려오는 조곤한 목소리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치근덕? 내가? 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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