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에즈라는 처음 들어 보는 시프나드의 사나운 목소리에 어깨
너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큰 눈을 깜빡이며 다른 사람 보듯
한다. 시프나드는 부러 에즈라를 피하며 노인의 갈색 입술을
노려보았다.
“축하하네. 임신을 했어.”
“……네?”
“두어 달 정도 된 것 같아. 몸이 피곤하거나, 무언가 이상한
점 못 느꼈나? 어찌 되었든 가장 위험한 때인 만큼 몸가짐을
조심히 하고 아무리 불타오른다 한들 거칠게 밤을 보내지는
말게.”
그는 무어라 줄줄 말을 이으며 여러 가지를 일러 주었지만
에즈라는 그 어떤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부정하고, 또
믿을 수 없는 탓이다. 에즈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감쌌다.
왜인지는 몰라도 본능적인 두려움이 왈칵 일었다. 뒤에서
닿아 오는 남자의 침묵까지도 서늘하게 느껴져 에즈라는
어깨를 잘게 떨었다.
“다음 달에도 오게. 못해도 매달 한 번씩은 오는 게 좋아.”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프나드는 에즈라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세게 잡아끌었다. 넋이 나간 에즈라가 비틀거리며
끌려 나가자 노인과 그 곁을 지키던 젊은 여자는 소리 없이
경악했으나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아이를 원치 않은건가. 아니면……?
의사는 희끗한 턱수염을 문대며 말을 늘였다. 수십 년 세월을
거쳐 온 감이 무언가를 부채질했다. 어쩌면 저 사내가 남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런 의심을.
한편, 의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즈라를 끌고 나온
시프나드는 사납게 얼굴을 굳힌 채였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골목을 지나가는 이들은
시프나드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하나같이 놀라 움츠러들었으나
뒤따르는 에즈라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시프나드, 잠깐만요.”
에즈라는 자신의 손목을 부서져라 잡아챈 등을 보며 진땀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도 배 속의 아이가 위험할까 걱정이 되다니.
번잡한 머릿속에서도 아이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뚜렷했다.
“너,너무힘들어요. 조금만 천천히……"
“시프나드, 손목이 아파요!”
아프다고 소리치는데도 앞서가는 남자는 대답이 없다.
어디로 보나 이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는 게 분명히 전해져
왔기에 위화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왜 그렇게화를 내는 거예요? 내, 내가 임신한 게 싫은
건가요?”
“조용히 해, 에즈라. 지금 내가 기분이 별로거든.”
“어째서요? 시프나드가 제 남편이라면 이 아이는
당신의……!”
에즈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프나드가 뒤를 돌아 저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노려보았으니까. 손목이 아파 작게
신음하고 나서야 그는 손에 힘을 풀었다. 빠르게 손목을 빼낸
에즈라가 울상이 되어 시뻘겋게 달아오른 곳을 문지르자 그는
나지막이 입을 뗐다.
“나도 모르게 힘 조절을 못 했네.”
“아이를…… 원하지 않았어요?”
입술을 꾹 내리 문 채로 올려다보자 그는 시선을 회피했다.
혼란스러워 보였고 또 어딘가 불안해 보였으며 아껴 두던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낭패감이 짙게 배어 나왔다.
“어디 가서 임신했다고 말하지 마. 요즘 친하게 지내는 빵집
아주머니는 물론이고, 옆집 로나도 안 돼. 의원에 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
싸늘한 경고와 달리 그는 어울리지 않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시프나드가 성큼 앞에 다가서며 어깨를 두 손으로 잡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금 확인했다.
“내 말 알아들어 ?”
“정말 원하지 않았나 보네요.”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착잡함을 지울 수
없었고, 존재 자체에 환대받지 못하는 아기에게 죄스러웠다. 이
아이는 잘못이 없는데, 저 같은 것의 배 속에 자리 잡았다는
것은 아이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에즈라는 눈을 홉뜨며 원망을 감추지 않았다.
“너무해요. 의원에는 가게 해 주세요. 아이가 잘 있는지
정도는 알아도 되잖아요;
“말 들어.”
으득, 그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더없이 위협적이고
고압적인 태도였으나 에즈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
어깨를 잡아챈 두 손에서 온 힘을 다해 벗어난 에즈라가 두 팔로
배를 감싸 안았다.
아직 조금도 부풀어 오르지 않은 납작한 배를.
“싫어요. 절대 싫어요.”
“웃기네. 네가 싫으면 뭐 어쩔 건데?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주제에.”
“……무슨 일을 해서라도 의원에 갈 거예요.”
“하!”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시프나드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평소 같으면 유들유들하게 웃어넘겼을 테지만
시프나드는 훌쩍 다가와 에즈라와의 거리를 좁혔다.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만 같은 기분에 눈물이 어룽어룽 고여
온다.
시프나드는 우악스럽게 눈물을 훔쳐 주더니 몸을 돌려 앞서
걸었다. 따라올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여자는 제 발걸음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피어오르는 안도감보다
불쾌함과 알 수 없는 분노가 더욱 크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아주 뭣같아.”
큰 보폭으로 골목을 가로지르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한기가 서렸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달리 번듯한 입술
선이 곧 호선을 그린다. 눈앞이 어지럽고 평정을 잃은 와중에도
단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브타크가 이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 여자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니까.
날이 추워지자 낮은 짧아졌고 벌써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은밀한 일을 수행하기에 안성맞춤인 어둠 속에서 살수들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아브타크의 명령을 받아 무슨 일이든
수행하는 이들은 시프나드 몰래 슬럼 곳곳에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역을 바꾸어 가며 아브타크를 착지 않는
시프나드를 감시했고, 에즈라와의 사사로운 일 또한
아브타크에게 낱낱이 고해 바쳤다.
그러니 에즈라와 시프나드의 살벌한 분위기를 읽는 것쯤이야
어린아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
멀어서 잘은 들리지 않았지만 배를 감싸 쥐며 항변하는
여자의 얼굴과 그들이 들렀다 나온 의원. 그리고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윽박지르는 시프나드까지. 모든 상황을
조합한 두I 살수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모습을 감춘 후에도 살수들은 돌처럼
굳어 의심을 피했다. 흐린 달이 뜬 후에야 그들은 허공을 날듯
몸을 돌려 높은 성을 향해 달려갔다.
침상에 았아 있던 라티아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려 널따란
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필요 이상으로 넓었다.
그만큼 공허했고, 떠도는 공기는 늘상 서늘하기만 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이 었다.
아무리 애써도 제 것이 될 수 없는 사람을 바라는 외로움. 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가서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
무엇을 그렇게 망설였던 걸까. 대체 저가 뭐라도 된 것마냥
이 자리에 멈춰서 그가 다가오기만을 바라기만 한 걸까.
멍청하기도 하지. 단 한 번도, 에즈라가 히폴로테스에게 간절히
손을 뻗을 때까지도 무엇이 어긋나 있었던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연히 기다리면 올 줄 알았다. 아니, 이미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의 늪에 빠져 홀로 고개만 빳빳이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필요를 채워 주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채로.
에즈라가 실종되고 난 이후에는 더 쓰라린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는 에즈라가 사라져도 자신을 찾지 않는다. 그 여자가
아니고서라도 자신에게는 티끌만 한 감정도, 관심조차도 없는
것이다.
라티아는 침상에서 일어서서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 앞으로 다가섰다.
둥근 테이블 위에는 묵직한 황금으로 만들어진 보석 상자와
반들거리는 서신이 고이 올려져 있었다. 이미 한 번 읽어
보았지만두 번 읽을 자신은 없어 밀어 두었던 이야기.
라티아는 심호흡을 한 두I,다시금 서신을 펴고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어 내려갔다.
라티아. 네가 진정 내 딸이라면, 모든 것을 놓은 상태로
머저리처럼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겠지. 네게는 안된
일이지만 황비는 죽지 않았다. 그것뿐이면 다행이지, 황비는
황제의 아이를 수태했어.
그러니 너는 기회를 줄 때 붙잡아야 할 거야. 지금처럼
고상한 척 았아 있는다고 다른 이들이 네 손에 모든 걸 쥐여 줄
것이라 기대하지 마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달려들어라.
너는 내게 이미 필요를 다한 사람이야. 그럼에도 네게 유용할
만한 물건을 보내는 건 아비로서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다.
선택은 네 몫이겠지만, 알아서 잘 처신하기를 바란다.]
서신의 끝에는 그 흔한 인사말 하나 없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과연 이것이 아버지가 하나뿐인 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는 서신이 정녕 맞는 걸까. 라티아는 얕게
자조하다가 결국 허리 숙여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운 것은 에즈라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부분에서 활활
타오르는 분노였다. 아니, 분노의 탈을 쓴 질투일 것이다.
라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서신을 세게 움켜쥐었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과 바들거리는 주먹에 빳빳했던 서신은
단숨에 구겨졌다.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는 라티아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으나 곧 자취를 감추었다.
반쯤 녹아내린 촛대로 다가가 자그마한 불씨를 훔쳤다.
양피지 끝자락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이 커다랗게 치솟으며
빠르게 서신을 태워 나간다.
오므라드는 글자들을 무표정한 눈으로 훒어보던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들어 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의
풍경은 스산하기만 했다. 장미 향기를 맡던 여자의 황홀해하던
표정을 떠올리자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라티아는 굳은
결심을 한 채로 빠르게 뒤를 돌아 침실을 빠져나갔다.
문턱을 넘기 무섭게 침실 앞을 지키던 하녀와 호위병들이
당혹감을 여과 없이 내비쳤다. 라티아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늘 고요하고 차분하기만 하던 라티아의 거침없는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녀들은 곧장 그녀를 따라 복도를
가로질렀다.
“여기서부터는 따를 것 없어. 돌아가.”
냉담하고 날 선 어조에 몸을 움찔한 하녀들은 곧 공손한
태도로 물러났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라티아는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그 앞을 지키는 호위병들이 진땀을 뻘뻘
홀리든 말든 아무 말 없이 조악한 문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일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호위병들이 눈짓을 주고받는 동안,
라티아는 새까만 별궁의 복도를 둘러보다가 짧은 비웃음을
흘렸다. 어울리지 않는 짓을 벌이는 남자에 대한 비아냥이었다.
에즈라가 떠나기 무섭게 별궁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에즈라의 침실에서 홀로 지냈다. 청승도 이런
청승이 없지. 손안에 두고 내키는 대로 휘두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후회하고 그리워하다니, 한심한 꼴이다.
“일러라.”
“라, 라티아 님께서 드셨습니다.”
듣지 못할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문 너머에서는 별다른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내리깐 라티아가 질끈 입술을
물자 다른 호위병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히폴로테스 님, 어찌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