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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64화 (64/113)

64화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분명, 분명 몇 번이고

아브타크의 이름을 내놓길래 연기일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따라 들어온 카코스는 고개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했다. 저보다 쓰라린 표정이 퍽 안돼 보이는

탓에 히폴로테스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 너도 죽여 달라고 하게?”

“그것을 원하신다면……"

“됐어. 이젠 다 지겨워.”

실제로 지난 습격 사건에 마리노스의 사병이 섞여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무엇보다 마리노스는 아브타크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고위 귀족이었다. 처음부터 아브타크의 대가리를

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그의 수족을 잘라 낸 것으로도 꽤 큰 수확이었다. 커다란

것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모든 건 성공적이었을 텐데.

카코스는 별다른 말 없이 손을 내젓는 히폴로테스의

뒷모습을 낯선 사람 보듯 했다. 협곡으로 발길을 끊은 이후로

그는 매일 그랬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잔당을

처리하게 되었음에도 그는 일말의 기쁨도, 후련함도. 뿌듯함도

내비치지 않는다.

“알아보라는 건 제대로 알아보고 있는 거야?”

날 선 눈빛에 문득 정신을 차린 카코스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수도를 중심으로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확인 중입니다만

아직 별다른 성과는 없습니다.”

“그럼 병사를 더 파견해. 바다와 인접한 먼 지역까지 모두,

제국 전체를 쥐 잡듯 뒤지라고.”

“예. 명을 받듭니다.”

나지막이 욕을 중얼거리던 히폴로테스는 불타오르는 촛대로

손을 뻗었다. 이렇게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닌데. 당장이라도

협곡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래, 이번에는 강물을 온통 퍼내는

것이다. 그러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온통 머릿속을 차지한 에즈라는 이렇듯 신경을 갉아먹었다.

“테르모스, 시프나드는?”

“말씀하신 대로 아브타크의 곁에 시프나드가 사라진 지 꽤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아브타크의 성을 제집마냥 뻔질나게

드나들었겠지만 요즘은 통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히폴로테스가 답지 않게 고개를 숙이자

그곳에 모인 모두는 말을 잃었다. 눈치를 보던 이들 중, 먼저

입을 뗀 것은 제논이 었다.

“……아직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 니까?”

저 눈치 없는 자식. 데몰레온은 팔짱을 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논의 말에 히폴로테스는 단언했다.

“당연하지. 내 명령 없이는 죽을 수도 없어.”

“살아 있어야 할거야.”

살아 있어야 해. 아니, 살아 있어 !

“걔가 나를 떠날 리 없잖아.”

미치광이 보듯 응시하는 이들의 눈이 우스워 히폴로테스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비밀을 유지하려 했지만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황비가 은밀하게 황성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습격을 받아

죽고 말았다고요. 실종이라는 말을, 그 누구도 믿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데몰레온의 말에 히폴로테스의 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 목을 파고든 칼날을 데몰레온은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자 칼날이 파고든

목울대가 움직거린다.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복종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자

히폴로테스는 칼을 쥔 손을 툭 떨구었다. 이내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간이 침상을 향하는 그를 네 사람은 고목처럼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논은 젖어 들었던 붉은 눈동자를

다시금 떠올렸다.

‘제발 찾아줘.’

그토록 절박한 남자를 본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그가 말아 쥔 칼 손잡이에는 여전히 은색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해지고, 뜯어진 데다가 핏자국이 남은 볼품없는 천

조각.

몇 번이나 동여맨 것인지 깊게 주름진 그것에서 제논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입술을 댓 발 내민 에즈라는 험한 손속으로 녹슨 걸쇠를

풀었다. 마치 시위하는 듯한 태도에 시프나드가 키들거리자

에즈라는 더욱 눈살을 좁히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 해, 나가지 않고.”

“왜 자꾸 맘대로구는거예요?”

“글쎄. 나는 항상 마음대로 굴어서 정확히 월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에즈라는 확 뒤를 돌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눈을

맞췄다.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남자를 보자 더욱 열이

뻗쳤다.

“매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습관적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손은 또다시 어깨를 덮은

채였다. 얼굴이 벌게진 에즈라가 반항 아닌 반항을 하자 그는

더욱 어깨를 감싸 쥐며 뒤에서 와락 안기까지 했다. 깜짝 놀라

퍼덕이는 작은 몸을 품에 가두며 그는 여자의 머리통에 뺨을

부볐다.

“미, 미쳤어요?”

“냄새가 좋아. 너한테 내 냄새가 나거든.”

“이거 놓으세요!”

“싫은데.”

시프나드는 실없이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반항할수록 더 짓궂게 굴고 싶어진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그는 붉어진 귓바퀴를 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러니까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깨문 것은 심심찮은

장난이었다. 경악한 얼굴이 퍽 볼만한 탓에 그는 능숙한

거짓말을 지껄였다.

“남편이 애정 표현 좀 하고 싶다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그건 …"

역시, 또 이 표정이다. 녹색 눈동자에 혼란이 일렁였다. 그는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김빠진 웃음을 흘렸다. 혼인을 했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듯했지만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에는

확신이 들지 않는 모양이다.

믿든, 믿지 않든 당연한 거짓말인데도 저런 표정을 볼 때마다

괜히 심술이 일었다. 시프나드는 에즈라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며 조금 거칠게 이끌었다.

이빨리 가자. 문 앞에서 이러고 있으면 안 그래도 좋은 금슬,

둘째 본다고 소문날걸.”

화들짝 놀란 에즈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시프나드

역시 에즈라와 발 맞춰 걸었다.

슬럼가는 아주 좁은 골목들이 여기저기로 뻗어 있었기에

길을 잃기 딱 좋았다. 기억을 잃은 데다가 방향 감각이 좋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은 아마 시프나드가 없다면 밖에 나온다 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다.

에즈라는 새삼스러운 광경을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한낮에도 어둑한 길목에는 술에 절어 널브러진 이들이 많았고,

그들의 주머니를 뒤지는 어린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구석에

모여 도박을 하며 낄낄거리는 사람들. 얇은 옷자락을 팔랑이며

지나가는 남자를 유혹하는 여인들과, 날이 빠진 도끼나 칼은 찬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조직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슬럼가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 나가고

있었다. 기분이 묘한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시프나드에게 시선 한

자락, 손가락 하나 뻗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들은 시프나드가

골목을 지나갈 때면 목소리를 죽이고 어색한 행동을 했다.

그러니까……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생쥐처럼 굴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저도 모르게 빤히 올려보았나 보다. 앞만 보고 걸어가던 그가

시선을 내려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느글거리는 표정을 한

그가 또다시 손을 꾸물거리며 허리를 쓸어내리자 에즈라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내가 잘생겼어도 그런 눈으로 올려다보면 어떡해.

잡아먹어 달라고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언제 봤다고 그러세요.”

“큰일 났다. 거짓말하는 것도 예쁘네.”

놀리는 어투가 분명했기에 그의 손을 힘 있게 떼어 낸

에즈라는 막무가내로 그를 앞서서 걸어 나갔다. 얼마 걷지 않아

팔을 잡아챈 시프나드는 가볍게 몸을 뒤로 잡아끌었다.

“거기 아니야.”

민망함에 괜히 시선을 피하자 그는 좁은 보폭을 맞춰 줄 뿐,

더 이상 농을 치지 않았다. 한참 골목을 돌고 돌아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의원이었다. 낡은 나무 판잣집 안에는 진료를 보러

온 사람들이 여럿 대기하고 있었고, 한쪽에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노인이 환자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여기는 왜 온 거예요?”

“기억을 잃은 것도 병이잖아.”

퉁명스러운 말투에는 분명 세심한 배려가 묻어났다.

에즈라가 달아오르는 뺨을 숨기려 살짝 고개를 떨구자 허리를

숙인 시프나드가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대놓고 낄낄거린다.

하여간, 행동으로 모든 걸 까먹는 남자다.

“이봐, 여기 먼저.”

시프나드가 의사에게 툭 내뱉자 노인은 주름진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인지 이리저리 살피던 노인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람들 뒤를 턱짓했다. 아무래도 순서를 맞춰

기다리라는 뜻 같았다.

“시프나드, 당연히 뒤로 가서 줄 서야죠.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답답해. 난 그런거 해본적 없어.”

막무가내로 걸어 나가려는 그의 손을 덥석 잡은 것은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결코 먼저 손을 뻗지 않았던

에즈라가 닿아 오자 움찔하며 걸음을 멈춘 시프나드는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리는 여자는 닿아 오는 시선들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곧 간절한 눈망울과 마주친 시프나드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빗기고 말았다.

“한시가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저보다 위급한 환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알았어.”

고작 그 한마디에 빙긋 웃어 보인다. 아무리 실없는 농담을

해도, 일부러 쿡쿡 찔러 봐도 활짝 웃어 주지 않던 여자가.

어처구니없게도 겨우 이런 것에 미소를 보였다.

더 우스운 것은 그 얼빵한 얼굴을 머저리처럼 눈에 담는 저

자신이었다.

시프나드는 어벙한 표정을 한 채로 에즈라의 옆에 자리했다.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돌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에즈라였다.

“솔직히 깜짝 놀랐잖아요. 맨날 제멋대로 굴던 시프나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 니까…… 와, 조금 뿌듯했어요.”

대답하지 못했다. 여자가 옆에서 뭐라 조잘거리기는 하는데

귀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대체 지금 자신이 월 하고 있는 건지.

휘둘러야 하건만. 어째서 휘둘리고 있는 것만 같은지. 요즘따라

문득 닥쳐오는 위험한 기분에 벌컥 짜증이 나고 신경이

곤두섰다.

에즈라는 한참 대꾸하지 않던 남자의 성마른 눈을

마주하고는 말을 잃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뭘화나게 만든 걸까.

저렇게 진지한 표정은 은근슬쩍 가슴께를 지분거릴 때 빼고는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기다리게 만들어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쪼잔하게 겨우 그런 것 가지고 툴툴거리다니! 입술을 비죽

내밀다가도 마음이 쿡쿡 쑤셔 오는 통에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으며 고개를 폭 숙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어색한 기류에

휩싸인 동안 차례는 곧 다가왔다.

“거기. 이리 오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요. 빨리해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네, 지금 가요.”

노인이 재촉하자 에즈라는 한달음에 달려가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뒤를 지키고 선 시프나드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졌다.

“딱히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불편한 곳이

어디요?”

“얼마 전에 물에 빠졌는데. 깨어나 보니 기억을 잃었어.”

한결같이 오만방자한 태도에 의사는 단번에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다가 살벌한 시프나드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홈홈거리며 에즈라의 눈을 까뒤집어도 보고 입을 크게 벌려

보라고도 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노인은 마지막으로 에즈라의 팔을 가져다가

맥을 짚어 나갔다. 음, 낮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노인이 에즈라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뗐다.

“ 남편인가?”

“네?”

“저 뒤에 서 있는 사내가 남편이냐고 물었네만.”

“네, 아니, 어……그게 그렇다는데요.”

에즈라의 시원찮은 반응을 지켜보던 시프나드의 눈동자에

날이 서렸다. 몇 번이고 속삭인 거짓에도 여전히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노인의 의심스러운 눈동자까지 더해지자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그게 그렇다니. 남편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걸 어쩌나.”

“젠장, 남편 맞다니까! 그보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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