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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63화 (63/113)

63화

구획된 광장이나 구불거리는 골목 할 것 없이 무장된

병사들이 헤집고 다닌 지도 어언 수개월. 수도를 중심으로

경비는 삼엄해졌으며, 그만큼 황성 안의 분위기도 얼어붙어

갔다.

바짝 마른 나무토막에는 불씨 하나만 튀어도 불꽃이 날름

번져 나가는 법. 큰일이 터지기 직전의 고요함을 본능적으로

느낀 이들은 최대한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추었다.

그 모든 일의 원흉인 히폴로테스는 늦은 밤까지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시간의 휴식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끝이 났다.

“히폴로테스 님, 카코스입니다.”

이미 몸을 일으킨 히폴로테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열린 문에 당황할 틈도 없이 히폴로테스는

문턱을 넘고, 카코스를 스쳐 지나갈 뿐. 무어라 대답도, 다른

말도 없었다.

히폴로테스는 평소처럼 큰 보폭으로 황성의 본궁을 나가

지하 감옥으로 걸음했다. 꽤 멀었지만 가는 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탓에 무거운 침묵만이 모두를 짓눌렀다. 그러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히폴로테스가 멈춰 선 것은 모두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히폴로테스 님?”

크고 작은 구멍이 뚫린 새까맣고 거친 돌덩이. 거미줄과

먼지가 엉겨 붙어 있는 돌벽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것을

손끝으로 훑자 잿빛 먼지가 묻어난다. 입꼬리를 비튼

히폴로테스는 손끝을 문지르며 눈을 사납게 빛냈다.

히폴로테스는 어둠에 잠식된 계단의 끝을 멍하니 응시했다.

언젠가 제 발로 계단을 내려가던 여자의 뒷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티텐의 멸망이 손끝에 닿았던 그때, 답지 않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던 자신에게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던

말간 얼굴이.

‘걱정 마세요, 히폴로테스 님.’

과연 어땠을까. 나라를 부수고 계단을 올라와, 죄 없는

이들의 시체에 둘러싸인 채 나를 찾아 헤매던 너는.

“히폴로테스 님. 포로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나도 알아.”

제논의 목소리에 에즈라는 연기처럼 날아가 사라졌다.

미세하게 인상을 쓴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발을 내디뎠다.

하나둘, 계단을 내려가자 길을 따라 타오르는 횃불의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쳤으나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짐승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감옥 안에는 총 다섯의 살수들이

묶여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을 부라리며 아브타크에게

충성을 내비치던 놈들은 살점이 너덜너덜해져서야 신음과 같은

이름을 반복하며 살려 달라 애원해 왔더랬다.

히폴로테스는 피비린내와 상처가 썩어 문드러지는 고약한

냄새를 즐기며 정적을 깼다.

“멍청하기도 하지. 그러니 처음부터 배후를 밝혔으면 그나마

병신은 안 되었을 거 아냐.”

“사,살려……주십시오. 제발……"

“살아 있으면서 무슨 소리야. 물론 멀쩡한 몰골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네 며칠은 더 살수있어.”

위로라고 지껄이는 것인가. 살벌한 표정과 달리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목소리였다.

“꺼내라.”

병사들은 괴로움에 신음하는 이들을 포박한 채로 거칠게

잡아끌었다. 히폴로테스가 뒤를 돌아 지하 감옥을 빠져나가자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늦은 밤임에도 귀족들은 웅장한 알현실에 옹기종기 모여

서로 귀엣말을 나누고 있었다. 전례 없는 일이었으나 황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게다가 그들 모두는 흉흉한

소문과 그로 인한 상황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황제를 기다리는 이들의 시선이 아브타크를 놓치지 않는다.

안 그런 척하면서 귀족들은 심히 아브타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와 황제의 팽팽한 세력 다툼을 모르지 않으니까.

“황제께서 드십니다!"

알현실 밖에서 병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알려 오자 모두는

바짝 긴장한 채로 몸을 바로 했다. 그들 중, 여유 만만한 것은

아브타크 하나뿐이었다. 그 대담한 태도에 남몰래 혀를

내두르는 귀족도 적지 않았다.

묵직한 황금문이 활짝 열리고 그 사이로 히폴로테스는 걸어

들어왔다. 더할 나위 없이 황제다운 걸음걸이와 좌중을

휘어잡는 위압감. 그것은 분명 수많은 이들을 살육한

사람에게서 배어 나오는 살기였다.

이윽고 황금 의자에 앉은 히폴로테스는 무심한 눈으로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기울인 채 침묵을 지키는

동안 그곳에 모인 귀족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길목에

내던져진 죄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황비를 요양 보냈다는 것은 이미 소문이 퍼졌으니 다들

알고 있을 테고.”

“사랑하는 황비를 위험에 빠트린 죄인들을 좀 잡아 왔는데.

이들의 낯이 익은 귀족이 있나?”

“으윽!”

뒤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험한 손속으로 죄인의 머리채를

휘어잡자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갈려 있는

몰골에 구역질이 치미는지 몇몇의 귀족들은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도 입술을

열지 못하자 주변을 둘러보던 히폴로테스는 곧 지루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들이 알아보지 못하니 저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 황제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래서 배후는 누구라고?”

어르는 듯한 어조에 부어오른 눈을 끔뻑이던 죄인은 곧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 중 하나가 짓이겨져 피떡이 된 입술을

달싹이더니 부정확한 발음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내뱉었다.

“……마리노스.”

이름이 불리기 무섭게 귀족들 중 하나가 다리를 휘청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바들바들 떨리는 수염. 넓적한 입술을

벌려 숨을 몰아쉬던 마리노스는 가슴께를 붙잡은 채로

아브타크를 쏘아보았다.

아니, 절박한 눈으로 소리 없이 애걸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배신을 당한 모습으로 황망해하던 마리노스는 결국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시.”

“ 마리노스.”

히폴로테스는 마리노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픽,

조소했다.

“다시.”

“ 마리노스.”

“다시.”

고작 살수나부랭이와 대거리가 길어지자 억눌러 왔던 짜증이

치솟았다. 그럴수록 늘 지켜 왔던 평정은 바스라졌고,

히폴로테스는 직접 몸을 일으켜 열댓 개의 계단을 내려왔다.

그가 다가오자 제논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그의 옆을 지키고

섰다. 히폴로테스는 제논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제논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칼을 내밀었다.

“……다시.”

익숙하게 칼을 잡은 황제가 살수의 목에 날을 겨누자

귀족들은 히끅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마리……"

살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손쉽게 머리를 잘라 낸 그는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대강 닦아 낸 뒤, 그 옆에 선 살수에게

칼을 겨누곤 활짝 웃어 보였다.

“ 마리노스.”

그러나 이번에도 히폴로테스는 칼질을 해야 했다. 그는

마리노스의 이름을 지껄이는 살수들을 미련 없이 직접 베어

냈다. 늘 성스럽고 고결한 분위기를 뿜어내던 알현실에는

끔찍한 냄새가 진동했으며, 잘린 머리들은 비릿한 액체로 흠뻑

젖은 양탄자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연이어 다섯의 목숨을 빼앗았음에도 히폴로테스는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질척한 발걸음을 돌려 그는 곧

마리노스의 앞에 버티고 섰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린

마리노스는 바닥을 파고 들어갈 듯 옴짝거리며 흐느꼈다.

등을 덮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것이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아니, 아니 그것이……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마리노스는 엉금엉금 기어와 히폴로테스의 발치에 손을

뻗었지만 차마 닿지는 못했다. 아마 마리노스를 채찍질한다

해도 이제 와서 아브타크의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히폴로테스는 이를 악문 채로 유들유들한 얼굴을 했다.

“마리노스, 정말 아쉬워. 자네의 유능함을 익히 알기에 살려

두고 싶지만, 내가 워낙 황비를 사랑하는 터라.”

칼을 놓지 않은 채 황제는 팔짱을 꼈다. 여유로운 태도가

미치도록 두려웠다. 마리노스는 슬쩍 고개를 들어 칼날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바닥에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자네의 식솔이 어느 정도더라?”

“대답해.”

“부, 부인과 이미 혼인한 여, 여식이 하, 하나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히폴로테스는 주저 없이 그에게서 뒤를 돌았다.

거칠 것 없는 걸음걸이로 황금 의자로 걸어 나가던

히폴로테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다. 그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누군가의 앞을 스쳐 지나가던 그 짧은 순간,

히폴로테스는 들고 있던 칼을 누군가의 발 앞에 세게

내리꽂았다.

챙강, 날붙이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소음과 함께 부러진

칼날이 튀어 올라 남자의 뺨을 가르고 추락했다.

아브타크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뺨을 감쌌다. 그런 아브타크에게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히폴로테스는 황금 의자에 았아 턱을 괬다. 모두가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에 비틀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리노스를 사형에 처한다. 마리노스의 여식과 혼인한

가문의 식솔들까지. 모두 다.”

상을 내리듯 온화한 표정에 그곳에 모인 모두는 말을 잃었다.

“제발, 제발 자비를……! 아악! 이거 놔라, 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마리노스는 이성을 잃고 발악하기 시작했으나 히폴로테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사병은 황궁의 병사로 들일 것이며, 영지 또한 황실의

것으로 돌린다.”

오히려 조금 들떠 보이는 젊은 황제를 올려다보며 귀족들은

공포에 젖어 들어갔다. 그러든 말든 히폴로테스는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아브타크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눈이 마주치자 먼저 웃어 보인 것은 아브타크였다. 피가 배어

나오는 뺨을 감싼 채, 교활한 늙은이는 완벽한 비웃음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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