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주는 혼자 남아서-62화 (62/113)

62화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노병은 황비가 추락했다는 동굴 입구를

올려다보다가 푹,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으로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솔직해지자면 황비가 살아 있을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했다.

그렇지 않은가. 사방이 돌로 이루어진 협곡 안, 돌벽에 뚫려 있는

동굴 입구는 까마득한 높이에 위치해 있었다.

웬만한 남정네들도 떨어지기 저어할 정도의 높이인 데다가

라우 협곡의 물살은 수시로 바뀌어 위험 지역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유속이 잔잔한 날은 거의 없었다. 대체로 세찬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다가 가끔 느려지기도 했으나 그래도 가녀린 여인에게는

버거운 속도였다. 강물에 휩쓸린 황비는 단번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것이 기정사실이었다.

허나 눈 감고 귀 막은 황제는 대놓고 어리석게 굴었다. 혈육을

제 손으로 도륙할 정도로 잔악하고 무도한 황제. 무력으로 거머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황제라지만. 그 누구라도 지금의

그를 본다면 그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간절히 찾아 헤매는 모습은 퍽 안쓰러웠다.

까칠하고 해쓱해진 얼굴의 황제는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도 매초

조급함이 가시지 않는지 수선을 떨어 댔다.

성질을 이기지 못해 아랫것들을 마구 다그치다가 곧 허망한

표정으로 버석한 눈가를 쓸었다. 비틀거리며 꿋꿋이

나아가다가도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헝클였다. 오늘은 좀

포기하려나. 내일은 하려나 했던 것이 끈질기게 이어져 벌써 어언

두 달이 넘어갔다.

기대를 매일 저버리는 황제는 실체를 드러내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적지 않은 원성이 일었지만 그가 받아들여야 할 죽음의 깊이가

협곡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병사들 역시

대부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끝까지 노력했다.

하지만 이쯤 되니 병사들의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오늘도 허탕인가. 어차피 내일도 허탕일 텐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이봐! 말조심하게. 들릴지도 몰라.”

“글쎄다. 저 상태로는 대놓고 욕을 지껄여도 못 알아들을 것

같다만.”

앞서가는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들었다.

날이 저물어 횃불을 켠 지도 벌써 몇 시간이 흐른 후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달빛이 하루 일과가 끝났음을 알려 오자 기강이

해이해진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 갔다.

결국 앞장서 병사들을 이끌던 기사단장은 걸음을 멈추고

횃불을 좌우로 휘둘렀다. 오늘 수색이 모두 끝난 것이다.

병사들은 소리 없는 쾌재를 부르며 좁고 열악한 강물 너머에

막사를 치기 시작했다.

그나마 라우 협곡의 강물이 범람하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수색이 끝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며 병사들이 지친 몸을

뉘이는 동안 제2 기사단장은 히폴로테스의 앞에 쭈뼛대며

다가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무슨일이지?”

“감히 말씀 올립니다. 더 이상 하류로 내려간다면 돌아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집니다.”

“그…… 벌써 강행군이 사흘째입니다. 병사들이 많이 지치고

사기 또한 떨어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내일이라도 황성으로

돌아가셔서 부대를 재정비하시는 건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목을 내놓을 결심으로 상황 보고를 하던 기사는 침묵이

이어지자 결국 목울대를 꿀렁였다. 황제가 하는 일에

왈가왈부하다니. 매초마다 수명이 닳아 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오만을 후회하며 목숨을 구걸하려던 그때, 황제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그를 응시하던 기사는 곧 소리 없이 경악했다.

“히폴로테스님!”

내지른 부름이 무색하게 히폴로테스는 이미 강물 속으로 풍덩

몸을 던진 후였다. 이럴 수가! 끝내 상심을 못 이기시고 나쁜

결심을 하고 만 건가. 질겁한 기사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강가로 허겁지겁 뛰어갔다.

코앞에서 일렁이는 시꺼먼 강물은 사람을 집어삼키는

괴물처럼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있었다. 목숨 걸고 황제를

보필하는 것이 의무이지만 차디찬 강물을 마주한 그에게 몸을

던질 용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제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던가. 자존심을 내려놓은 기사는 저

멀리 막사 앞에 서 있는 제논을 발견하곤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단장님! 크, 큰일입니다. 홤제께서 강물에 몸을

던지셨습니다!,’

“……알겠다.”

“예. 예?”

화들짝 놀랄 줄 알았건만 너무도 담담한 반응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제논은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 단장님?”

첨벙, 물 튀기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믿어지지 않는 일련의 일에 기사는 돌처럼 굳어 자리를 지켰다.

수렁에 빠진 듯 눈앞이 빙글거리던 그때, 갑작스러운 소란을 느낀

것인지 데몰레온과 카코스가 막사 밖으로 모습을 드러 냈다.

“무슨 일인데 소란이야.”

“그것이…… 어. 음. 황제께서 강물에 몸을 던지셨고.

단장님마저 그분을 찾으려 강물로 뛰어드셨습니다.”

“뭐?”

데몰레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퍼뜩 정신을 차린 기사는

잔뜩 기합이 든 모양새로 내질렀다.

“뛰, 뛰어드셨습니다!”

“그만. 알았다. 아무 일 없을 테니 너는 돌아가 자리를 지켜라.’’

흥분한 기사와 달리 데몰레온 또한 차분한 태도로 명령했다.

아득해진 기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데몰레온이 카코스에게

눈짓하자 카코스는 슬쩍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나. 막을 도리가 없네.”

“이렇게 대놓고 막무가내로 구실 줄은 몰랐지.”

카코스는 제논이 히폴로테스와 함께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새벽녘까지 에즈라를 찾아다니는 황제를 모르지

않았고, 그런 그를 뒤쫓는 것은 제논의 역할이었다.

이유는 단순히 제논이 그들 중 가장 헤엄을 잘 치기

때문이었다. 심란함을 감추려 조소하던 카코스는 뒤를 돌아

힘없는 걸음을 옮겼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세찬 물줄기

소리에 멈칫한 그는 강물 쪽을 바라보았다.

감정은 옮는다더니. 하루하루 지날수록 자꾸만 가슴 한쪽이

저릿해지는 걸 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손바닥으로

심장 부근을 꾹 누르던 카코스는 이내 울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 어느덧 협곡에 모인 이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풀 꺾인 풀벌레 소리와 반쯤 타 버린

횃불까지. 고요 속에서 히폴로테스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우뚝 솟아오른 돌을 붙잡은 채로 물에 젖은 머리칼을 털어

냈다.

제대로 된 수면도 취하지 못하고 식사를 걸렀더니 체력이

약해진 듯 돌을 감싼 팔에 자꾸 힘이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물살은 서 있기도 벅찰 정도로 거셌고, 피부 감각이 마비될 만큼

차디찼다. 평범한 이라면 이미 정신을 잃고 떠내려갔을 테지만

그에게 이 모든 일은 너무도 익숙해진 일이었다.

다시금 물속을 제집처럼 유영하던 히폴로테스는 꽤 아래까지

떠밀려 간 후에 잠시 멈추어 숨을 골랐다.

저를 제외한 세상은 이리 평온한데, 홀로 전쟁을 치르는

꼴이라니. 그는 짧게 실소했다.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언제 왔어?’’

“꽤 됐습니다. 하류 쪽에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 그렇구나.”

무뚝뚝한 보고에 실망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이리 다행일

줄이야. 눈가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언 뺨을 녹였다. 그것을

어린아이처럼 마구 닦아 내며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나 있잖아. 사실 걔 찾는 거 아니야. 그냥 이렇게라도

괴로워야 할 것 같아서.”

자신이 우는지도 모를 만큼 울었다.

“날이 갈수록 오늘로 내 삶이 끝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손에 쥔 것 없이 하루가 지나 버릴 때마다. 에즈라가 죽어

버렸다는 현실이 자꾸만 나를 뒤흔들 때마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다들 가망이 없다고. 이미 죽은 게 분명하다고 떠드는 거 다

알아. 근데 말이야……”

한참 우물쭈물하며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던 히폴로테스는

말끝을 흐렸다.

“그, 길을 잃은 건지도 모르잖아. 여기는 우리한테도 아주 낯선

곳이니까.”

황망한 얼굴을 달빛이 아스라이 비추었다. 눈물로 범벅된

남자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이상해."

“정말이해가 안가. 이해할수가없어.”

그가 헛웃음을 흘리며 진정으로 의아한 듯 물어 왔다.

“그냥아쉬워야 하지 않아?”

어디로 봐도 그냥 그렇구나. 조금 아쉽네. 하고 뒤도는 게

맞잖아.

“내가 걔를 사랑한 것도 아니고. 이용해 먹던 여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 여겼던 여자.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래, 겨우 그딴 여자 하나 사라졌다고 이렇게 난리 법석 떨

필요 없는거잖아.

“그리고 나 이럴 때가 아닌데. 돌아가면 할 일 되게 많이 쌓여

있을 텐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 나라의 황제니까.”

제논은 격앙된 채로 주절거리는 히폴로테스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겨우 사람 하나 찾는 거에 이렇게나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효율적이지 못해.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왜 놓지 못하는걸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느껴져. 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이나.

어머니가 죽었다. 세심하게 챙겨 주던 형의 가슴을 갈랐다.

누구보다 해맑게 웃으며 나를 졸졸 따르던 남동생의 목을 쳤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사정없이 뭉그러뜨렸지.

그것뿐인가, 그 여자의 가족마저 내가 모두 죽였다.

비리고 미적지근한 핏물은 내 손아귀를 떠난 적이 없어. 내가

죽인 무고한 생명을 산처럼 쌓는다면 티텐의 성벽보다 높게

솟아오를 거야.

황제라는 자리는 그 위를 딛고 선 자리였다. 수많은 죄를

짊어진 채 아무렇지 않은 척 광대처럼 연기를 해야만 하는 자리.

나는 이렇게나 강하다고. 그러니까 이토록 놓은 곳에 나를 혼자

두고 올려만 보라고.

감히 내게 다가오지 말라고.

“나는 늘 혼자였어.”

나보다 외로웠던 삶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건 평생 전할 수 없는. 나조차도 몰랐던

진심이었으니까. 에즈라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나는

한심하게도 기대했던 거다. 어쩌면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이 자리에 두 사람은 설 수 없거든.’’

“저희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히폴로테스

님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히폴로테스는 단호하게 눈을 빛내는 제논을 마주 보며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를 지나쳐 먼저 뭍으로 오르자 제논이

뒤를 따라왔다. 히폴로테스는 그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차갑게 식은 손이 떨어져 나가자 히폴로테스는 눈을 감고

온기를 좇았다. 데몰레온의 엄한 아버지. 카코스가 끔찍이 여기는

여동생, 테르모스를 따르는 여러 동물들, 제논과 어깨를 같이하는

화통한 기사들까지 .

그러나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도, 여동생도. 나를

따르는 동물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편히 어깨를 맞추는

동료마저도.

“에즈라한테는 나밖에 없다.”

내가 에즈라의 모든 걸 망가뜨렸거든.

“사실 나한테도 에즈라밖에 없어.”

좁은 협곡 사이로 서늘한 밤바람이 몰아쳤다. 멀쩡히 눈을 뜬

채로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여자의 환영을 보았다. 저 멀리.

인적이 드문 곳에서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사뿐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너를.

혼자 두지 말아 달라던 얼굴이 어렴풋해서.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렇게 영영 볼 수 없다 생각하니 자꾸만

두려워졌다.

기억 속의 너마저도 사라질까 보느 그러다가 눈 감으면 보이는

네 얼굴을…… 잊어버리는 날이 올까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