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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61화 (61/113)

61화

시프나드는 자신의 이름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무구한

눈망울에 대답할 말을 잊고 말았다. 새하얗게 바래 버린

머릿속에서 그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으나, 현실이 주는

황홀함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에서 건져 내 납치하려던, 아주 평범한 계획이었건만. 이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올 줄이야. 입술을 가르고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으나 그는 겨우겨우 그것을 삼켰다.

절대 기쁨을, 이 환희를 내비쳐서는 안 되니까.

“어디서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아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거야? 나마저도……?”

밤하늘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조금 울컥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감정을 틀어막으며 쓰라린 목소리로 물어 오자 어쩐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를 기억해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상처룔 입힌 것만 같아서.

“죄송해요. 정말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저. 저도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가 누, 누구고 정말

너무…… 죄송해요.”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뿌옇다. 고장 난 시계태엽처럼

생각도 멈춘 채였다. 뭐가 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맹추가 된

기분에 에즈라는 온몸을 달달 떨기 시작했다.

“아니. 죄송할 건 없어. 기억을 잃은 게 네가 원한 일도

아니잖아. 나는 네가 살아 준 것만으로도 기쁘거든. 기억이나.

추억이나 그런 건 또다시 하나하나 만들어 가면 되는 거야.”

애초에 그런 것 따위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에즈라는 꿈속을 헤매는 아이처럼 혼몽한 표정을 지은 채

허공을 응시했다. 기억을 잃었다. 그것도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를

만큼. 아예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다. 삶이 송두리째 날아가자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저를 해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주체 못 할 공포에 에즈라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먹이자

시프나드는 다가와 커다란 품으로 꼭 안아 주었다. 남자의 품은

낯설고 이유 모를 위화감이 들었으나 잠시뿐, 제 이름조차도

가지지 못한 제게 있는 것은 이 남자 하나뿐이 아닌가.

먼저 이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알아 가야 했다. 에즈라는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 내며 은근슬쩍 그의 품을 벗어났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예의 차리니까 되게 어색하네.”

“원래는 이러지 않았나요?”

“응. 내 이름은 시프나드야. 너는 에즈라고. 입고 있는 옷을

보다시피…… 우리는 아주 평범한 평민이지.”

“여기는 어느 나라인가요? 저는 여기서 나고 자랐나요?”

아예 머리가 백지장인 모양이다. 시프나드는 씁쓸한 척

가슴께에 팔짱을 끼며 낮게 조소했다.

“여기는 와스터 제국. 너는 여기. 슬럼가에서 나고 자랐어. 눈

뜨자마자 할 말은 아닌데…… 넌 천애고아야.”

“아……,”

에즈라의 표정이 망연해졌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조심하는

모양새였으나 어딘가 가뿐해 보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되짚으려

해도 그럴 수 없으니 답답할 법도 할 텐데. 생각보다 기억을 잃은

상황을 편히 여기는 것인가.

하긴, 평생을 억눌러 온 죄책감과 절망을 모두 잊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어디로 보나 에즈라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잘된

일이었다.

“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 너?”

이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것도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라고는. 심장을 파고드는 당혹감에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인

시프나드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새삼스럽게 그게 궁금해?”

“그거야 과거의 제가 궁금하지 않은 게 이상하잖아요. 게다가

지금 당장 기억이 떠오를 것 같지도 않고요. 적어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구, 궁금해요.”

“으음…… 너는 말이야. 엄청 활발하고, 매일 싱글벙글 웃고

다니고, 사람들이 모두 너를 좋아하고, 사람도 잘 따랐어.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좋아했지.”

“제가 그, 그쪽을요?”

“왜? 못 믿겠어? 기억 안 나? 시프나드, 시프나드 하면서 매일

나 따라다녔잖아.”

“아뇨, 저는!”

“속상하다. 진짜.”

그가 상체를 훅 들이밀며 귓가에 야릇하게 속삭였다. 자신이

그랬단 말인가! 깜짝 놀라 이불자락을 꼭 움켜쥐는데 그것을

발견한 시프나드는 곧 하하하. 크게 웃으며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배고프지는 않고?”

능숙하게 말을 돌리자 에즈라는 눈치를 보면서도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제대로 요구하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모습.

“아직 환자니까 조심해야지.”

에즈라가 침상 위에서 몸을 움직거리자 시프나드는 에즈라를

훌쩍 안아 들었다. 서슴지 않고 닿아 오는 접촉에 놀라 그의 목을

꼭 껴안자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원래 그렇게 잘 웃어요?”

“네 앞에서만.”

그가 짐짓 진지한 태도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성의 진득한

시선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시종일관

하얗게 질려 있던 두 뺨에 홍조가 떠오르자 시프나드는 또다시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여기 앉아있어.”

그는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에즈라를 내려 준 두1.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 찬장을 뒤적거렸다.

“시프나드,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쪽은 저한테 뭐였나요?”

대답이 두려워 미루고 미루던 물음.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에즈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뒤돌아 한참 무언가를

찾던 그가 움직임을 멈춘 것도 그때였다.

시프나드는 허공에서 손을 거두고, 아주 느리게 뒤를 돌아

의자에 앉아 있는 저와 눈을 맞췄다. 아득하고 깊은 눈동자.

저곳에 빨려 들어가면 새까만 꿈을 꿀 것만 같다.

“너한테 내가 뭐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고. 나한테

너는……”

그가 말을 고르는 것이 수천 년처럼 느껴진다.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두 손을 꼭 말아 쥐는데 그는 픽,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내 부인이었지. 아주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데다가.

유능하고 또 조금은 잔인한.”

“잔인해요? 잔인했나요, 제가?’’

퍽 충격적이었는지 에즈라가 어깨를 잘게 떨자 시프나드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상한 오해 하지 마. 네가 닭을 잘 잡았거든. 그뿐인가? 생선

대가리를 날려 버리는 것에도 유능했어.”

그런 뜻이었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마음 한 켠이 불편한

건 왜일까. 에즈라는 묵직한 눈꺼풀을 문지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앉은 적막 속에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음만 울려

퍼졌다.

불편한 침묵은 시프나드가 수프를 가득 떠 온 후에야 끝이

났다. 에즈라는 들이밀어진 소고기 수프와 앞에 자리한 채 턱을

괸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스푼을 들어 수프를 조금

떠먹었다.

“맛은 어때?”

“음, 맛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에즈라는 입맛이 도는지 수프를 떠먹는 손이

조금 더 발라졌다.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시프나드가

괜스레 발끝으로 에즈라의 다리를 툭 건드리자 에즈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한다.

“장난이야, 먹어.”

“……네.”

아아, 하늘이 저를 이토록 도울 줄이야. 그는 너무도 재미있게

돌아가는 상황에 휘파람을 불고 쾌재를 내지르고 싶었으나 꾹꾹

감정을 내리눌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가 내미는 음식을 덥석덥석 잘도 먹는다.

검은 속내도 모른 채 순진한 얼굴로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는

모습이 기꺼웠다. 그는 여자의 둥근 머리통에 손을 뻗었다.

자신의 손길에 잠시 멈칫한 에즈라는 눈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에즈라는 그가 긴

머리칼을 쓸어 주자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피하지 않는다. 조금 어색해하지만 경계는 누그러졌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 준다 해도 낯선 이의

말을 철석같이 믿다니. 수많은 일을 겪기 전 여자의 타고난

성품은 원래 이러했을까.

뭐가 됐든 좋았다. 품 안에 날개 꺾인 작은 새가 날아든 것만

같아 그는 진심으로 웃었다.

히폴로테스가 의도한 대로 황비에 대한 소문은 제국 전체에

퍼져 나갔다. 황성에서 쫓겨난 황비. 그리고 그녀에게 위해를

가한 잔당을 소탕했다는 것까지는 완벽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한 소문이야말로 더욱 빠르게 번졌다.

“자네 그거 들었나? 황비님이 실종되었다네.”

납작한 모자를 눌러쓴 손님 하나가 내밀어진 과일을 받으며

은근히 귀엣말을 하자 상인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하루 온종일 손님이나 방물장수나 할 것 없이 입을 놀려

대니 귀가 없어도 귓구멍이 뚫릴 판이야.”

“근데 그거 진짜인가? 내가 또 다른 이야기를 들었거든. 사실은

실종이아니라……

“실종이아니면?”

여직 가판대 앞을 서성이던 손님이 말을 늘이자 거스름돈을

내밀던 상인은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죽었다는 소문이 있어.”

“죽었다니! 나 참, 그럴 리가 없잖은가. 저렇게 병사들이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황비님을 찾아다니는데! 누가 보기라도 한

건가?”

상인이 턱 끝으로 가리킨 곳에는 완전 무장을 한 병사들이

지나가는 젊은 여인들을 붙잡으며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잡힌 여인들은 반항하지 않았으나 거북한 티를 아예

감추지는 못했다.

“그거야 대충 찾는 척하다가 곧 그만두면 될 일이지. 황제가

황비를 등한시했다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리 찾아다니니…… 마치 이미 없는 사람. 어차피 찾지 못할

테니 마음 놓고 들쑤시고 다니는 것 같단 말이야.”

조심스러운 속삭임에 상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내

콧잔등을 찌푸린 그는 허! 코웃음 치며 두툼한 입술로 대꾸했다.

“이 사람이! 소름 끼치는 이야기 그만하게!”

부정 탈 것 같은 기분에 상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팔뚝을 마구

문질렀다. 상기된 표정의 손님은 머쓱한지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손님이

멀어져 가자 상인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여자들을 샅샅이 살피는

병사들을 흘깃거렸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 무표정한 병사들의 손아귀에는 낯선

여인이 그려진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지금 보니 사실 따지고

보면 손님의 말이 아예 횐소리는 아니다. 저 같은 평민들이

황비의 얼굴 한 번 볼 일이 있겠는가. 으레 그러하듯 그렇다니

그런 줄 알고 살아가는 것이지.

만약 손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낱 여인에게 퍽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섬뜩한 기분에 뒷목을 두어 번 문지른 상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설 뿐이었다.

수도나 주변 마을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요 병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좁은 협곡을 빙글빙글 돌고 또 돌았다. 어느 날은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맑게 갠 하늘 아래 뙤약볕이 내리쬐기도 하며,

사시사철 그늘진 곳에는 미끌미끌한 이끼가 끼어 밟고

넘어지기도 일쑤.

그러나 그들 모두 참담한 얼굴로 눈치만 볼 뿐. 불평 한마디

조잘거릴 수 없었다.

눈에 핏발이 선 황제가 돌무더기 사이 하나 지나치지 않고

샅샅이 뒤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비를 찾기 위한 대장정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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