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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59화 (59/113)

59화

동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깊은 협곡을 따라 강이

흐르는 산은 험했고. 없다시피 한 흔적을 따라 여기까지 찾아온

것만 해도 어떻게 보면 하늘이 도운 일이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작게나마 물이 튀어 오르는 소음이

들렸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고 강물에 빠졌다면 당장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터.

히폴로테스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악문 채로

내뱉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이 얼굴 구경하려고 한 짓이지.”

여유가 없는 것은 저뿐인 듯 시프나드는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휘며 여전히 생글거렸다.

“잘나신 황제의 애타는 얼굴 말이야.”

“그래서, 맘에 드나?”

“완전. 생각보다 더 볼만해.’’

히폴로테스는 이어지는 대거리에 초조함을 감추려 애를 썼다.

평소라면 사사로운 감정 따위 내비치지 않았을 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정을 유지하기가 버거웠다.

에즈라를 살리려는 이유도. 그것도 모자라 죽기라도 할까 봐

심장이 내달리는 이유도. 알고 싶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비에게 잘 좀 대해 주지 그랬어.

슬럼까지 소문이 쫙 퍼졌다고. 망국의 포로 출신인 황비는

마녀다, 황제에게 버림받아 미쳐 버렸다. 뭐, 여러 가지가 있긴

한데. 다들 황비를 두고 내기를 해. 머지않아 황성에서 쫓겨날

거라는 데에 많은 이들이 푼돈을 걸었지. 그런데 나는 아니다에

걸었거든.”

“미천한놈과 달리 내가 좀 바빠서. 주절거리지 말고 비켜.”

“어떤 사내놈이 혐오하는 여자를 곁에 두는 것도 모자라

밤마다 찾을까.”

“사내는 그냥 사내지. 고상하신 황제라고 다를 것 있나.”

시프나드는 대놓고 도발하고 있었다. 검은 속내를 드러내는

남자를 보며 조소한 히폴로테스는 잡고 있던 검을 비틀어 쥔 후

날을 겨누었다.

“죽기 전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구구절절 말이 기네.”

“손아귀에 있을 때는 굳이 거들떠보지 않다가도, 누군가 제

것에 눈독을 들이면 움켜쥐고 속박하는 게 사내 아니겠어? 나는

이해해.”

“부러워?’’

“음……그렇다면?”

슬쩍 떠본 말에 시프나드의 얼굴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것도 정도가 있지. 명백히 선을 넘은

반응에 칼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상대해 줄 시간 없으니까 닥치고 꺼져.”

“그렇게 쉽게는 못 가지.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데.”

일각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는 쉽사리

비킬 기미가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 휘둘리기는

싫지만, 히폴로테스는 자신이 있었다. 감히 제 것을 넘보는 놈을

갈가리 찢어 버릴 자신이.

“그 칼, 빗나가지 않는 칼이라며?’’

시프나드가 들고 있던 칼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려가던

그때였다. 냉담한 표정의 히폴로테스는 엄청난 빠르기로

시프나드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쨍, 날붙이가 첨예하게

맞닿는 소리가 동굴 안을 크게 울린다.

시프나드는 코앞에서 고개를 기울이는 히폴로테스를 당황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도 그럴게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당할

뻔하지 않았나. 겨우겨우 막아 낸 칼날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듯 더욱 저를 밀어붙였다.

발끝이 질질 밀려나던 시프나드는 곧 히죽 웃어 보이며 칼날을

빙글 돌렸다. 칼날이 떨어지자마자 가벼운 몸놀림으로

히폴로테스의 목을 겨누었으나 그는 몸을 조금 물려 공격을 피한

후 자세를 낮추었다.

틈을 내주고 말다니.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시프나드는

아슬아슬하게 칼을 쳐 냈으나 완력을 이기지는 못했다. 뒤로 구른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숨을 골랐다.

격렬한 대치에도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히폴로테스는

천천히 칼끝을 들어 시프나드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매력적인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더니 이윽고 그는 칼을 반대로 돌려 쥐었다.

“ 젠장.”

어디로 향할지 가늠할 수 없는 무식한 궤적. 히폴로테스가

시프나드를 아래로 내려찍자 시프나드는 두 손으로 칼을 들어

방어했지만 그뿐이었다. 두 팔의 힘으로 히폴로테스의 칼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건만. 히폴로테스는 여전히 한 손으로 그를

짓눌렀다.

“……황제답지 못한 칼질이네.”

“너는 시원찮은 칼질이고.”

히폴로테스의 비아냥에 시프나드는 처음으로 여실히 분노를

내비쳤다. 턱이 부서져라 이를 갈며 몸을 일으킨 그는 반격하기

위해 칼을 떼어 내려 했다. 날이 맞닿은 채로 대치가 길어지자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칼끝이 진동한다.

“생각보다 기대 이하라 되게 재미없다.”

히폴로테스의 허심탄회한 중얼거림에 두 눈을 크게 뜨던

그때였다. 히폴로테스는 재빠르게 시프나드의 배를 발로 걷어찬

뒤 가볍게 도약했다. 예상치 못한 육탄전에 뒤로 넘어간

시프나드는 자신을 뒤로하고 내달리는 남자를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히폴로테스는 칼을 놓친 시프나드에게 한 자락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결투다운 결투로도 치지 않는 것이다. 당혹감 뒤로

자존심이 부득부득 갈려 나가는 것만 같다.

“히폴로테스!”

시프나드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뒤로한 히폴로테스에게 칼을

던졌으나 그의 마지막 공격은 허무하게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기다란 칼은 동굴 밖에서 하릴없는 나뭇잎처럼 내려앉을

것이다.

칼을 내던진 그때. 살짝 어깨를 틀어 묵직한 칼을 피하던

모습이 선명하다. 상대의 공격을 모두 꿰뚫고 있던 것도 모자라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도록 자신의 공격은 철저히 숨겼다. 혈육을

모두 죽인 놈이라더니, 그는 확실히 타고난 칼잡이였다.

“아, 진짜 쪽팔리게.”

이리 쉽게 제압당했으니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킥킥거리며 머리칼을 헝클이던 그는 단숨에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늘이 진 남자는 물기 어린 바람이 들어차는 동굴

안에서 퍽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망설임 없이 동굴 밖으로 뛰어든 히폴로테스는 곧 강물 속으로

파고들었다. 묵직한 첨벙임과 함께 그는 푸르스름한 물속을

유영했다. 깊게 빠진 데다가 유속이 빠른 터라 물 위로 올라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최대한 빨리 숨통을 튼 후,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쓰러진 나무라도 보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사방은 울렁이는 강물뿐이어서…… 온몸의 피가 싸하게 식는

것만 같아.

“에 즈라!”

“에즈라, 대답해!”

남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몇 번이고 여자의 이름을 외쳤다.

내지르고 또 내지르는 음성은 곧 절박함에 이리저리 갈라졌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제발 대답해! 있으면 대답하라고!”

“……에즈라!”

제발.

히폴로테스는 세찬 물살을 따라 내려가며 에즈라의 흔적을

찾고 또 찾았다. 허나 아무리 내려가도. 자리에 멈춰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사위는 고요했고, 오로지 물살이

떠내려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에즈라.”

아아, 그러고 보니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에즈라는 물속에서

헤엄을 치지 못하는 데다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 어찌

보면 살아 있을 확률이 현저히 낮았다. 그런데도…… 참

이상하게도 포기할 수가 없다.

이미 늦은 게 분명한데. 왜 나는 이 물속을 빠져나갈 수 없는

건가. 아래로, 아니면 저 위로 어떻게든 비집고 가서 너를 찾고

싶은 걸까. 죽여야 한다면서, 언제는 죽어도 상관없다면서.

아니,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면서. 왜 나는 네 이름을 이토록

절박하게 부르고 있는 거야. 대체 왜.

‘제가 월 하면 되나요? 뭐든 할게요.’

‘혼자두지만 말아주세요.’

이런 꼴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다. 성공에 취해, 성공을 위해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거들떠보지 않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겁에 질린 아이처럼 너를 부르고 있다는 게.

유속에 몸을 맡긴 채 떠내려가던 히폴로테스는 곧 수면 위로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고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가워야만

하는 물이 미적지근하다. 강물인데도 바닷물처럼 조금 짭짤한 것

같기도했다.

문득, 굳게 잠가 두었던 기억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수양버들 나뭇잎을 쓸어내리던 여자와 허름한 나룻배.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던 뜨뜻미지근한 바람.

손을 내밀었더니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덥석 잡았더랬다.

그게 못내 거슬렸다는 걸, 너는 알까. 나를 올곧은 눈으로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믿어 주던 네가 불편했어.

놀리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속이는 대로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는 것도. 아무에게도 잘 보여 주지 않는

웃음을 내게는 쉽게 보여 줄 때도.

네 나라를 부수고. 네 혈육을 참혹하게 죽이고, 거짓으로 너를

기만한 내게 사랑을 말하던 네가 점점 두려워졌다면. 너는

믿을까.

“……에즈라.”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렇게 물에 빠졌었다. 그때 너는 아이처럼

엉엉 울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구명줄을 붙잡듯 내 목을 꽉

껴안았었지. 눈물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고 또 깜빡이며 눈물을

쏟았어.

“물을 무서워했는데.”

‘묻은피가……다 지워질 거예요.’

말을 전한 이가 사라져도, 잊히지 못할 말이 머릿속을 떠돈다.

묵직한 통증은 가슴에서 목울대까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갔다.

영원한 것은 죽음뿐이다. 그러니 남은 이들에게 죽은 이는

영원으로 남는 거야. 나는 네가 나의 영원으로 남을까 봐 두려워.

“에즈라……!”

너는 나와 함께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죽으면 나는 혼자만의 지옥에서 살아가야 하잖아.

“에즈라!”

좁은 협곡에 처절한 부름이 울려 퍼지고 또 퍼져 나갔다. 목이

쉴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헤엄을 치다가. 부르짖다가. 또

헤엄을 치며 여자를 미친 듯이 찾아 나갔다.

차가운 물에 몸이 얼얼해져도.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아 눈앞이

깜깜해져도. 그는 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치미는

분노에 미친 듯이 물을 내리치고 또 내리치며 발버둥 쳤다.

분이 풀리지가 않아서.

“에즈라! 제발!”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쓸어 담을 수도 없어서.

“에즈라, 에즈라, 에즈라!”

고개를 숙인 그는 이내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 밖으로 내쫓지 않을게. 그러니까제발 나와.”

대답은 없었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이용하지도 않을게. 어차피 너 같은 거…… 더 이상

쓸모도 없단 말이야!”

치미는 울화를 토해 낸 남자는 결국 큼직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죽을지 몰랐단 말이야.”

살아서 나와 지옥 같은 삶을 함께 견뎌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당연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다는 거 잘 알면서.

“죽지 마. 제발…… 나타나 줘.,’

들이닥치는 절망을 감당하기 힘겨워서일까. 그는 기운이 잔뜩

빠진 채로 조금 헐떡였다. 마음을 할퀴고 버려두었던 날들을

머저리처럼 곱씹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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