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너희는 남아 상황을 수습해. 시체는 태우고, 남은 인질은
빠짐없이 데려다 놔.”
“……예!”
혼자로도 괜찮은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히폴로테스의
뒷모습을 살피던 제논은 피떡이 된 머리칼을 마구 쓸어 넘겼다.
지치고 혼란스러운 탓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데몰레온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갯짓을
할뿐이었다.
“가자. 우리에게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 말하는 데몰레온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알잖나. 그리하시겠다면 막을 방법 따위는 없다는 거.”
“그래. 그렇지.”
홀로 돌아오시거나, 시체와 함께 돌아오시거나. 그가 멀쩡한
에즈라와 돌아오는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제논은 결국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그녀를 뒤로해야만 했다. 아주
지독한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떠안은 채로.
불시에 배를 얻어맞은 충격 때문일까. 잠시 정신을 잃었던
에즈라는 얕은 신음을 흘리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흐린 시야
사이로 어둠이 밀려들었다. 혼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는데.
여기는 대체 어디고, 시간은 얼마나 지난 것인가.
상념에 젖은 채로 상체를 일으키던 그녀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그대로 널브러지고 말았다.
“으윽”
“일어났어?”
낯설지만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공명했다.
귓가에 웅웅, 울리는 남자의 발소리가 터벅터벅 가까워져 왔다.
이윽고 엎드린 시야에 남자의 발치가 담겼다. 끝이 조금 닳은
가죽 샌들에는 이름 모를 이의 핏가루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누군지 안 물어보는 걸 보아하니. 내가 기억났나 봐?”
“아뇨. 아직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실망이야. 나는 너를 본 이후로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그 섬뜩한 말에 신경을 쏟기에는 통증이 너무 심했다. 한껏
긴장했던 근육은 뭉쳤고, 바닥을 구르다가 생긴 찰과상 또한 몸
이곳저곳에 가득했으니까.
“고개 좀들어 봐.”
“그게 좀, 아파서…… 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꿈틀거리는데 탄탄한 손이 다가와
양 팔뚝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제대로 았게 되었음에도 팔을
떠나지 않는 아귀힘과 전해져 오는 뜨거운 온기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은근슬쩍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동굴 입구를 곁눈질하는데
불쑥 남자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화들짝 놀라 돌처럼
굳어 버린 에즈라를 시프나드는 샅샅이 살피었다.
그러다가 마치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얻은 듯 그는 에즈라의
두 뺨을 손바닥으로 힘 있게 감쌌다. 졸지에 입술올 쪽 내밀게
된 모습에 수치심이 일었지만 반항은 무용할 터.
그제서야 에즈라는 자신을 납치한 남자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멋대로 기른 검은
머리칼이었다. 아무렇게나 구불거리는 제 것과는 달리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듯 결이 좋았다.
살짝 위로 올라간 눈꼬리는 날렵했고, 그 안의 눈동자는
밤하늘 같았다. 웃지 않으면 무심하고 사나워 보일
인상이었으나 그는 계속 싱글거렸다. 미묘하게 위험하고,
음산하지만 사람을 매혹시키는 싸늘한 눈으로.
그가 에즈라를 눈에 새기듯 에즈라 역시 그를 새겼다. 눈길이
입가에 닿았을 즈음, 그는 에즈라에게서 가볍게 손을 떴!다.
“우리 황비님 생각보다 되게 저돌적이네. 외간 남자 입술
보면서 침이나 삼키고.”
“제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세요. 그런 적 없어요.”
“맞아, 농담이었어.”
발끈한 게 무색하리만치 시원찮은 반응이다. 에즈라는
수치심에 달아오른 뺨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째서 저를 구해 주신 건가요? 혹, 히폴로테스 님을
따르시는 기사님이신가요?”
히플로테스. 그 이름이 거론된 순간, 잠시나마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자가 침묵하면 할수록 수명이 닳는 것만 같다.
잔뜩 긴장해 날을 세우는데 그의 어깨가 은근히 들썩이더니
파르르 떨렸다. 웃음을 꾹 눌러 참던 시프나드는 결국 크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하하하!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황비님, 이 험한 세상
풍파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지켜 주고 싶게.”
“그럼 대체 왜 저를 이리로 데려온 거예요?”
“그러게 말이야. 사실 나도 후회 중이야.”
무슨 말인가. 에즈라는 낮은 음성에 몸을 바짝 움츠리며
떨었다. 당장이라도 저 구석에 있는 칼을 잡고 자신에게
휘두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등 뒤가 식은땀으로 젗어들어
갔다.
“생각보다 너무 귀여워서 죽일 수가 있어야지. 내가 귀엽고
예쁜 거에 좀 약하거든.”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에이, 좋으면서 부끄러워하기는.”
맥이 탁 풀리게 만드는 장난스러운 어조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숨을 터놓는 에즈라에게서 시프나드는 눈을 떼지 못했다.
진심인가. 아니면…… 더 큰 계획을 위함인가.
이런 사람일수록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법이다.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처럼 경계심을 내비치자 시프나드는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
“그러니까 웃어 봐. 맘에 들면 살려 줄지도 모르잖아.”
한순간, 낮아진 어투로 죽음을 예고한다. 흥미로 번들거리는
새까만 눈동자는 오로지 진심만을 말하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두려움도 잠시, 에즈라는 이내 죽을힘을 다해 동굴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했다.
“움직이지 마. 이대로 목이 댕강! 잘리고 싶지 않으면.”
이미 모든 움직임을 계산한 듯 시프나드는 에즈라를 뒤에서
껴안은 채로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 버린 에즈라의 귓가에 그는 입술을 내려
속삭였다.
“너는 나를 잘 모르지만, 나는 너를 잘 알아 에즈라.”
“당신, 누구예요?”
“이 상황에서도 그게 중요해?”
“저를 죽일 건가요?”
담담하게 묻자 남자는 뒤에서 키득거렸다. 그가 칼을
목덜미에 더욱 바짝 가져다 대자 아릿한 통증과 함께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그렇게 죽고 싶은 얼굴을 하면
어떻게 해.”
“진짜 죽이고 싶어지게.”
기회만 엿보던 에즈라가 그를 밀어 내고 다시 한번 발버둥
치던 그때, 빛이 들어오는 동굴 입구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에즈라는 천천히 반항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와 있었다. 역광이 졌으나 인영만으로도 단번에
알아볼수 있었다.
“히폴로테스님……?”
히폴로테스는 에즈라가 아닌 등 뒤의 남자를 노려보기만
했다. 라티아의 탄일에 모습을 드러냈던 의심스러운 남자를.
미천한 놈의 이름이……
“뭐더라, 시프나드라고 했던가.”
“제국의 황제께서 천한 놈의 이름까지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남자는 예를 갖추기는커녕 명백히 비아냥대고 있었다.
“그보다 황제께서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고양된 표정의 남자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에즈라를
뒤에서 껴안은 채로 목에 칼을 겨눈 그가 몸을 일으키자 에즈라
역시 따라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움직인 칼날이
또다시 여린 살을 갈랐다.
“으옷!”
“어어, 미안. 피가 너무 많이 나네.”
고통 때문인지 두려움 탓인지는 모르지만 지금껏 참아 왔던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도톰한 입술을 꼭 깨문 채 흐느끼는
에즈라를 보며 히폴로테스는 늘상 가둬 왔던 살의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투명한 눈물이 남자의 손등에 떨어져 내리는 게 가장 싫었다.
가냘픈 어깨를 껴안은 두터운 팔도 잘라 내고 싶었다. 남자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에즈라의 목덜미에서 숨을 들이켠 순간,
그는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에즈라를 이리 내놔.”
“……이런.”
“죽여 버리기 전에;
죽여 버리기 전이라면서, 히폴로테스는 이미 달려든 후였다.
묵직한 칼날이 엄청난 빠르기로 다가오자 시프나드는 에즈라를
꼭 끌어안은 채 울퉁불퉁한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겨우 칼날을 피한 시프나드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히폴로테스가 또다시 검을 치켜드는 게 보였다. 비웃음을 걸친
시프나드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칼을 휘두르려는데 눈앞에
익숙한 향기가 훅 끼쳐 왔다.
검은 머리칼이 시야를 가리더니 뺨을 간질이고 지나간다.
급박한 상황을 눈치챈 히폴로테스는 날이 목을 파고들기
직전에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에즈라!”
“물러서 히폴로테스.”
눈앞이 하얘지더니 심장이 멎는 것만 같다. 아주 조금,
살짝만 더 힘을 주었다면 제 손으로 에즈라의 목을 날릴 뻔했다.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춘 히폴로테스의 검을 내려다본
에즈라는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용할 만큼 지쳐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그러게, 이건 너무 비겁한 악당 같아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여전히 에즈라를 인질로 잡은 시프나드는 느긋하게 동굴
입구를 향하며 싱글벙글 웃어 보였다. 약 올리듯 히폴로테스를
노려보면서도 늘어진 에즈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되게 재밌더라고.”
“대체 저한테 왜, 왜 이러는 거예요.”
“황비라면서 제대로 된 황비 대접도 못 받고. 불쌍하게도.”
“이거 놔, 주세요. 제발……
헐떡이며 애원하는 에즈라는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조그만 손이 구릿빛 팔을 감싸 쥐고 흔들기까지 한다. 저런
모습은, 얼굴은 자신밖에 모르는 것이어야 했다. 애원하고,
사랑을 구걸하고, 손을 뻗고, 또…… 감싸 안아 주는.
너는 나만을 위한 거잖아.
“어어, 진정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심상치 않은 히폴로테스를 감지한 시프나드가 살벌하게
경고했다. 그 역시 사냥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육식동물처럼
에즈라의 몸을 꽉 옭아맨 채였다.
“가여운 에즈라, 그렇게 괴로워할 거였으면 탈이 날 일을
하지 말았어야지.”
“저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결국 힘이 빠진 것인지 에즈라가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를 한
팔로 가뿐히 들어 올린 시프나드는 가슴팍에 에즈라를 기대게
한채로 물었다.
“사랑을 위해 나라를 무너뜨렸다며. 백성을 불사르고, 친족의
피로 목욕을 한 마녀라던데. 맞아?”
물음은 에즈라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고작 에즈라 하나
때문에 죽여야 하는 놈을 눈앞에 두고도 옴짝달싹 못 하는 내게
건네는 비아냥일 뿐.
“훌륭해. 되게 매력적이야. 내 이상형에 부합해.
그러니까……"
“윽, 이거 놔!”
“나랑 도망치자.”
가슴팍을 밀어 내는 조막만 한 손이 기꺼워 그는 진심으로
웃었다. 도망치자는 말에 우뚝 멎은 반항도, 조바심과 불안을
한껏 드러내는 남자도 볼만했으니까.
“저 새끼 말고, 이번에는 나를 황제로 만들어 보는 게 어때?”
좁은 동굴 안으로 바람이 들이닥쳤다. 습기가 가득한,
물비린내를 실은 바람이었다. 그 모든 것을 깨닫기도 전에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히죽거리는
남자의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오
“잘해 줄게, 웅?”
그 속삭임을 끝으로 남자는 잡고 있던 어깨를 놓았다. 툭,
어깨를 떠미는 손을 멀거니 내려다보던 에즈라는 곧 하늘을
눈에 담았다.
동굴 밖으로 밀쳐진 건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고. 오로지 붕 뜬 기분만이 머리를
잠식했다.
“에즈라!”
늘 그리워하던 이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그토록 바라던
어둠이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