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에즈라가 일순 눈을 치떴다. 얼핏
광기가 비치는 눈동자에 분노와 살의가 넘실거렸다. 에즈라는
입술을 터져라 내리 물며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분명 죽어 마땅하지만 죽어서는 안 되었다. 평생 속죄하지
못할 죄를 지은 주제에 죽음으로 도망치는 건 비겁한 일이니까.
내겐 삶도, 죽음도 지옥이여야만 하니까.
“셀리, 도망가.”
“에즈라 님!”
“어서 가! 명령이야.”
셀리의 말을 끊은 에즈라가 살수를 있는 힘껏 노려보자 그는
우습다는 듯 킬킬거렸다. 그 틈에 자리에서 일어선 에즈라는
바닥에 뒹굴던 단도를 향해 은근히 손을 뻗었으나 움직임을
귀신같이 알아챈 살수는 그것을 발로 차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어딜!”
“0 으 |”
멈칫한 에즈라의 어깨를 살수는 사정없이 발로 걷어찼다.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넘어진 에즈라의 위를 떡하니 점령한
그는 눈을 희번득 빛내며 미치광이처럼 외쳤다.
“같잖은 짓 하지 말고, 닥치고 죽어라!”
죽음이 드리운 순간은 모든 게 느리게만 보였다.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두터운 칼날을 타고 툭,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마저도. 도저히 피할 수 없어 눈을 질끈 내리감은 그때,
눈 깜짝할 새 다가온 커다란 그림자가 얼굴 위로 드리웠다.
“어이쿠.”
쨍, 내리찍는 칼날을 위로 올려 막더니 능글맞은 기합을
내뱉는다. 살수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뜨자 남자는 가벼운
몸짓으로 칼날을 위로 날려 버렸다. 마치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공중을 날던 칼은 저 멀 리 날아가 바닥에 퍽 꽂혔다.
“아니, 뭘 또 그렇게 괴물이라도 본 얼굴을 하고 그래.”
무기를 빼앗긴 살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확인하더니
크게 질려 털썩 주저앉았다. 으으, 겁에 질린 신음을 내지르며
몸부림치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앞을 지키고
선 남자는 분명 아는 이가 아니었다.
“나 참, 사람 민망하게.”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남자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칼을 휘둘렀다. 푹, 살과 살이 벌어지는 소리와 함께 살수는
배를 부여잡고 왈칵 피를 토해 냈다.
“아, 기분 더럽네.”
꽂아 넣을 때만큼이나 유려한 동작으로 칼을 빼낸 이는 피
묻은 손바닥을 털어 내더니 느긋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미명이
밝아 오는 새벽녘, 남자의 뒤로 해가 스물스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구세요?”
“……나 기억 안 나? 너무하네. 쉽게 잊을 수 있는 얼굴은
아닌데.”
새까만 동공이 머릿속을 꿰뚫을 것만 같다. 흥미에 젖은
남자는 아이처럼 즐거워 보였다.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를 망연하게 응시하던 에즈라는 몸을 떨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아주 기묘한 기분.
“에즈라 님! 어디 계십니까!”
온몸을 타고 흐르는 공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지 오래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제논의 목소리에 입을 떼려 했지만 남자가 더
빨랐다.
“미안, 지금 대답해 주기에는 내가 좀 급해서.”
“윽!”
믿을 수 없게도 남자의 발이 복부를 강타했다. 그는 엄청난
통증에 비틀거리는 에즈라를 자신의 널따란 어깨에 둘러멨다.
그 모든 행위는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고 능숙했다.
시프나드는 발악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늘어뜨린 에즈라의
둔부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그래. 착하다. 우리 황비님.”
장난스러운 어조였으나 두 여자의 움직임을 멎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시프나드는 입만 벙긋거리는 하녀를 시린 눈빛으로
쏘아본 후 미련 없이 숲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아, 안 돼. 에즈라 님 !”
공허한 터에 셀리의 찢어질 듯한 부름만이 울려 퍼졌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데몰레온과 제논이 셀리에게 달려왔으나
타인의 피를 뒤집어쓴 셀리만이 바닥을 기며 엉엉 울고 있을 뿐.
에즈라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허탈함 뒤로 분노가 끓어오르더니 눈앞을 붉게 물들였다.
성난 데몰레온이 달려드는 적들을 사정없이 베고 갈가리 찢어
버리며 피로 목욕을 하는 와중.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털어 낸 제논은 평온한 얼굴로 숨겨 두었던 연막탄을
빼 들었다.
전차에 붙은 불을 훔쳐 막 연막탄을 쏘아 올리려던 찰나,
제논은 쳐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릴 수밖에 없었다. 숲속 깊은
곳에서 숨죽인 채 기회를 엿보던 병사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히폴로테스 님?”
이름을 중얼거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와
데몰레온조차도 속인 그의 전략. 그는 단 하나의 표적을
사로잡기 위해서 아군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몰살당한
병사들의 사지가 피 고인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는 발밑에 채이는 몸뚱이를 멀거니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수많은 아군이 죽어 나가는 참혹한 아비규환을
구경하던 남자는 여느 때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나,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톡,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릿하게 닦아 낸 히폴로테스는 싱긋 미소 지었다.
마음이 이리 기껍고 가벼울 수가 없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뱀의 혀처럼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먼발치서 저를 바라만 보고 있는 제논과 데몰레온의 표정이 볼
만했다.
“……히폴로테스 님. 어째서 여기에 계신 겁니까? 아니, 대체
언제부터
“분명 저희가 황성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열 발자국을 남겨 놓고 멈추어 서자 두 사람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어느새 거세진 빗줄기는 피를 씻어 내려 주었지만
그만큼 비린내는 더욱 심하게 풍겼다.
“병사들은 이미 주둔시켜 놓은 상태였다. 뒷길이 조금
험하기는 하지만 홀로 말을 타기에는 어렵지 않거든. 나도 방금
전에 합류한 참이야.”
“원래 이리하실 작정이셨습니까?”
“그래.”
지나치게 단정하고 깔끔한 대답이다. 두 사람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싸늘하게 가라았은 제논과 달리 불같은
성격의 데몰레온은 거칠게 숨을 내쉬더니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희에게 언질해 주지 않으신 겁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군사를 푸셨다면 이런 참극은 막을 수
있었을것입니다!”
“그래서?”
전사의 원망 어린 눈에 핏발이 선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주군은 심지어 슬쩍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문득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저길 봐. 모든 건 계획대로 완벽하게 끝났어.”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두 사람의 등 뒤를 가리 켰다. 새파랗게
질린 채 겨우겨우 서 있던 그들은 천천히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진흙탕 싸움에 지쳐 버린 살수들은 힘 빠진 반항을
하다가 직접 혀를 물어뜯었다.
“웃기지 않나. 고작 개만도 못한 아브타크에게 충심을
지키겠다고 목숨을 끊다니. 저럴 바엔 너희가 죽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지칠 대로 지친 두 사람은 눈앞에 드리워진 장면에 결국 눈을
감았다.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와스터 기사들은 남은 살수들을
사로잡아 줄줄이 묶어 두었다. 죽음이 아닌, 고문을 기다리며.
“완벽하게 끝냈다. 고생했어.”
툭툭, 히폴로테스가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찬란하고 완전무결한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남자는
진정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가끔 이렇게 잔인무도한 모습을 발견할 때면, 쓰다 버릴
장기말처럼 이용당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들곤 했다.
“히폴로테스 님.”
“황비님의 행방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즈라?”
그제야 그녀가 생각난 것인지 히폴로테스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조차도 여유로운 모습에 제논은 점점 새파랗게
질려만 갔다.
“그러고 보니 병사들보다 뒤늦게 도착한 터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네. 에즈라는 어디에 있지?”
당연히 에즈라 하나쯤은 지켜 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이어지는 적막에 히폴로테스의 얼굴이 굳어 가더니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불안한 무언가를 아이처럼 외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희가 전차를 보호하라며 크게 소리치지 않았나?”
“예. 그랬습니다. 분명 황비님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의
병력으로 전차를 보호했습니다만……,”
데몰레온이 말을 늘이자 히폴로테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살벌해진 그의 심기를 피부로 느낀 데몰레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마른침 만 꼴딱 삼켰다.
“계속해. 듣고 있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히폴로테스 님. 황비님을 끝까지 지켜 내지
못했습니다.”
제논이 끼어들며 대신 답했다. 긴장한 게 역력한 두 사람을
뚫어져라 마주하던 히폴로테스는 남몰래 입 안을 깨물었다.
“무슨 말이지?”
“황비님을 곁에서 모시던 시녀의 말에 의하면 위협을 당하던
찰나,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황비님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라져?"
죽었다도 아니고 사라지다니. 냉혹함으로 무장한 가면에
쩌적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던 죽음의 냄새.
사방에서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습기, 시체가 타들어 가는 회색
연기가 한꺼번에 폐부를 파고들었다.
“어디로 사라졌냐고 물었는데.”
“그 시녀를데려와, 당장.”
“어디로 향했냐 재차 물었지만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다
그대로 혼절해 버렸습니다.”
평온한 숨결이었으나 그의 눈은 굶주린 짐승처럼 번뜩였다.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식혀야 한다.
그녀가 위험에 처할 수도, 최악의 상황에서는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고 내보낸 것도 아니지 않나.
모든 건 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니 더욱 자신의 반응이,
떨리는 손끝이 이해 가지 않았다. 지옥 속에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처럼 조급하고, 또 불안했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입술을 깨물거나 손톱을 물어뜯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온방향은 아닐 테니까.”
낮게 중얼거리기도 잠시, 그는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당황한 데몰레온이
멈칫거리자 히폴로테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크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