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제논은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는 듯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에즈라는 쉽사리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발끝만
옴짝거렸다. 그 꼴을 지켜보던 데몰레온이 분노에 어깨를
들썩이자 에즈라는 찔끔 어깨를 떨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무뚝뚝한 음성에 낯선 병사 두 명이 주저 없이 다가와 그녀를
구석으로 몰았다. 애처로운 눈으로 제논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가, 가려고 했어요. 반항하지 않아요. 제 발로 갈게요.”
잠시 주저했을 뿐, 결코 도망치거나 반항하려 한 건
아니었는데. 손을 내젓던 에즈라는 쭈뼛대며 걸음을 옮겼다.
데몰레온은 잠깐의 실랑이 끝에 다가오는 두 사람을
마뜩잖은 눈길로 쏘아보다가 이를 악물며 콧방귀를 뀌었다.
에즈라를 전차 위로 떠민 제논은 그녀의 양 손목올 전차
앞부분에 꽁꽁 묶었다. 따갑고 두터운 밧줄에 묶인 모습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보일 것이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묶다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비님을 어떻게 이리 대우하실 수 있는 건가요!”
옆에서 분개하는 셀리에게 버릇처럼 괜찮다 속삭이면서도
생기를 잃은 녹빛 눈동자는 허공을 떠돌 뿐, 절망 말고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이제 와 하등 달라질 것이 없다. 티텐에서도 와스터에서도
외력에 굴복하고 휘둘리는. 자유라고는 꿈꿀 수도 없는 비창한
삶은.
“이럇!”
모든 게 익숙해서 에즈라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새어
나오는 조소를 삼켰다. 어깨를 감싸 주는 셀리의 손길을
느끼기도 잠시, 전차는 야속하게도 굴러가기 시작했다.
한편, 황궁의 가장 높은 곳에서 집무를 보던 히폴로테스의
손이 돌연 멎었다. 언제부터였나. 글도 읽지 않고 아무것도 써
내려가지 않은 건.
눈앞에서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는
그제서야 느릿한 걸음을 옮겨 창문 가까이로 다가섰다. 별 하나
비치지 않았지만 전차와 그 앞에서 떠밀리는 여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지 않겠다 대거리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뺨을 갈겨 기를 죽여 놓아서인지 여자는
이상하리만치 초연했다.
또 사랑이니 뭐니, 하등 쓸모없는 감정을 붙잡고 늘어지는 건
아닐까 고민했던 게 우스운 만큼이나.
“이러려고 살려둔 모양이야.”
손톱만 하게 작아진 전차가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자 그는 조용이 읊조렸다. 이렇게 또 쓸모 있게 쓰일 줄은
몰랐기에 제 통찰력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헌데 그렇게 만족스럽게 웃다가도 끝내 단념한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끝까지 가고 싶지 않다고 매달리는 걸
지켜볼 수 있다고 은근히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뺨을 후려쳤던 손바닥이 불현듯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서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그래,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괴팍한 심술은 접어 두고
본궁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아브타크의 잔당을
처리했으니 어쩌면 라티아를 내쫓는 것까지 가능할 테고,
그러면 분명 좋아라 하겠지.
술술 풀려 갈 미래를 그려 보기도 잠시, 어째서인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그날이 감은 눈앞에 펼쳐졌다.
아지랑이 사이로 나풀거리는 해진 옷자락과 피가 튄 맨다리.
그 아래 상처투성이인 발. 빗물에 젖어 구불거리는 긴 머리칼이
출렁이다가 여린 몸이 휘청이던 그 찰나의 순간.
저지른 죄를 뒤로하고 감히 죽음을 택하려던 여자에게 손을
뻗은 건, 부여잡고 버림받은 아이처럼 매달린 건 왜일까.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한순간의 충동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가라앉은 기분에 금세 무표정해진 히폴로테스는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 검을 더듬었다. 손잡이 부근에 여전히
묶여 있는 단단한 매듭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막혔던 숨을
터놓았다.
‘기다리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죄악감을 부채질하는 여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사실 오지 않을 줄 알고 있었으면서.’
네 욕망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었잖아. 그러니 한 번 더
나를 위하는 것쯤은 네게 쉬운 일이잖아.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다고, 내 발아래 모든 걸 바치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건 비겁한 일이 아니잖아.
그는 이름이 새겨진 천 조각을 버릇처럼 쓰다듬고 매만졌다.
이미 해질 대로 해져 번쩍이는 검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것을.
사실 놓을 수 없어 붙잡았다. 마치 위로라도 되는 듯이.
황성을 빠져나온 전차는 이내 크게 진동하며 덜거덕거리기
시작했다. 모난 곳 없이 구획된 황성 안과 달리, 수도의 바닥은
이리저리 균열이 가 있었고 적지 않은 돌들이 전차의 바퀴를
긁어 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선득해진 날씨에 찬바람까지 휘몰아치니 에즈라와
셀리는 꽁꽁 얼어붙을 듯한 추위에 떨고 있었다. 서로 온기를
나누기도 지쳤는지 셀리는 결국 옴팡지게 주먹을 쥐고 외쳤다.
기사님!
“뭐.”
무시로 일관하던 데몰레온은 잔뜩 성질이 난 어조로
대꾸했지만 셀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에즈라
역시 몸을 일으켜 그를 흘깃거렸다.
“보시다시피 바람이 쌩쌩 불고 날이 너무 추워서요. 게다가
길도 험한 터라 황비님이 많이 지치셨어요. 갈 길이 머니
잠깐이라도 쉬어 가는 게……,”
“뭘 모르는군. 갈 길이 멀기에 쉬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전부터화를 억누르던
셀리는 데몰레온의 벼락같은 외침에 분노가 폭발했다. 아무리
에즈라 님께서 총애와 거리가 멀다 해도, 황비는 황비. 고작
기사 하나에게 무시당하실 분이던가.
전투적인 기세로 셀리가 무어라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쌩하니 날아온화살 하나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지나간 것은.
“바, 방금 대체 뭐가……"’
“젠장!”
허공을 가르는 살벌한 소음은 익히 아는 것이었다. 눈을
번뜩인 데몰레온은 급히 뒤를 돌아보더니 턱이 불거질 만큼
이를 악물었다. 덕분에 상황을 파악하기란 쉬웠다.
“위험하니 당장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십시오.”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마치 이리될 줄
알고 있던 사람마냥 대응하는 데몰레온을 보며 에즈라는
미간을 좁혔다.
“최대한 전차 주변을 지킬 테니 가만히 계십시오. 당신은 뭘
하든 방해만 될 테니 !”
말이 끝나기 무섭게화살 하나가 또다시 날아들었다. 휙,
소리를 내며 전차를 비켜 지나간화살은 숲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에즈라는화들짝 놀라 급히 몸을 낮추고 입을
틀어막았다.
멀리서부터 밀어닥치는 이들의 함성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윽고 날붙이가 맞붙으며 내는 굉음에 그녀는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땅이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진동했다.
하나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화살에 움찔거리기도 잠시,
이내 에즈라는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말을 탄
채로 전차를 따르던 제논은 에즈라에게서 눈을 돌려 앞뒤로
달려드는 살수들을 보며 수를 가늠했다.
밑도 끝도 없이 달려드는 살수들을 보아하니 인간 방패를
방불케 하는 무도한 전략을 쓴 것이 분명하다.
“데몰레온! 내가 전방을 막을 테니, 너는 후방을 맡아라.”
제논이 칼을 빼 들며 명령하자 데몰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사들을 지휘했다.
“너희는 나를 따라와 후방을 막는다. 남은 이들은 여기 남아
황비 님을 보호해라!”
“예!”
이미 수도와 꽤 멀리 떨어진 산의 초입이었다. 못해도 조금
더 좁은 길목에서 달려들 것이라 생각했건만, 넓게 펼쳐진
야트막한 언덕에서 습격을 받다니.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제논은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살수들의 공격을 막아
낸 후 반원을그려 둘을 베어 냈다.
잔뜩 뒤집어쓴 피를 훑어 내기도 전에 그는 달려드는 살수의
배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바닥을 구른 이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목을 찢으며 허리를 굽혀 뒤에서 휘두르는 도끼를 피했다.
공격 자세를 취하려는 살수의 복부를 가르자 울컥 피를 토해
내더 니 무기를 툭 떨구었다. 자비 없이 칼을 거둔 제논은 대강
머리를 쓸어 올렸다.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베고 또 베었지만 언덕을 둘러싼
숲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살수의 수는 어림잡아 백은 넘었다.
자신의 목숨을 방패로 내세우며 그들은 진격하고 또 진격했다.
물컹한 시체를 밟으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제논의 명령에 방패를 든 병사들이 전차를 둘러싸기 직전,
에즈라는 어둠과 안개를 뚫고 달려드는 살수들을 보고야
말았다.
뛰노는 말들이 시체를 짓밟고 지나갈 때마다 살이 터지고
우득우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싫다,
싫어. 고개를 마구 저어 대도 고통에 내지르는 울부짖음과
발악은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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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가득 퍼지는 피 냄새에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참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뇌수가 얼굴을 덮쳤다. 뺨을
타고 흐르는 병사의 살점은 뜨겁고 비렸다.
“꺅! 에즈라 님 !”
“뚫렸다! 어서. 어서 막아!”
한 병사가 쓰러지자 양옆의 병사가 공간을 메웠으나 빈틈
사이로 불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갔다. 전차에 하나둘
박히는화살을 보고 기겁한 셀리는 에즈라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기 위해 달려들었다.
“셀리 ! 몸을 낮춰 !”
밧줄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치열한 전투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훈련된 살수들은 병사 서넛의 힘을 발휘했고,
병사들을 손쉽게 도륙하며 에즈라가 탄 전차로 진격했다.
아무리 제논과 데몰레온이 힘써 막아 낸다 해도 수로 밀리니
방도가 없었다.
“데몰레온!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너는 전차로
가라!”
“아직은 안 된다! 나만 믿고 따라온 병사들을 모두 잃을 수는
없어!”
살수들에 둘러싸인 제논은 기다란 칼을 휘둘러 셋을 베어
냈지만 날아오는화살을 피하지는 못했다. 황급히 몸을
틀었으나화살은 기어코 팔뚝을 베고 지나간다. 설상가상으로
살수들이 앞뒤로 달려들었다.
목숨을 건 총력전.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오는 살수들은
모두 검은 두건을 쓴 채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훈련된 이들이다.”
머릿속을 꿰뚫는 깨달음에 제논은 피에 젖은 칼을 세게 말아
쥐었다. 전멸이 아니다. 이들의 목적은……오
“전차를, 전차를 보호해라!”
뒤늦게 외쳤으나 그 명령에 따를 수 있는 병사는 없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병사들은 결국 싱싱한 피를 내뿜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졌으니까.
“젠장, 전차를 보호하라니까!”
전차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자신을 대신해 마구 죽어
나가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덜 풀린 밧줄을
마구잡이로 뜯어낸 에즈라는 벌떡 일어나 피가 질질 흐르는
손으로 셀리의 손목을 잡아챘다.
“셀리, 어서 나가야 해!”
“하, 하지만 에즈라 님…… 기사님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어요.”
“아니, 도망쳐야 해.”
평소답지 않게 겁에 질린 셀리는 하얗게 질려 벌벌 떨고만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미 반쯤 죽어 나간
병사들과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꽃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 나간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에즈라는 셀리의 손목을 꽉 말아 쥔 두I,구르듯 전차에서
내려섰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질척한 핏물과 밀어닥치는
매캐한 냄새에 시야가 빙글 돌았다.
온몸으로 닿아 오는 열기를 느끼며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모골이 송연했으나 이럴 때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침착하려 애를 썼다.
우악스럽게 셀리를 잡아끌며 눈앞에 보이는 새까만 숲속으로
숨어들려던 찰나였다.
“아악!”
셀리의 비명에 뒤를 돈 에즈라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뒤를 보호하던 병사가 누군가의 창에 배를
관통당한 채 사지를 바동거리고 있었다. 고통에 젖은 기이한
얼굴. 뻐끔거리던 입술에서 피가 튀더니 결국 축 늘어진다.
“어, 어째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결국 다리에 힘이
빠져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겠다는 다짐이 힘없이
바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이들은 죄가 없다. 저 같은 것 때문에 죽어 나갈 이들이
아닌데. 겨우 나를 살리자고 누군가의 남편이, 연인이,
아버지와 자식이…… 죽었다. 그러니 진정 이들을 죽인 것은
저였다.
“내게 황비의 목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오다니 !”
쓰러진 시체에서 창을 빼낸 살수는 시체를 짓이기더니
위협하듯 창을 휘둘렀다. 그 탓에 날을 타고 흐르던 핏방울이
희멀건 얼굴에 흩뿌려졌으나 그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런 행운이 다 있나.”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살수의 눈꼬리가 천진하게
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