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펠릭스님!’
‘모두물러서라.’
펠릭스는 자신의 뒤에서 칼을 갈고 있는 병사들을 저지했다.
그는 처연한 눈동자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새파래진
병사들은 애가 달아 수선을 떨었으나 그는 여느 때처럼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나와 히폴로테스의 결투다. 그러니 이제부턴 그 누구도
끼어들어서는 안 돼.,
그 말은 곧 자살 선언과 다를 바 없었다.
‘다 덤벼도 모자랄 판국에. 형답지 않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히폴로테스는 짐승처럼 도약했다. 재빠른
움직임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펠릭스의 옆을 파고든
히폴로테스는 여유롭게 사선을 그었다. 얇은 날이 살을 가르는
감각과 함께 칼날이 스치자마자 피가 허공으로 튀며 그의 뺨을
적셨다.
타고난 움직임을 좇을 수 있을 리 없다. 또다시 코앞에 다가온
히폴로테스의 주먹이 배를 강타하자 칼 한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나동그라진 펠릭스는 고통에 바들거리며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그거 알아? 장자인 형을 죽이면 승리는 내게 기울 거야.’
반달처럼 휘어진 칼은 저처럼 망설이지 않는다. 정확히 목을
노리는 칼을 피해 펠릭스는 바닥을 굴렀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번엔 반대쪽 어깨에 섬찟한 통증이 일었다.
힘 빠진 두 팔은 무력해졌고. 어울리지 않게 큼직한 검은 툭
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파들거리던 펠릭스가 벌레처럼 바닥을
기자 히폴로테스는 그의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다.
그것도 잠시, 샐쭉 웃어 보인 그는 펠릭스의 얼굴을 사정없이
갈겼다.
‘ 욱!’
‘형. 안됐어. 가장 비천하다고 여겨지는 동생에게
죽임 당하다니.’
그 말을 끝으로 히폴로테스는 광기에 사로잡혀 펠릭스의 배를
짓밟고 온몸을 폭행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코뼈가 내려앉은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살과 피가 터지는 소음이
허공에 울려 퍼지자 그곳에 모인 모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무자비한 폭력에서 눈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분노가 자신들을 향할 것 같아 두려웠으니까.
‘비참하지? 비참하다고 말해! 나를 증오한다고, 혐오스럽다고!
영원히 나를 원망할 거라고!’
‘으으’
폭력은 펠릭스가 부러진 이를 뱉어 내고 나서야 멈추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인 히폴로테스는 시퍼런 기운이 흐르는
칼날을 세웠다. 그것이 막 가슴팍을 가르려던 찰나, 펠릭스는
입을 열었다.
‘그래. 되게 비참하다.’
부정확한 발음인데. 어째서 이토록 또렷한 걸까.
‘너를 증오해.’
복장뼈를 살짝 파고든 칼날이 답지 않게 머뭇거리자 펠릭스는
손을 들어 히폴로테스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천천히 힘을 주자
칼날은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그런데…… 원망은 못 하겠다. 그건 너무 사내답지 못한
일이잖아.’
결국 끝까지 밀어 넣은 칼을 타고 핏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부러 칼날을 비틀자 고통에 남자의 몸이 잘게 떨리더니 코와
입으로 왈칵 피를 쏟아 냈다. 금방 숨이 끊길 듯하면서도 인간의
생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싸늘하게 굳어 가는 커다란 손. 자신의 피를 잔뜩 묻힌 손등을
펠릭스는 위로하듯 툭툭 두드렸다. 증오한다고 말하면서,
비참하다면서 왜 그렇게 후련하게 웃는 건가.
혹독한 삶보다 죽음을 택한 펠릭스를 멍하니 바라보던
히폴로테스는 이내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허탈함이 온몸을
지배하더니 기어코 눈가가 뜨거워졌다.
‘무릎을 꿇어라.’
비틀거리며 일어선 히폴로테스는 수십 쌍의 눈을 둘러보며
일갈했다. 두려움에 굴복한 이들은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든 건 빠르고 쉬웠다. 어쩌면 자살을 택한 형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 이후, 다른 이의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게
되었으니까. 살육의 망설임은 꽉 쥔 주먹을 타고 흐르는
핏물처럼, 돌이킬 수 없는 죽음처럼 무용했다.
“……젠장.”
언제 잠이 들었던가. 단정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몸을
일으키자 푸른 여명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허전하고 공허한 방 안을 둘러보던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근래 신경 쓸 일이 많아 피곤하긴 했지만 정신 놓고 잠에
빠져들 줄이야. 그는 황당함에 머리를 조금 헝클이다가 마치
이끌리듯 다시 자리에 누웠다.
“으음……,”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자신을 등진 여자가 보였다.
살결이 닿는 거리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어색하지 않았다.
달빛에 반사된 하얀 살결에 자신의 흔적이 빼곡하다. 그는 헐벗은
여체를 은근한 손길로 쓸어내리다가 이불자락을 들어 드러난
어깨 위를 덮어 주었다.
“너무보고 싶어요.”
흐릿한 음성에 히폴로테스는 몸을 굳혔다. 잠시 그대로 멈춰
있던 남자는 손을 뻗어 등진 여자를 조심스럽게 돌려세웠다.
“아빠. 나도
동그란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과 선명한 눈물 자국.
얼굴과 목 부근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떼어 주던 히폴로테스는
은근슬쩍 여자를 제 가슴팍으로 끌어들였다.
모든 건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버리듯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데 이럴 때마다 이상하게 두고 갈 수가 없다. 감은 눈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에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거라면 성공했어.”
잠기운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자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는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 역시 보드라운 살결을
느끼며 빈틈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문득 고개를 내려 에즈라를 하나하나 눈에 담던 히폴로테스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평온을 좇았다.
“살고 싶어서 죽였더니. 죽고 싶어졌어.”
잠든 여자의 귓가에 진심을 토해 낸다. 구질구질하고 추악한
마음이 한낱 온기에 녹아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죽음을 택할 수 없는 건, 우습게도 내가 죽인 사람들
때문이야.”
그러니 나는 나를 증오하는 만큼 너를 증오할 수밖에 없어.
나를 용서할 수 없어서…… 너를 받아들일 수 없어. 너를 이
지옥으로 끌어들인 게 나인데도.
“이런 내가, 어떻게 나와 같은 너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그렇게 쉽게,
당연하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마.
그건 내게 당연하지도, 쉽지도 않은 일이어서.
“저, 히폴로테스님.”
어느새 눈을 뜬 여자를 눈에 담으며 힘 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낯선 얼굴을 한 남자는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꿈 아니에요? 정말 히폴로테스 님 맞아요?”
“ 대답해.”
단숨에 뒤바뀐 눈빛은 차디찼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보던
에즈라는 눈을 피하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제가 밉다고……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사실 다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서글픔에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고. 당신이 나만큼 불쌍해서 이리
안기는 것보다 당신을 안아 주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읽어 내려는 듯 뛰어져라 직시하던 그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가뿐해진 침상이 출렁이고, 널따란 어깨가
드러났다. 움직임에 따라 단단하게 박힌 근육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자 에즈라는 고개를 슬쩍 숙여야 했다.
“재밌네. 쥐새끼처럼 이런 거 훔쳐 읽는 재주도 있고.”
“ 네?”
살벌한 비아냥에 고개를 쳐든 에즈라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팔랑이는 양피지를 발견하곤 싸하게 식었다. 어느새 침의를 걸친
히폴로테스는 조악한 테이블 앞에서 라티아가 남기고 간
양피지를 즐거이 읽어 내려갔다.
“맞아. 이랬던 때가 있었지.”
“라티아가 내 글씨를 좋아했거든. 단정하다는데…… 뭐,
진심인지는 모르겠고.”
과거를 반추하던 남자는 킥킥거리다가 먼지를 털어 내듯
양피지를 떨구었다. 팔랑거리며 바닥에 내려앉은 그것을 그는
망설임 없이 즈려밟았다.
“떠나기 전까지 잘 정리해. 쓰레기 같은 건 잘 태워 버리고.”
“저, 꼭 가야 하나요?”
수십 번의 고민 끝에 내뱉은 물음이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문에 다가서더니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애가 탄 에즈라는 구르듯 달려 겨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지만 그만큼 간절하니까.
“안가면 안될까요?”
죽어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조각상처럼 굳은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무감하고 또 무표정할 뿐. 손을 내어 잡으면
저조차도 얼려 버릴 듯 시려웠다.
전해져 오는 싸늘함에도 에즈라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아예 없는 듯 여기셔도 좋아요. 그, 그냥 궁 안에만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이제 여기가 아니면 갈 데가 없는데.
“ 비켜.”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그가 대꾸하자 에즈라는 더욱
간절해졌다. 그의 만면에 성가심이 잔뜩 묻어 나왔으나 매달리고
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무언가를 원하지도 않을 테니까
버리지만 말아 달라고.
혼자 두지만 말아 달라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한 치의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무심한 손찌검이 날아든 것은. 퍽. 소리와 함께 뺨에 불붙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아……,”
우악스러운 힘에 풀썩 쓰러진 에즈라를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머리가 울려 어지럽고 멍한 탓에 뺨만 감싸 쥐고 있는데
그는 가냘픈 두 다리를 사정없이 밀어 낸 후 문을 열어젖힐
뿐이었다.
“두 번 다시 내 앞을 막지 마.’’
그나마 남아 있던 동정마저도 활활 타오르는 분노에 재로 남아
스러졌다. 안 그래도 성공적으로 끝마쳐야 할 일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건만. 고작 사랑 따위에 죽네 마네 하는 여자를 기꺼이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감정을 돌아볼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자리를 지켜 내야 했고, 칭송받는 황제로 남아야 했다. 그래,
그렇게라도 죄 짐을 덜어야 했다.
별궁의 숨겨진 통로를 따라 밖으로 걸음한 에즈라는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슥한 기운이
사방에 감도는 밤. 어찌나 안개가 짙게 꼈는지 둥근 달은 자취를
감췄고, 들이켜는 숨마다 목구멍에 턱턱 막혔다.
떠나는 날마저도 제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아 어쩐지
허탈한 웃음이 났다. 처진 어깨는 마치 돌덩이가 짓누르기라도
하듯 무거웠다. 셀리가 둘러 준 망토를 더욱 세게 여미며 입술만
잘근잘근 깨무는데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셀리가 조심스레
손을 잡아왔다.
“에즈라 님, 괜찮으세요?”
괜찮은 걸까. 늘 괜찮다 말하는 이가 대답하지 않자 셀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에즈라는 그저 느리게 눈을 끔뻑일 뿐이다.
“나 때문에 셀리 너까지 궁을 떠나게 해서 미안해.”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셸리가 단호하게 대꾸하자 에즈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듣는
귀가 있나 없나, 잠시 눈치를 보던 셀리는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사실 이런 말씀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차라리 이리되어서 황비님께는 다행인 일 아닌가, 그리 생각해요.
히폴로테스 님 때문에 이런저런 험한 꼴 당하시는 거. 더는 보기
싫어서요.”
셀리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리 살 바에는 차라리 그를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언젠가 그리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끝이라는 걸. 이 길을 끝으로 그에게 나는
하등 쓸모가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떠남으로써 그에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괜찮다고 나를 위로하면서.
“아! 마침 오네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약한 말 울음소리가 울려 펴졌다.
어렴풋한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새까만 말은 여유롭게
다가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멈추어 섰다. 제논과 데몰레온은
에즈라의 앞에 가까이 다가오더니 말에서 내렸다.
“전차에 오르시지요. 제가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어째서 병사들이 이렇게 많은 건가요?”
“황비님을 바짐없이 호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이상하리만치 병사들의 수가
많았다. 말을 탄 기사들과 완전 무장을 한 보병들이 마차 뒤로 줄
지어 있다니. 버려진 황비의 요양길이 이토록 비밀스럽고 만전을
기해야 할 일이란 말인가. 본능적인 불안감에 문득 식은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