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에즈라는 침실 밖에서 알려 오는 병사의 목소리에 어깨를
굳혔다. 노곤함은 어디 가고 앞섶을 쥐고 있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또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온 것일까. 꼴깍. 마른침을 삼킨
에즈라는 그 자리를 빙빙 돌다가 겨우 대답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채비가 끝나지 않아서요.”
“셀리를들일까요.”
“아뇨. 저 혼자도 괜찮아요.”
대화가 끝나자 두터운 문 너머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작게
웅얼거린다. 오가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라티아에게는 퍽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터. 에즈라는 급히 잡히는
키톤을 걸치고 어깨를 피불라로 고정하려 했다.
다급한 데다가 긴장 때문에 자꾸 손이 헛나갔다. 조급함에
입술을 마구 짓씹던 에즈라는 엉성하게나마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키톤 자락까지 단정하게 정리한 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들라 하세요.”
“예.”
이윽고 황금 무늬가 빼곡한 문이 양옆으로 열리더니 그 사이로
말끔한 여자가 다소곳이 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화려하게
치장한 라티아는 더욱 고매하게만 보였다. 순수 황금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그 아래서 하늘거리는 옷감은 귀한 신분을
강렬하게 나타냈다.
풍성한 금색 머리칼과 구슬 같은 푸른빛 눈동자. 어디로 보나
당당하고 기품이 흐르는 모습에 에즈라는 버릇처럼
움츠러들었다. 볼품없는 단출한 키톤이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이었으므로.
“이리 경우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에즈라 님.”
“아뇨. 저야말로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왔으니 당연한 일인걸요.”
살벌한 말을 주고받던 날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라티아는
그전과 다를 바 없이 에즈라를 대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더
유해지고 기쁨에 젖어 반들거리는 게 꼭 좋은 일을 감추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 앉으시겠어요?”
“감사하지만 그보다 먼저 준비한 것들을 들여도 될까요?’’
“준비요?”
에즈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라티아는
청아한 그녀를 보며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뭣하고 있니. 어서 옮기지 않고.”
“ 예.”
라티아의 명령과 함께 여종들이 하나둘. 침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품 안 가득 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았다.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보석함을 세 개나 들여놓은 후에야 그들은 흔적도
없이 물러났다.
"저게 다 뭔가요?”
“아쉽게도 황성을 떠나시는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잖아요.
조금이나마 성의를 보여 드리는 게 옳을 것 같아 준비해
보았답니다.”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라티아의 웃음 한 점에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저를 위해서요?”
“그럼요. 부디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요.”
“아, 아뇨. 생각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걸요. 뭐든 마음에
들어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뺨을 붉히는 꼴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눈앞에서 손사래를 치는 에즈라를 날카로운 말로 할퀴고 아픈
곳을 쑤셔 대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히폴로테스에게 버려진 여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들어 죽어 갈 여자에게 모멸감을 선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라티아는 서글픔과 아쉬움이 담뿍 묻어나는 손길로 에즈라의
손등을 토닥였다.
“너무 실망하시지도, 가슴앓이하시지도 마세요. 어차피 이리될
일이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표독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라티아는
눈꼬리를 휘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급격한 온도차에 얼어붙은
에즈라는 입술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히폴로테스 님께서는 매일 밤,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신답니다. 황비님과의 잠자리가 끝나신 후, 초췌하신 얼굴로
돌아와 제 품에서 안정을 찾으시죠. 아시다시피 그분께서는
의무에 충실하시고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니까요.”
황제라는 지위에 걸맞는 행보로 흔들림 없이 걸어 나가는 남자.
그에게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의무적인 잠자리일
뿐이라고. 라티아는 그리 못 박고 있었다.
“그저 해 드릴 수 있는 게 따뜻한 품을 내드리는 것밖에 없어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는데. 히폴로테스 님을 생각하면 백번이고
다행인 일이죠.”
몰려드는 스산함에 팔뚝을 쓸어내리던 에즈라는 오만하게
저를 깔아뭉개는 라티아와 눈을 맞추었다.
“그럼, 저는 드릴 것을 드렸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선물은 제
정성이니 부디 받아 주세요.”
무어라 대꾸할 겨를도 없이 라티아는 뒤를 돌아 당당하게
문턱을 넘었다. 그녀가 꽤 멀어지고 나서야 문밖에서 눈치만
살피던 셀리는 급히 뛰어 들어와 발을 동동 굴렀다.
“죄송합니다. 에즈라 님. 제가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었는데……면목 없어요.”
아니라고. 너는 잘못이 없다고 그리 대답해야 하는데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눈앞이 빙글 돌았다. 에즈라는 셀리를 지나쳐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떨리는 손으로 하나둘, 보석함을
열어 보자 뒤늦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래요? 어쩜 이렇게 경우 없는 짓을!”
끝내 보석함을 모두 열어 본 셀리는 통탄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노를 터뜨리기도 잠시, 에즈라의 안색을 살피던 그녀는
가라앉은 주인을 대신해 울먹였다.
그동안 에즈라는 텅텅 비어 있는 세 개의 보석함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세 번째 보석함에
덩그러니 놓여진 양피지 하나. 에즈라는 손을 뻗어 낡아 버린
서신을 주워 들었다. 허탈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보아서는 안 될 비밀을 손안에 쥔 듯 두려움만이 가득했기에.
조금 낡았지만 와스터 제국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힌 것은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짐작케 했다.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저 않고 보석함을 열었던 것과 달리 좀체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직 복잡한 단어는 다
익히지 못했으니까.
그리 자신을 위로하며 드러난 글자를 천천히 손으로 짚어
나갔다.
[내겐 당신뿐이에요. 그 사실을 부디 의심치는 말아 줘요. 나는
그 여자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하는 것뿐. 단 한 순간도 진실로
사랑을 속삭인 적은 없으니까요. 나와 다를 게 없는, 아주
잔인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는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겠어요.]
[라티아, 아마 당신같이 순결하고 피에 젖어 본 적 없는 여자는
모를 거예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더러운 짓을
망설임 없이 저지르는 그런 여자는 당신에 비할 바가 안
되니까요. 친족의 피에 두 손을 흥건히 담구고. 미련한 데다가
우매해서 조금 친절하게 굴었다고 얼굴을 붉히는 꼴이……』
이어지는 길고 긴 글자는 점점 어려워져 더듬더듬 읽어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황궁의 상황은 어떤가요? 아무래도 병력이 전보다 더
필요할것 같은데……』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던.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가슴속의
무언가가 뚝 끊어져 내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에 에즈라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작게
키들거렸다.
“……글을 익히지 말걸 그랬나 봐.”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온 마음으로 그를
사랑할 수 있었던 때가 그리웠다. 나쁜 비밀 따위 모르고.
순진하게도 당신을 사랑했던 그때가.
하하,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던 에즈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냉기 어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저는 미련하고
우매한 여자가 분명했다.
에즈라는 손안에 쥐고 있던 양피지를 꽉 말아 쥐었다. 그에
험하게 구겨진 양피지는 마치 자신 같았다. 이렇게 구겨진 채로
버려지거나, 태워져 언젠가는 한낱 재로 날아가겠지.
그는 손에 쥔 커다란 칼을 내려다보았다. 낯선 칼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려 보던 히폴로테스는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언젠가, 이제는 무뎌지고 어렴풋해진 줄로만
알았던, 처음으로 누군가를 제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야 했던 그
날
어느새 주위는 깊은 숲 한가운데였다. 키를 훌쩍 웃도는 기다란
나무들과 푹푹 찌는 여름날의 공기가 온몸에 진득하니
달라붙었다. 와중에 베인 팔뚝이 불붙은 듯 뜨거워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야 했다.
그는 피가 쏟아지는 상처를 콱 잡은 채로 얼굴의 식은땀을 훔쳐
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이는 애처로울
만큼 떨고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다양한
무기를 떠안고 있음에도.
‘이제 그만 반항하고 얌전히 내 손에 죽어.’
‘ 형.’
오랜만이었다. 자신과는 털끝만치도 닮은 구석이 없었던
이복형. 천성이 온유하여 칼도, 사냥도 멀리하던 유약한 남자.
더러운 핏줄이라 손가락질받는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위로해
주었던 나의 형.
지금도 형이라는 한마디에 주저하고 있잖아.
‘히폴로테스, 부탁이다.’
‘부탁하지 마.’
꿈인데도 그때와 똑같은 말을, 똑같은 어조로 내뱉다니. 그것이
우스워 히폴로테스는 고개 숙여 조소했다. 얼마나 빌고 빌었던가.
차라리 독을 품고 내 생명을 위협하기를. 그도 아니면 내게 침을
뱉고 핍박하기를. 그리하면 이 지독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고도 하지 마!’
참지 못하고 윽박지르자 형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고운 손에
어울리지 않는 장검이 목적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헛된 꿈이
분명한데도. 본능은 또다시 그를 죽여야 한다고. 그러니 더는
망설이지 말라고 속삭였다.
‘나야말로 미안하지.,
히폴로테스는 거짓 웃음을 꾸며 내며 손안에 든 단도를 가볍게
돌려 쥐었다. 번뜩이는 칼날이 그를 향하자 뒤를 지키던 병사들이
한 발자국 나서는 것이 보였다.
모두를 거만한 눈빛으로 훑어보던 히폴로테스는 한순간
포악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자리에서 형을 죽여 버릴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