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뭐, 몸이 좋지 않아 요양차 궁을 나선다고 하면 될 일이니까.
오히려 대다수의 귀족들은 좋다고 손 흔들며 반길 테고.”
갑자기 불똥이 왜 그리로 튀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계획에
그들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혼자만의 계획을
그들에게까지 주절주절 설명하고 싶지 않은 까닭에
히폴로테스는 차갑게 내뱉을 뿐이 었다.
“정예병만 모아 에즈라를 호위하도록 해. 행렬이 황궁 밖으로
나와 내가 말한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할
거야.”
붉은 눈동자가 첨예하게 번뜩였다. 이미 저물어 가는 노을을
눈치챘지만 그뿐. 역시 그 어떤 감흥도 일지 않아서.
히폴로테스는 대수롭지 않게 깃펜을 들어 올렸다.
“에즈라 님, 이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말만을 메아리처럼 종알거리던 셀리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이지 저런 고집을
피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이제는화가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에즈라 님!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들어가서 몸과
마음을 편히 하세요.”
“나는 괜찮아. 정말이야.”
몸과 마음을 편히 하라니. 그런 소망은 버린 지 오래인데.
어차피 지금까지 제 것인 적 없는 것이기도 했고.
“그분께서는 오지 않으실 거예요. 벌써 해가 저물었고, 이제
곧 깊은 밤이 된다고요. 안 그래도 날씨가 점점
싸늘해지는데…… 아니, 아니죠. 모두 망토 하나 챙기지 않은 제
잘못이에요.”
오지 않을 거라 장담하는 셀리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 하면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볼지도 모르니까.
“그럼 망토 하나만 가져다줄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어떻게 이 밤에 에즈라 님을 여기에 홀로
두고 가라 하세요?”
“홈로 두라는 게 아니라, 잠시 다녀오라는 말이었어. 조금만
더 바람을 쐬고 싶어서 그래. 오랜만에 밖에 나온 거잖아
그러니까……응?”
셀리는 어물어물 말을 내놓는 에즈라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차디찬 손을 꽉
맞잡아 보인 셀리는 신신당부를 했다.
“궁 안에 들어가자마자 호위를 이쪽으로 보낼 테니 여기서
꼼짝 않고 계세요.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요.”
“응, 알겠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다녀와.”
에즈라는 빠르게 멀어져 가는 셀리의 등을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새까만화로 시선을 돌렸다. 만물을 비추던 해가 떠나간
자리엔 당연하다는 듯 어둠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가하지 않으니까.”
오늘따라 집무가 많았을 수도 있다. 신경 쓸 게 이만저만이
아닌 높은 자리가 아닌가. 그러다 보면 저와의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게 일도 아닐 테고. 속상한 마음보다는 솔직히
홀가분했다.
이렇게 기다린다는 건, 언젠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쉬운 일이 되어 버려서.
얼마나 멍하니화를 바라보았을까.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에즈라는 홈칫 몸을 굳혔다. 셀리라기에는 너무
이르니, 셀리가 보낸 병사거나 그도 아니면……오
“에즈라 님:
멈춘 발걸음 소리. 낭랑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라티아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을 산책하는
중이었는지 뒤에는 하녀 둘과 호위 기사 둘을 거느린 채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오셨어요?”
그녀가 남은 거리를 조금 더 좁히며 물어 왔다.
“히폴로테스 님을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이리 늦은 밤에요?”
“아뇨. 오시기로 하셨었는데. 역시 오늘도 바쁘신가 봐요.
기다리다가 해가 저물어서요.”
함께하기로 약속했다는 것보다 지금까지 이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마음에 더 걸렸다. 미천한 신분을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애달픈 여인인 척 동정심을 자극하면, 그가 돌아봐 줄
것이라 기대라도 하는 건가.
“밤이 늦었어요.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떠세요? 아무래도
오늘은 그른 듯한데.”
“그게 오랜만에 나와서요. 조금 더 바람을 쐬다 들어가려
했어요. 이젠가야겠네요.”
가시 돋친 말투가 자신의 미련함을 탓하는 것만 같아
도망치듯 걸음을 옮기려는데 라티아가 툭 내던진 한마디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떤 기분이었어요?”
신경이 곤두선 탓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고국의 백성을 궁지에 몰아넣고, 친족을 배신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또…… 제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까요?”
이런 표정과 말투는 라티아에게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멸시와 환멸이 가득한 목소리에 얼핏 비치는 증오. 신랄한
비난은 익숙한 것이었음에도 가시 돋친 말이 마음을 쑤셔 대는
일은 늘 감당하기 고된 일이어서.
“그 죄 없는 이들의 소중한 목숨을, 고작 당신의 얄팍한 사랑
때문에 희생시킨 기분 말이에요.”
떨리는 손끝을 숨기려 맞잡더니 대답 없이 고개를 수그리자
그 꼴을 내려다보던 라티아는 표독스럽게 눈을 빛냈다.
“아니, 아니지. 그럼에도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기분은
어때요?”
여전히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밤기운에 쌀쌀해진
바람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에즈라의 등을 밀어 왔다. 하릴없이
흔들리는 옷자락과 머리칼. 두 여자는 세찬 바람에 살짝
흔들리다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티아가 그토록 원하던 대답이 들려왔다.
“라티아 님은 그리하지 마세요.”
“그리할 리가 있나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럴 그릇이
못되거든요.”
약한 것을 쿡쿡 찔러 괴롭히는 것처럼 남을 상처 주는 일은
알 수 없는 쾌감을 일게 하는 법. 라티아는 한껏 비아냥대며
그녀를 후려쳤다.
“후회하나요? 죄책감을 느끼나요? 괴로운 거죠? 당신은
그래야 하잖아.”
“후회해요. 죄책감에 괴롭습니다.”
“그럼 다시 되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겠네요.”
흡족한 대답에 조소를 머금던 라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에즈라를 마주한 채로 굳었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는
시간이 무척 길게만 느껴졌다.
“아뇨. 다시 되돌아간다면……,”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표정은 지독하게 씁쓸했다.
“지금과 같을 거예요. 후회하고,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괴로움을 안은 채로. 기꺼이 그렇게 살아갈
거예요.”
그것은 평생 떠안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깊은 감정의
늪이었다. 아마 자신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한, 그런.
침실에 누워 천장만 응시하던 에즈라는 며칠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인 양 세세하게 되짚어 나갔다. 포근했던 공기가
싸늘하게 변하고, 싱그럽던 만물은 모두 어둠에 잠겨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그 긴 시간 동안 홀로 둔 채 나타나지 않은 남자.
원망은 아니었으나 실망은 있었다. 무엇보다 그 탓에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을 들쑤시게 되었으니까.
‘후회하나요? 죄책감을 느끼나요? 괴로운 거죠? 당신은
그래야 하잖아.’
라티아가 숨겨 왔던 혐오를 적나라하게 내비친 그날, 그녀의
질타 덕분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불로 지지듯 새겨진 죄악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황비님, 잠시 괜찮으십니까?”
문밖에서 알려 오는 병사의 목소리에 상념이 뚝 끊어졌다.
벌떡 몸을 일으킨 에즈라는 잔뜩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렸다. 그들에게 호된 일을 당한 후, 습관으로 남은 긴장
때문이었다.
“히폴로테스 님께서 황비님을 찾으십니다.”
“저를요?”
“예. 준비가 끝나시는 대로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모신다는 말인가. 평소의 히폴로테스라면 무뢰배처럼
침실 문을 박차고 들이닥쳤을 텐데. 예를 갖춘다는 게 이리도
불편한 일일 줄은 몰랐다.
“이미와 계시다는 말인가요?”
“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셀리를 좀 불러 주시겠어요? 최대한 빨리 준비를 끝낼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히폴로테스 님께 그리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불자락을 뒤집어쓴 채로 얼마나 불안에 떨었을까. 낮게
이르는 목소리와 함께 셀리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침상
구석에 웅크려 떨고 있는 에즈라를 발견하곤 한숨을 삼켰다.
“황비님,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황비님을 폭행했던
병사들은 모두 사라졌으니까요.”
“알아, 아는데……
“힘드시죠. 원래 괴로운 일일수록 떨쳐 내기 힘들잖아요.”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말을 흐리는 에즈라를
보며 셀리는 누구나 할 법한 위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지만 동감할 수는 없는 탓이다. 그런 셀리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었기에 에즈라는 더 이상 엄살,
비스무리한 것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서 이리 오세요. 꾸물거릴 시간이 없거든요.”
시선을 떨구는 에즈라를 다정히 어르며 셀리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줄 끊긴 인형처럼 셀리의 손에 모든 걸 내맡긴
에즈라는 늘 그랬던 것처럼 멍하니 서서 거울 속의 자신을
훑어보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은 까칠했고 안색은 창백했다.
이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내보여야 하는 것이 민망해 뺨을
부비던 그때, 낯선 병사는 촉박함을 알리려 인기척을 냈다.
“가시죠.”
병사가 내어주는 길을 따라 셀리를 대동한 에즈라는 곧
응접실 문 앞에 다다랐다. 물결 진 창 너머, 희미한 그의
뒷모습이 비친다.
“히폴로테스 님. 황비께서 걸음하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병사가 문을 활짝 열자 오후의 볕을 즐기고 있는
히폴로테스가 보였다. 그는 온화하고 조금은 권태로운 태도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에즈라가 앞에 자리하자 그는
눈짓 한 번으로 주변을 지키고 있던 모두를 내쫓았다.
히폴로테스는 마주 았아 있는 에즈라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목처럼 마르고, 낯빛은 어두워진다. 점점
말을 잃어 가는 여자는 마치 꺼져 가는 불길 속의 연기처럼
기묘하고 불편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건가.
조금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탓하려 들 줄 알았기에 짜증이
밀려왔다. 볼 때마다 짐이 하나둘 느는 것만 같아서.
“에즈라, 아직 겁박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떨고
있으면 내가 무척 질 낮은 악당이 된 것만 같잖아"
“겁박하려고 부르신 건가요?”
“음……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히폴로테스는 어깨를 굳힌 에즈라를 보며 생글거렸다.
긴장을 풀어 주려는 의도라기엔 지나치게 목적이 분명한 태도.
에즈라는 단번에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를 꿰뚫었다.
“제가 뭘하면 되나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찻잔을 들어 올리던 히폴로테스는
멈칫했다.
“부탁하고 싶으신 게 있는 거 아닌가요?”
“부탁? 부탁이라니.”
그는 파란이 이는 찻물을 느긋이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히폴로테스는 결국 치미는
즐거움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맑은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울리자 예상치 못한 태도에
에즈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다. 그 모습이 또 우스워
겨우 웃음기를 지워 낸 히폴로테스는 들뜬 얼굴로 그녀에게
몸을 가까이 했다.
“그래, 에즈라. 부탁인데……"’
여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그때처럼 상냥한 손길로 그는
가슴 한구석을 짓뭉갰다.
“황궁을 떠나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