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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51화 (51/113)

51화

“에즈라 님, 괜찮으세요?”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물음에 에즈라는 느지막이 시선을

올려 셀리를 바라보았다. 거울 너머, 오랜만에 치장을 하는

자신이 낯설어 어색한 미소를 짓자 셀리는 더욱 어설픈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것이 못내 우스워 작게 킥킥거리자 한결 마음을 놓은

셀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모시지 못해 얼마나 걱정되고 애가 달던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동안 본궁에 있었어요. 온갖

잡다한 일은 다 떠맡았답니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겠다. 미안해.”

“에이, 고생은요! 저는 언젠간 이리 돌아올 줄 알았는걸요?

그보다 몸이 상하신 것 같아 그게 더 속상해요.”

대답 대신 힘없는 미소가 되돌아오자 셀리는 입술을 꾹 내리

물었다. 못 본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에즈라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으니까.

어리숙하고 순진무구했던 과거는 꿈처럼 사라져 티끌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곳엔 침착하고 초연해진 여자가 남아

있었다. 마치 빈 껍데기 같은 그런.

“통 잠을 이루지 못하시니 오늘은 수면에 좋은 향초를 피워

드릴게요. 분명 양을 열댓 마리 세기도 전에 곯아떨어지실

거예요.”

재치 있는 입담으로 조금이나마 에즈라를 웃음 짓게 한

셀리는 준비를 모두 마친 후 그녀의 주위를 빙 둘러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력 발휘를 할 필요도 없네요. 역시 에즈라 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우세요.”

“빈말이라도 고마워.”

“빈말이라뇨! 저는 그런 거 몰라요.”

솜씨를 내보일 건덕지가 없다며 괜스레 퉁퉁거리던 셀리는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셀리의 의견으로 가장 잘

어울린다는 보라색 키톤을 걸친 에즈라는 조그만 손으로

그것을 매만지다가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이제 가자.”

“네. 모실게요.”

두 사람이 침실을 나서자 새롭게 물갈이된 병사들이 복도를

꽉 메우고 있었다. 길쭉하고 날이 뾰족한 창을 든 병사들은 모두

군기가 바짝 들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시선 한 자락

닿아 오지 않았다.

세워 둔 인형처럼 각 잡힌 이들 사이를 걸어 나가자 남시종

하나가 따라붙었다. 이리로 오십사, 하는 말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가벼이 살랑이는 바람에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대놓고 공주님 유혹하는 거예요.’

‘대놓고 넘어와 주면 좋겠는데.’

조금은 축축하고 생기를 머금었던 공기. 간헐적으로 파스스,

소리를 내며 흩날리던 수양버들 가지와 날아왔다가 또

떠나가는 것들. 그 사이에서 나를 붙잡아 주었던 단단하고도

든든했던, 그래서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나를 꽉 잡아요.’

아주 사랑스러운 순간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마치 뽐내듯 반짝이는

풍경들이 눈 안 가득 밀어닥쳤다.

화창한 햇살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멈춰 선 에즈라는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을 정리해

귓가에 꽂으며 탁 트인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람 따라

잔잔한 물결이 일고, 동동 떠 있던 새들은 간간이 퍼덕거리기도

했다.

모든 게 너무도 고요하고 안온했다. 그 평화로움을

마지막처럼 즐기던 에즈라는 결국 조잡한 배 한 척을

발견하고는 풋,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그날의 나룻배보다 더

형편없어 보이는 탓이다.

허나 짧았던 미소는 곧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이나 아름다운 것들에 염치없이 벅차오르는 마음이

가증스럽게 느껴졌으니까.

“아직 히폴로테스 님께서는 오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분명

오실 테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가 보도록 해요.”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자리에 못 박힌 에즈라가 상냥하게

말하자 시종은 짧은 목례를 한 뒤 조용히 뒤를 돌아 멀어져

갔다.

한편, 깃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어 나가던 히폴로테스는 잠시

창밖을 응시하다가 기지개를 쭉 폈다. 오늘따라화창한 날씨

덕분에 창밖의 색감은 평소보다 뚜렷했고 또 반짝였다.

나른한 기운에 짧은 숨을 내뱉은 그는 천천히 턱을 괴며 아무

생각 없이 무료함에 빠져들었다. 전보다 조금 자란 머리칼이

이따금씩 목덜미를 간지럽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지. 아마도 지금쯤 채비를 마치고 미리

보내 놓은 시종을 따라화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한 번만 더.’

톡톡, 일정한 박자에 맞춰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히폴로테스는 간절했던 눈망울을 떠올리고는 멈칫했다. 힘없이

늘어진 손가락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게 뭐야.’

반쯤은 오기로 내뱉었지만 분명 진심이었다. 그게 뭐든

적선하듯 던져 주고 나면 그것으로도 만족할 여자가

분명했기에.

‘배 타요. 세상에서 가장 조악하고 또…… 조금만 잘못

내디디면 빠져 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배.’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잘 알고

있음에도 쉬이 외면할 수 없는 건 왜일까. 알겠다 약속했으나

끝맛이 편치 않았다. 배를 타고 싶다는 대답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았으니까.

모든 게 거짓으로 점철된, 의도적인 접근. 그곳에 갇혀

혼자만의 추억을 진절머리 나게 곱씹고 싶은 거겠지. 그런 게

이제 와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히폴로테스 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때마침 들려온 카코스의 목소리는 구원과도 같았다. 대충

양피지를 밀어 넘기고 펜촉을 꽂아 넣은 그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막 들어서는 카코스와 테르모스가 보였다. 그들 뒤로

제논과 데몰레온까지 줄 지어 들어서자 그는 살짝 소리 내어

웃었다.

“몰려다니는 취미가 있었는지는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보니 아무래도 모두

모이는 편이 좋다고 홀로 판단했습니다.”

“딱히 탓하는 건 아니었어. 나름 보기 좋아. 아주 잘 어울려.”

히폴로테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들을 한데 묶어 보이며

생글거리자 카코스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그의

간극은 따라잡기도,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중요하다는 말은 뭐지?”

“혹, 라티아 님의 탄일 연회에서 아브타크의 옆을 지키던

남자를 기억하십니까?”

카코스의 은밀한 물음에 히폴로테스는 걸리적거리던 인간을

단번에 떠올렸다. 그리 수상쩍은 남자를 잊을 리가.

히폴로테스가 서늘한 눈을 빛내며 눈짓하자 카코스는 말을

이어 나갔다.

“저와 테르모스가 최대한 들키지 않는 선에서 그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아브타크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심할

만한 여지는 충분하니까요.”

“그래서?”

“이름은 시프나드. 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슬럼가

출신입니다. 그쪽에서는 워낙 유명한 터라 알아내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듣고 있는 걸까. 히폴로테스는 어느새 해가 기우는 하늘을

뚫어져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흘긋거리면서도

카코스는 계속해서 손에 쥔 정보를 읊었다.

“돈을 받으면 무슨 일이든 했다고 합니다. 정확히 어떤

일이라고는 콕 짚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일이었다고

하는데, 예상하기로는 최대 살인까지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최근까지 도둑질이나 숱한 폭행을 일삼기도 했고요. 어디로

보나 슬럼가에 혼해 빠진 양아치 정도일까요.”

흔해 빠졌다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스치듯 보았던 남자를

떠올리며 히폴로테스는 슬슬 고개를 내저었다.

“품행이 천박한 만큼 무력이 입증된 남자이니. 저희끼리

추측하기로는 호위로 두는 것은 아닐까……,”

“쓰레기라면 치를 떠는 아브타크가 뒷골목 잡배를 상종한다?

그것도 모자라 늘 달고 다녀야 하는 호위 기사로?”

“그건……"

“카코스. 비천한 호위를 중대한 연회에 함께 참석시킬 귀족은

없어. 게다가 훌륭한 칼잡이는 아브타크 주변에 널리고

널렸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명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경직된 태도로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히폴로테스는

밀어 놓았던 양피지를 도로 펴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얼마 전,

크게 망신당한 아브타크가 지금 상황에서 원하는 건 하루빨리

라티아의 위상을 높이는 것일 테고.

그러려면 가장 먼저 에즈라를 내쫓고 싶어 애가 달았을

것이다. 신중하고 사리 분별이 확실하지만 그만큼 무자비한

인간. 분노로 눈이 돌아간 지금의 아브타크라면 호시탐탐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

어디로 보나 잘된 일이었다. 에즈라를 미끼로 아브타크의

사병 세력을 한풀 꺾어 놓을 수 있는 기회 니까.

별다른 말 없이 무심한 태도에 눈치만 보던 카코스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에즈라를 황궁에서 내쫓겠어.”

진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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