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눈에 띄는 남자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거짓말이지. 히폴로테스
님과 견줄 만한화려한 용모를 가진 남자는 투박하고
야성적이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매력이 되어 모두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뭐……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남자이니 더 관심이 가는
거겠지. 아브타크가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언질도 주지 않더군.
그 덕에 여기 있는 모두가 한결같이 저 남자의 눈치를 보고
있어.”
“이름이?”
“시프나드.”
이름을 듣자마자 카코스는 은근히 미간을 찌푸렸다.
시프나드라는 이름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고, 거칠어
보이는 손이나 구사하는 언어로 보아서는 절대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 않았다. 길거리 시정잡배가 더 어울리는
행동거지임에도 돋친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이유는 뭘까.
수상해. 이상하리마치 수상하다.
턱을 어루만지던 카코스는 결국 입가를 가리며 아무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성가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네 감을 믿는다. 히폴로테스 님께서도 그러하실 거고.”
두 사람은 마침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커튼으로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먼저 저 남자와 아브타크의 관계를 파악한다. 그
후에 히폴로테스 님께 보고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7
아마도 그것이 히폴로테스 님의 신경을 조금이나마 덜
건드리는 방법일 테니까.
“지금은 이런저런 일로 심란하신 것 같으니.”
“로엘을 두 사람에게 붙이겠다.”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악취미는 여전한 모양이다. 나름
심각한 상황 속에서 웃음을 터뜨리자 테르모스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수한 얼굴을 마주한 채
고개를 가로저어 보인 카코스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시프나드의 정체가 먼저다. 아브타크와의 관계는
그것만으로도 확실해질 거야.”
“알겠다.”
잠깐 풀렸던 분위기는 다시 바짝 조여졌다. 기민한 이가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 찰나의 순간. 하하, 크게 소리 내어
웃던 시프나드의 시선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으므로.
꿀꺽. 테르모스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슴께에 팔짱을 낀 카코스는 입 안을 질끈 깨물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기척을 느끼다니.
“당장 이곳을 떠나면 저 남자의 의심을 살 수도 있겠어. 내가
먼저 나가면, 시간을 두고 나와.”
고작 흘러가듯 닿았던 것뿐이건만. 서늘했던 검은 눈동자가
선명히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았다. 시간은 촉박하고. 그만큼
마음은 조급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코스는 뒤를 돌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넓은 손바닥으로 감싼 손목은 미약한 바람에도 꺾여 버릴
가지처럼 가냘팠고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줘
잡으면 뚝 부러질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불안이 파도치듯
넘실거렸다.
늘상 남들에게 내보이지 않던 분노를 여과 없이 내비치던
히폴로테스는 침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에즈라의 손목을 버리듯
놓았다. 손바닥에 진득이 들러붙은 불길한 예감을 떼 내려는 듯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황비로서의 품위는 기대도 안 했어.”
그가 감정을 억누르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비틀린 미소를
지은 히폴로테스는 한숨 쉬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를 부끄럽게 만들 줄은 몰랐지.”
역시 부끄러웠구나. 익히 짐작했던 상황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겨우 저 같은 것 때문에 치부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니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해하는데도 염치없게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들어서일까. 에즈라는 처음으로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저를 부끄럽게 만든 건 히폴로테스 님이에요.”
“뭐?”
“입에 담기도 힘든 잔악한 짓을 저지르고도 히폴로테스 님을
사랑하고. 또 사랑을 구걸해 온 내가. 나는 너무 부끄러워요.”
여전히 후회 한 자락 하지 못해서 더 부끄러웠다.
꺼내기 힘든 한마디를 고르고 골라 전한 말이었으나 밑도
끝도 없는 사랑 얘기에 그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히 폴로테스는 멱살이라도
틀어쥘 기세로 에즈라를 다그치며 벽으로 몰아갔다.
“언제부터였지?”
그가 말하는 것이 웥 가리키는지 모르지 않았다.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던 등 뒤로 와 닿는 차가운 벽의 감촉. 그것이 더
이상 도망갈 곳 따위는 없다고. 그리 속삭여 주었다.
“언제부터 였냐고.”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맞닥뜨려야 했던 수모와 긴장감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데
끝까지 물고 놓아 주지 않는 사람에게 신물이 났다. 고개를 돌려
완전히 외면하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놓고 코웃음 쳤다.
“내가 모를 것 같아? 네게서 피 냄새가 진동해. 여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남자가 험악한 손속으로 허벅지
안쪽을 콱 움켜쥐었다. 막 아물던 살이 다시금 갈라지는 고통에
눈앞이 번쩍 튀어 신음이 저절로 비집고 나왔다. 아픔에
몸부림치며 그의 손을 떼 내려 했으나 비죽 웃어 보일 뿐이다.
“더 힘줘 볼까?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것 같은데. 다시 피를
봐야 정신 차리겠어?”
“제발, 아, 아파요…… 놔주세요!"
“그럼 말해. 언제 어떻게 누가, 왜.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협박을 일삼으며 그가 입술을 겹쳐 올 듯 다가왔다. 힘을
빼기는커녕 더욱 움켜쥐는 통에 결국 피를 본 모양이다. 코끝에
머물다 지나가는 비릿한 혈 향. 내게서 풍겨 나오는 것은 모두
이렇게 역겨운 것들뿐이야.
벼랑 끝에 몰린, 혹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눈물짓던 에즈라는
겨우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밤마다 꿈을 꿔요. 이유는, 이유 같은 건 몰라요.”
“세세하기 말해. 네 주변에 머물던 이들의 목을 하나둘 베어
버리기 전에. 알잖아, 나 그런 거 되게 잘하는 거.”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흥분은 서리가 되어 깊게 내려앉았다.
평소보다 더욱 차분해진 히폴로테스는 그녀의 목 부근을
쓸다가 천천히 목을 감쌌다. 손안 가득 찬 목덜미. 조금만
몰아붙이면 여기, 욱신거리던 맥박은 찢어질 것이다.
나는 너를 이리 쉽게 죽일 수 있는데. 그만큼 너는 너무 쉽게
죽을 게 분명해서.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환영을 봐요. 기억하지 못하는 밤들이
많아요. 일어나 보면 항상……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눈을 뜨고.
무, 무엇보다 어떤 짓을 했는지 도저히 기억이……,”
“젠장, 에즈라.”
마구 주절거리는 여자의 말을 그가 단칼에 잘랐다. 굳이 더
듣지 않아도 눈에 빤한 상황에 사그라들었던 분노가 온몸을
태울 듯 강렬해진다.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만 같아. 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화가 나서, 이 분노를 털어 낼 곳이 머저리 같은
너밖에 없어서.
히폴로테스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에즈라의 팔을 잡아끌어
침상 위로 패대기쳤다.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널따란 침상을
구른 에즈라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남청색
옷자락을 마구 찢어발기며 저속한 욕을 중얼거렸다.
“누구지? 누구에게 당한 거야.”
“히, 히폴로테스 님.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그의 딱딱한 손끝이 멍 든 부근을 하나둘 짚어 나갔다.
은밀한 부분까지 훑어 내려간 집요한 손에 담긴 격렬한 분노에
몸이 절로 벌벌 떨렸다.
“오해세요.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닥쳐!”
훤히 드러난 상체를 가리며 거칠게 반항하자 몸싸움이
일었다. 엉망으로 구겨지고 갈기갈기 찢긴 옷 조각을
더듬거리던 그때, 허공을 가르는 남자의 손이 느리게 보였다.
이내 울리는 마찰음과 여린 뺨을 갈기는 두터운 손. 귀가
먹먹해지고 머리가 빙글 돌아 상황을 인지한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불붙은 듯 따가운 통증 때문은 아닐 것이다.
눈물은 아까부터 고여 있던 거니까. 언제나. 가슴속에 품고
살던 것이 조금 흘러넘친 것뿐일 텐데. 깜빡이지 않아도 흐른
눈물이 귓가를 타고 넘어갔다.
숨 한번 헐떡이지 않고 우는 여자는 우뚝 반항을 멈추었다.
희망을 놓아 버린 여자를 마주하던 히폴로테스는 결국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이기적인 남자. 당신을 밀어내고
싶은데도 성마른 숨결이 쓰라리게 닿아 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제발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사정없이 내려칠 때는 언제고. 우습게도 덜컥 겁이 났다.
나와 닮은 네 불행이 이렇게 아프게 다가온다는 게.
“에즈라, 나는 내 것을 남과 나누는 취미 따위 없어. 나는
황제잖아.”
내가 이 자리에 오려고, 살아남으려고 누구의 희생을 딛고
기어올라 왔는지. 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유일한 황제의 것을, 그 권위를……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
짓밟히고도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마치 다짐하고, 또 맹세하는 말처럼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반질거리는 붉은 눈은 결코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떨리는 손끝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사랑해요.”
한순간 사라져 버린 미소를 떠올리려 눈을 감았다.
“사랑해요, 히폴로테스 님.”
이어진 말에 두 사람은 말없이 눈을 맞추며 시간을 죽였다.
나는 물어보고 싶어. 당신이 상처 주고 싶은 게 진정 내가
맞는지. 혹시 내가 아니라면…… 그럼 차라리 나를 미워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어.
“그러니 지금처럼 저를 미워해 주세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을 것 같아.
“원하는게 뭐야.”
히폴로테스는 뻣뻣하게 굳어 버린 입술을 움직여 힘겹게
내뱉었다. 희미하게 호선을 그리는 녹빛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정해 놓은 말을 건네기가 너무 괴로웠다 하면, 너는
믿을까.
“뭘 어떻게 하면, 나를 놓을래.”
나를 사랑하지 말기를. 부디 여기서 네 사랑이 끝나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너는 내 마음에 짐으로 남을 테니까.
히폴로테스는 내리쳤던 뺨을 살며시 감싸 보았다. 부풀기
시작한 보송한 ‘뺨에서 전해져 오는 열감. 이제 성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자가. 너절한 꼴을 한 채로도
더없이 환하게 웃어 주었다.
“우리한 번만 더."
너를 이렇게 만든 게 나인데도. 그리고 앞으로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상처뿐일 텐데.
“배 타요. 세상에서 가장 조악하고 또…… 조금만 잘못
내디디면 빠져 버릴지도모르는, 그런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