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주는 혼자 남아서-49화 (49/113)

49화

에즈라는 절망 어린 눈빛으로 라티아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히폴로테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으나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무어라 입을 떼지도 않았다. 완벽한 무시와 방관.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았다.

에즈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누구에게도 얼굴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까. 차마 입에 올릴

수 있을 리 없다. 얼마나 지독한 짓을 벌였는지.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부수고, 망가뜨려서 평생 참회할 수 없을 죄를 지었는지.

하지만 말해야 했다. 손가락질당해야 했다. 모든 수치와

모욕을 감내하고,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삶을 꾸역꾸역 살아

나가야 했다. 속죄하지는 못해도, 평생 씻어 낼 수 없다면 벌을

받아야 하니까. 그게 옳으니까.

“가장 먼저 죽인 건 둘째 언니였어요. 그다음에는 첫째

언니를 협박해 성벽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았죠. 그 과정에서

첫째 언니 역시 죽이고 말았지만요.”

차분한 말이 이어지자 귀족들은 사색이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근질거리는 입을 열어 숙덕거릴 법도

하지만, 그보다 이어질 말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몰려드는 눈총을 피하려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린

에즈라는 손바닥이 터져라 주먹을 쥐면서도 끝내 모든 것을

마주했다.

“그다음은 무척 쉬웠어요. 모른 척하면 되는 일이었거든요.

죄 없는 백성들의 죽음도, 키워 주신 아버지의

죽음마저도……-”

사랑한 걸까. 아니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저조차도

확신할 수 없게 돼 버린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저 멸망하는 나라를 뒤로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어요.”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 히폴로테스에게 눈길을 돌린

에즈라는 말을 끝맺었다.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는 것까지

목격했음에도 고개를 수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담담한 고백 탓일까. 혼란을 감추지 못한 라티아는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부산스럽게 굴다가 겨우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네요. 저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지만요. 그래서 에즈라 님이 더욱 대단한 거겠죠.”

라티아의 대답에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귀족들은 거북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얼마나 대단한 사랑이냐고. 고작 사랑 놀음에 친족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죄 없는 이들을 불사르다니.

에즈라를 동정하거나 경시하던 눈들은 단숨에 두려움과 혐오로

탈바꿈했다.

입매를 일그러뜨린 이들이 서로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마녀인가 아닌가. 신의 비호를 받는다는 성벽을

무너뜨릴 정도의 괴이한 능력이라는 건 대체 어떤 것일까.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마녀야, 마녀가 분명하네.”

“나 참, 그게 사실이라면 황비 자리가 가당키나 하나.”

제국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며 께름칙한 눈으로 에즈라를

흘긋거리던 이들은 그녀를 폄하하는 말을 몰래 주고받았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 웅성거리는 소음 너머. 저 멀리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익숙한 형체가 흔들렸다.

아버지.”

여기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에즈라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흘러나온 부름은 덧없었지만

저를 직시하는 눈빛만은 굳건했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아버지였다. 믿을 수 없었지만 분명 그였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희끗한 머리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가득

고여 와서…… 그 언젠가, 이름을 불러 주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 당장이라도 저 입을 열어 내 이름을 불러 줄지도

몰라.

“에즈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탓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히폴로테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떠

보니 모든 건 한낱 꿈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이 모든 건 익숙한 일.

“알아요, 히폴로테스 님.”

에즈라를 막아서려 했던 히폴로테스는 차분한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피를 흘리지도 않고, 목도 온전히 붙어 계셨거든요.”

여전히 그 어딘가를 망연히 바라보는 여자는 어디로 보나

제정신은 아니어 보였다. 그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살만

찌푸리자 에즈라는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엇보다 사라져버렸어요.”

내가 그렇게 만든 것임에도 이렇게 환상을 보았다. 밤마다

누군가 등을 떠밀다가도, 이리 오라 손짓했다. 어느 날은 살갑게

옷을 골라 주는 언니들이 좋아서 깨고 싶지 않기도 했지. 꿈인

걸 알고 있음에도 염치없이 그 다정함을 놓지 못하고 어리광을

부렸어.

“꿈에서는 다들 다정해서요. 내가 원했던 걸 해 줘요. 나를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요. 나를 진짜 가족처럼 사랑해

줘요.”

그래서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사실은 미치도록 그들의

사랑을 갈망했다는걸 .

치미는 눈물을 삼키는 여자의 두 손에 결국 피가 비쳤으나

히폴로테스는 맞잡아 주지 못했다.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의

속삭임이 계속 이어져서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늘 이름을 불러 주고요. 두 팔을 뻗어 꼭 안아

주세요. 얼굴을 모르는 어머 니는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말해

줘요. 내가 태어나서. 너를 낳아서, 나를 낳아서……,”

행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늘 거기서 꿈은 끊겨

버렸기에. 그것만은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듯 모두가 그 순간

떠나갔으니까. 그렇게 눈을 뜨고 나면 찾아오는 자괴감은 나를

좀먹었어.

그러니 이런 비난에 무뎌져야 해. 더한 일들도 떠안아야 해.

누구는 이기적이라 할지 몰라도, 그래야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잖아.

“그만.”

청승맞게도 눈물이 떨어지려는 찰나, 히폴로테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모든 상념을 끊어 냈다.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니

냉랭한 표정의 그가 보였다. 도망치듯 급히 시선을 피한

히폴로테스는 웅성이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조용히.”

불평이 턱 끝까지 차오른 귀족들은 불만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을 쏘아 댔다. 그 모든 것을 즐기며 히폴로테스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에즈라와 나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요. 이보다

더 내게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테죠. 그녀는 나를 위해 친족을

버렸고, 다들 알다시피 나 역시 친족을 내 손으로 모두

멸했으니까.”

히폴로테스 자신을 들먹이는 말에 귀족들은 다 같이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저리 말하는데 더 이상 황비의 입지에 대해

토를 단다면 황제를 욕보이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싶지 않다면 닥치라는 소리였다.

버러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닌 놈들. 삽시간에 고요해진

이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히폴로테스는 더없이 유쾌한

어투로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이런 내 옆을 지킬 만한 여자는 에즈라, 당신

하나뿐일 거야.”

연회는 엉망이었다. 엉망이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악단은 허둥지등 연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팡질팡했고, 귀족들은 가라앉은 분위기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렸다.

밤이 되니 쌀쌀해진 바람에 창틀이 음산하게 흔들린다.

허공에 흩어져 날아가 버린 장미 향. 찾는 이가 없어 이미 식어

버린 음식까지. 이곳에 모인 모두는 그 무엇도 즐길 수 없었고

그것은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

“라티아.”

“네?”

긴장에 숨을 몰아쉬던 여자가 이름이 불리자 퍼뜩 그를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과 경련하는 뺨. 잔뜩 긴장한

것이 꼭 고양이를 눈앞에 둔 쥐 새끼 꼴이다.

“기뻐 보여 다행이에요.”

그 한마디에 활짝 핀 라티아는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잠시 감은 채 짧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감사의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주제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기쁠 수밖에 없겠지만.”

사정없이 후려치는 차디찬 말. 그 말뜻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금 의자에서 일어선 히폴로테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 아브타크에게 빙긋 미소 지어

보였다.

겨우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지. 아브타크를, 그리고 이

주제 모르는 여자를 제대로 짓밟아 줄 기회를 놓칠 수 있나.

오로지 황비를 위해 마련된 황금 의자의 등받이를 손으로

느른하게 쓸어내리던 그가 허리를 숙여 라티아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한껏 고양된 여자가 몸을 바짝 굳히더니

뺨을 붉히고 만다.

역겨움에 웃어 보이기 쉽지 않았지만 그건 그거고. 실세가

누구인지 제대로 깨우쳐 주기 위해 그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다시는 이 의자에 앉지 마세요.”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내게 나라를 바칠 게 아니라면. 아니. 바친다 해도 앉을 수는

없겠네요.”

히폴로테스님!”

“이미 누군가 앉아 있을 테니까”

아브타크 가문의 자부심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땅에

떨어진 그들의 권위는 조각났고, 살금살금 기회를 엿보던

귀족들은 희열에 차 남몰래 환호했다. 개중 가장 산산조각 난

것은 라티아와 그녀를 따르던 숱한 귀족들일 것이다.

라티아를 동정 어린 눈으로 응시하기도 잠시,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어 버린 이들은 돌아가며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아직도 귓가를 쑤신 사나운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라티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부정해 댔다.

그럴 리 없다고. 이런 치욕은 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이런

일이…… 내 것일 리 없다고.

“와, 개박살 났네.”

“언사를 조심하게.”

아브타크는 지루한 표정의 시프나드를 매섭게 쏘아보았으나

그는 무시하며 휘파람을 불어 댈 뿐이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들어 올리는 아브타크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것을 빤히

응시하던 시프나드는 바람 빠진 비웃음을 흘렸다.

돈도, 먹을 것도 아닌 고작 명망이니 뭐니……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유난 떠는 게 웃기는 꼴이다.

그의 올곧은 시선은 이내 가녀린 등에 닿았다. 가뿐한

걸음걸이로 나아가는 당당한 남자. 그리고 사로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여자에게.

혈육을 배반하고,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했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게 생긴 거랑 다르게 노네.”

혼잣말 아닌 혼잣말에 아브타크는 그의 표정을 읽어 내려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이 지껄이던 말. 다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재미는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는 게 이런 건가.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고,

한 줄기의 희망은 아브타크의 가없는 야망에 불을 지폈다.

“아주 매력적이야.”

시프나드가 입술을 핥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마치 불씨가 남은 잿더미 같았다.

참, 질 낮은 취향이라. 아브타크는 그를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거워했다.

연회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음에도 남은 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발버둥 쳤고, 다행스럽게 연회는 점차 본래의

흥겨움을 되찾아 갔다. 평소보다 더욱 오버하여 먹고 마시던

이들은 간헐적으로 석상처럼 굳어 있는 라티아의 눈치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홀리며 애를 썼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군.”

라티아와 귀족들이 모여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카코스는 벽에 기댔던 등을 떼 내며 한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고심할 때 나오는 버릇이라. 옆에 서

있던 테르모스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깊이 생각에 잠긴 채였다.

붉은 커튼에 가려진 검은 창틀을 톡톡 두드리던 그가 뒤늦게

입을 뗐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한 게 너무 많은데. 뭘 말하는 거지? 히폴로테스 님을

일컫는 거라면 나도 모른다. 그분은 항상 파악하기 어려우신

분이잖아.”

“아니, 히플로테스 님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

“저기, 처음부터 끝까지 아브타크가 옆에 두고 있는 남자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