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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48화 (48/113)

48화

“시프나드 님. 여성분을 넘어뜨렸으면 손을 내미는 게 먼저

아닌가요? 그분은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한 분이 아닙니다.”

“그래요? 거참# 되게 어렵네.”

라티아의 질책에도 무신경한 대답을 내놓은 시프나드는

신경질적으로 에즈라를 일으켜 세웠다. 세심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관임에도 그는 힘없이 휘청이는 몸을 똑바로

잡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쉬이 떠나지 않는 온기에 잡힌

팔을 내려다보는데 남자와 시선이 스쳤다.

어딘가 음흉한 입꼬리와 새까만 눈에 비친 짙은 호기심.

화들짝 놀라 그의 손길을 빠르게 털어 낸 후 드러난 팔을

쓸고 또 쓸어내리자 그곳에 모인 모두의 표정이 묘해졌다.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적막 속, 숨죽여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지켜보던 라티아는 부드럽게 모두에게 일러 주었다.

“그분은 티텐의 넷째 공주이자 황제 폐하의 단 하나뿐인

황비십니다.”

저런 몰골로 황비라니. 그보다 황비는 죄인처럼 갇혀 지내던

존재가 아니었나. 황비라는 말에 그곳에 모여 있던 모두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어 갔지만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남자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가슴께에 팔짱을 낀 그가 허리를

숙여 더욱 얼굴을 들이미는 탓에 에즈라는 상체를 뒤로 빼며

그를 막아섰다.

“왜, 왜 이러세요?”

“그냥 뭐……반가워서.”

흑진주처럼 반질거리는 눈동자. 그것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에즈라가 재빨리 몸을 돌리자 시프나드는 어깨를

으쓱일 뿐,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서 이리로 오세요. 오늘 이리 직접 걸음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원래 귀족들이란 다 이런 걸까. 에즈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리를 권하는 라티아의 따스한 시선을 피했다. 자신을 그 방

안에서 데리고 나온 것도, 준비시킨 것도 모두 그녀가 해 준

일이건만.

“여기 았으세요.”

라티아가 가리키는 자리에 다가가자 뒤에 서 있던 하녀가

직접 의자를 내어주었다. 직위 고하에 따라 줄 지어 았은

테이블에 자리하기 무섭게 즐거웠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양 가시 방석으로 변모했다.

그들은 무언의 말을 주고받으며 상석에 았은 라티아를

곁눈질해 댔다. 비루한 모양새의 에즈라와 달리 고아하고

세련된 그녀의 차림새는 황금 의자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허나 아무리 그녀가 오늘의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엄연한

황비인 에즈라가 가장 상석에 앉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라티아도, 심지어 에즈라마저도 잘못된 부분을 꼬집지 않기에

감히 아랫것들은 나설 수 없었다.

대놓고 물 먹이려 말석을 권하는데도 군말 없이 앉다니.

그들은 자신이 앉아야 마땅한 자리를 빼앗기고서도 순박한

눈망울을 깜빡이는 멍청한 황비를 보며 남몰래 혀를 찼다.

뭐가 어찌 되었든 진정한 실세는 아브타크와 측실인

라티아임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싸늘한 어색함이 감도는

분위기 속 홀로 시종일관 웃음 짓던 라티아는 아무렇지 않은 양

포도주를 즐기며 말문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장미의 계절에 태어났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수태하셨을 때 그토록 장미꽃을 착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더니 정말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한때에 저를 낳으셨죠.”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처음으로 보신 세상이 가장 향기로운

계절이라니 너무 부럽습니다.”

“고마워요.”

정석적인 반응이 튀어나오자 라티아는 상냥하게 대답한 후

곧장 에즈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식은땀을 뻘뻘 흘려 가며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에즈라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실신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니, 차라리 실신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만.

“평소에는 에즈라 님과 깊은 대화를 할 수 없어 정말

아쉬웠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다니. 꿈만

같네요.”

에즈라가 시선을 올려 라티아를 곧게 마주 보았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기엔 너무도 맑은 녹색 눈동자.

직시해 오는 그녀의 순수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순간, 여자는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다른 이들보다

수척하고 창백한 피부는 되레 결 좋게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돋보이게 했고 늘 물기 어린 눈동자는 분명 청아했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한걸요.”

가느다란 목소리는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에 띄지 말라 입혀 놓은 밤하늘색 키톤이 분할 정도로 잘

어울려서 라티아는 금이 간 가면을 쓴 채로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어땠을까. 히폴로테스의 손은 어떻게 이 여자를

어루만지고, 어디에 입술을 맞추고 또……

“그럼 저도 탄일에 잊지 말고 초대해 주세요.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네요.”

탄일이라는화두에 할 말이 있을 리가. 낳아 준 어미의

얼굴도 몰랐고, 이름은 열 살이 넘어서야 귀동냥으로 들었다.

탄일 같은 건…… 지금껏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모두의 궁금증 어린 시선에 입술만 달싹이던 에즈라는

내보이고 싶지 않은 수치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하지만…… 몰라요.”

“모른다니요?”

어렵사리 내놓은 대답을 라티아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무구한 눈빛을 연기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악의 없는 물음에

에즈라는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셔서, 언제인지 차마 묻지

못했습니다.”

“어머, 그런……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에즈라 님. 고의는

아니었어요.”

역시 거짓이라도 꾸며 내는 게 옳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즈라는 자신의 일인 양 속상함이 묻어 나오는 라티아의

얼굴을 보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리 사과하실 것 없어요.”

“그래도 그런 비참한 과거를 꺼내게 했으니 모두 제

잘못이에요.”

비참한 과거. 날카로운 단어에 움직임이 멎기도 잠시, 미묘한

위화감이 풍겼다. 절로 숙연해진 분위기에 가책을 느끼며

습관처럼 고개를 수그리는데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얹어졌다.

“겨우 그런 게 잘못일 리가요.”

“……히폴로테스님?”

어깨에 얹어진 손이 누구의 것인지. 뒤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전해져 오는 뜨거운 온도가 그리웠기에 원망 어린 눈물 또한

고여 왔다.

입만 벙긋하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을 알아챈 걸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은 멍 든 어깨를 톡톡 다독여 주었다.

히폴로테스는 온순한 에즈라의 목덜미를 남몰래 쓸어내리며

그녀의 머리 위에 진득이 입술을 맞추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야살스러운 행위. 일련의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로 히폴로테스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잘못된 건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라티아.”

“잘못된 거라요?”

라티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린 채

평정을 가장했다. 끌어 올린 입꼬리가 떨리지 않게끔 숨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음에도 이어지는 정적은 점점 버티기

힘겨워졌다.

대답 없이 눈을 맞춰 오던 히폴로테스는 곧 그녀를 외면하며

말을 돌렸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 늦어서 미안해요. 오늘따라

집무가 많았던 터라.”

“아니에요.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히폴로테스는 응당 누구에게나 보여 주는 미소로화답했다.

옆에 서 있던 시종 하나가 라티아의 옆자리에 마련된 황금

의자를 빼내자 그는 미련 없이 에즈라를 뒤로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숨을 터놓는 귀족들에 대한 경멸을 감추며

히폴로테스는 황금 잔을 들어 올렸다. 모두의 시선을 끌어 담은

남자는 여유롭게 목을 축인 후 말없이 상황을 살폈다.

어디 한번 더 해보라는 듯 그는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모든

것을 방관했다. 어디까지 날뛰는지, 언제까지 기어오를 것인지

조금은 궁금했으니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두고 보는 것도 퍽

즐거운 일일 것 같았다.

“모두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으니, 미련 없이 즐기기를.”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한 귀족들은 라티아와 히폴로테스

사이에 오고 가는 은근한 눈빛에 대놓고 안심했다.

히폴로테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악단이 다시금 리라를 타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먹고 마시며 긴장감을 풀었다.

별 쓰잘데기 없는 잡담을 나누며 흥겨워하는 도중, 라티아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아브타크의 눈길을 외면하며 에즈라에게

잔을 건넸다.

그녀와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에즈라는 잔을 받아 든 후

엉거주춤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즈라 님, 저는 에즈라 님이 무척이나 부럽답니다.”

라티아가 나긋하게 내뱉자 개떼 같은 시선이 들러붙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이 목소리를 낮춰 마련한 무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법. 금세 연기에 심취한 라티아는 하얗게 질린 에즈라의 손을

맞잡았다.

“사실 이 자리마저도 제겐 과분한 것이에요. 용기 있게

히폴로테스 님을 도와 승전을 차지한 에즈라 님에 비하면 저는

미천한 사람이 니까요.”

“미천하다니요. 그런 말씀은 마세요;

어디로 보나 라티아는 미천하다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은 저를 일컬을 때나 쓸 법한 말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라티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극히 부정하며 손을

저었지만 라티아는 서글픈 표정으로 내뱉었다.

“그러니 어찌 히폴로테스 님을 도왔는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부디 제게 가르쳐 주세요.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저도

조금이나마 히폴로테스 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 말의 속뜻을 알 리 없는 이들이 태반이다. 흥미로운

화제에 더 이상 모른 척하기 힘들어지자 귀족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히폴로테스는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자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턱을 괬다.

“그게, 그러니까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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