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참 나, 생각 없이 갈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어쩌긴 뭘 어째.”
“들키진 않을까? 제길. 들키면 죽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안 오노. 요즘 라티아 님 탄일 파티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던데. 뭐. 무엇보다 히폴로테스 님께서 직접 손찌검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동안 에즈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양 팔뚝을 잡고 있는 병사의 손은 뜨겁고 축축해 기분이 나빴다.
맞은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 정도 고통은 티텐에서의 채찍질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셀리는 괜찮은거죠?”
나지막한 물음이 고집스럽게 울려 퍼지자 대화를 나누던
병사들은 말을 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누군가는 대놓고
헛웃음을 뱉으며 쫏쫏 혀를 찼다.
“됐다, 됐어. 어서 가기나 해!”
그들은 끝내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여느 때처럼 험하게
등을 밀어 대며 저급한 농담을 일삼기만 할 뿐이다. 질질
끌려가던 에즈라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돌려 지나온 복도를
훑어보았다.
해가 떴는데도 음습한 그림자가 낀 복도. 지나치게 어두운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우습게도 티텐이 그리워졌다. 손바닥만 한
창에서 쏟아지는 볕을 쐬던 참회의 나날들이.
그렇게 이유는 몰라도 뚝 끊겨 버리는 기억과 기이한 행동들이
매일 반복되자 저 자신이 두려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라리
잠에 들지 않으려 발악하다 보니 몸에는 스스로 새긴 흉터 또한
하나둘 늘어났다.
허벅지를화병 조각으로 사정없이 찔러 대도 몰아치는
잠기운을 도저히 떨쳐 낼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꼭
망가진 인형처럼 흐트러진 채로 바닥에서 눈을 떴다.
도망치는 등 뒤로 닿아 오는 혐오 어린 시선들.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킬킬거리는 비아냥과 몸에 난 손자국들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반응들에 벌벌 떨며 몸을
추스르기도 지쳐 갔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길들여지는 게 편하다는 걸 은연중에
깨달았으니까.
침상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에즈라는 결국 바닥에
고꾸라진 후에야 눈을 떴다. 일어나야 함에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밤중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다 보니 낮 동안
미치도록 곤했다. 허나 그마저도 두려워 편히 잠들지 못했다.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다.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등. 에즈라는
바닥을 구르는 이불자락을 주워 들며 허둥거렸다. 다시금 침상에
기어들어 가려던 그때였다. 한 줄기 구원과 같은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히폴로테스님……?”
희미한 부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침상을 짚은 채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는데 등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비님께 이르지도 않고 문을 열다니. 경솔하구나.”
“죄,죄송합니다.”
“내게 죄송할 일이 아니지. 대체 언제부터 황비의 침실이
이토록 가벼웠나?’’
라티아의 질책에 생각 없이 문을 열어젖힌 병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술만 달싹였다. 서로 낮은 시선을 교환하며
잘못을 떠넘기는 꼴을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내려다보던
라티아는 고고한 자세로 침실에 들어섰다.
“에즈라 님. 오랜만이네요.”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에즈라는 어설픈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구석구석 살피던 라티아는 천천히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당혹감에 말이 나오지 않는 탓이다. 은근히
떠도는 피 냄새의 근원지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게 다무슨일이에요.”
황급히 다가온 라티아는 창백해진 손으로 핏자국이 선명한
허벅지 부근을 더듬었다.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벌어지자
에즈라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실낱같은 신음에 놀라 손을
떼자 에즈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밤마다 자꾸만 헤매어서요. 너, 넘어지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별일 아니에요.”
별일이 아닐 수가 있나. 수척해진 햠과 팔다리에 빼곡한 멍
자국. 그뿐이 아니었다. 새하얗게 질린 입술은 꼭 누군가
손찌검을 한 듯 거칠게 부르튼 상태였다.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의복이 부끄러운 듯 에즈라는 라티아의
손을 떼어 내며 옷깃을 여몄다. 그것을 눈치챈 라티아가 뒤를
돌아 열린 문을 노려보자 병사들은 회피하며 문을 닫았다.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어요.”
이런 상황이라. 이런 상황은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걸까.
비참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것? 아니면 모두의 앞에서 수치스러운
모욕을 감내하는 일? 에즈라는 그녀의 말을 입 모양으로 따라
하다가 고개 숙여 낮게 웃었다.
“잘 가릴수 있겠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티아를 따라 들어선 하녀 하나가 목례하며 대답했다. 그녀의
차분한 태도를 믿음직한 눈으로 바라본 라티아는 몸을 돌려
멍하니 서 있는 에즈라의 손을 꼭 붙들었다.
“에즈라 님, 어렵겠지만 자리해 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오늘 밤
제 탄일을 기념하여 연회가 열리거든요. 황실의 일원과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꼭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를 초대하시는 건가요?”
“네. 당연한 일인걸요. 그런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으시길래
이리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거예요.”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묻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정말이지. 너무도 자신감에 찬. 고귀한 여인만 가질 수
있는 여유롭고 우아한 태도로.
듣지 못했어요.”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아마 병사들이 중간에서 말을 잘라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게
지나치게 씁쓸했다.
“그런 것 같네요.”
엉망진창인 방 안을 쭉 둘러보던 라티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에즈라는 그녀와 맞잡은 손을 빼냈다.
“저는 근신 중이라 어려울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에즈라 님의
근신은 오늘로서 풀렸어요.”
라티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즈라가 고개를 쳐들었다. 돌연
뒤바뀐 태도에 놀란 라티아가 한 걸음 물러섰지만 에즈라는
바라고 바라던 일이 믿겨지지 않아 급히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히폴로테스 님께서 저를 풀어 주신
건가요?”
“네. 탄일을 맞아 갖고 싶은 것을 물으시길래 제가 직접 에즈라
님의 근신 처분을 거둬 달라 부탁드렸어요.”
차분하게 이어 나가는 대답. 그 모든 대목에서 에즈라의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느리게 깜빡이는 시선 사이로 더없이 환한
미소를 걸친 라티아가 선명해서. 그녀의 행복이 너무 깊게 전해져
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흔쾌히 받아들이셨고요. 제가 만족하면 그걸로 되었다고도
하셨죠.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정말……잘됐네요.”
낮게 중얼거린 그 말만이 진심이었다. 그만큼 부러웠다.
아무런 죄 짐 없이 순간의 행복에 잠길 수 있는. 티끌 한 점 없는
순백의 삶을 걸어 나갈 게 분명한 여자가.
단 한 번의 부탁이 수백 번의 비명을 구원해 주었어.
“ 감사해요.”
꽉 멘 목구멍을 열어 힘겹게 말을 건넸다.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티아가 아니었다면 여기서 죽어 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리면 안 되니까.
“당연한 걸로 인사를 받으니 제가 다 부끄럽네요. 자, 뭐 하고
있는 거니. 어서 에즈라 님을 모시지 않고.”
“ 예.”
줄 지어 들어선 하녀들이 에즈라의 팔을 이끌어 앉은 적 없던
의자에 앉혔다. 먼지 낀 거울에 비친 모습은 누구와 달리 너무도
초라해서 눈을 감았다. 얼굴 위로 와 닿는 손길들을 느끼며
멍청하게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고 또 참았다.
혹시라도 주책맞은 눈물이 홀러내려 참아 왔던 모든 걸 망쳐
버릴까봐.
연회가 열린 밤은 달빛이 무안할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개방된
파시아궁은 라티아가 좋아한다는 장미로 가득 꾸며져 있었다.
생각지 못한 부분에 라티아는 홀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을
내질렀다.
“이럴 수가! 너무 예뻐요.”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때가 맞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가능한 일이었습죠. 그러니 이 모든 건 라티아 님
덕입니다.”
연회를 맡아 주관했던 루펠 가문의 양자가 예를 갖추며 친근히
설명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 어린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던 라티아에게 다른 가문의 귀족들이 모여들자 그녀는
단숨에 사람들에 둘러싸였다.
“어쩜 오늘따라 더 빛이 나십니다. 매일같이 아름다워지시는
방법을 좀 나누어 주세요.”
“당연한 걸 물으십니다. 여인에게 사랑 만한 것이 있나요.”
한데 모인 귀부인들이 팔꿈치로 찌르며 웃음기 섞인 말을
나누자 중심에 선 라티아는 조신하게 미소 지었다. 기품 있는
태도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달콤하고
번지르르한 말들을 지껄여 댔다.
“별다를 것 없답니다. 히폴로테스 님께서는 원체 성정이
다정하신 분이라…… 그리 말씀하시니 부끄러울 따름이네요.”
그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라티아와 귀부인들의 말을 몰래
엿듣던 에즈라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어리숙하게 손끝을
맞잡았다. 다정한 사람. 라티아는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 했다.
그녀에게는 한없이 상냥하고, 모든 걸 내어주는 그런 사람이라고.
내가 당신에게 그랬듯이. 그게 무엇이든 다 해 줄 수 있는
거라고.
“ 읏!”
멍하니 생각에 잠겨 길목에 서 있던지라 에즈라는 지나치던
남자와 어깨를 부딪히고 말았다. 하필이면 아픈 어깨를 건드린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자 라티아에게 향해 있던
시선들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쏠렸다.
아픔을 깨닫기도 전에 창피함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아차
싶었던지 정중히 손을 뻗던 남자는 에즈라의 차림새를
살펴보더니 곧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이곳에 모인 어떤 귀부인과 영애들보다도 훨씬 작은 몸집과
단출한 남색 키톤. 그 누가 보아도 하녀라 오해할 정도였기에
그가 의문을 품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녀? 너 초대받은 손님은 맞는 거냐?”
하대를 하는 목소리에 의심이 서렸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의 남자. 그것은
오만하다기보다는 날것의 느낌이 강했다. 그래, 이 남자도
딱히……귀족적이지는 않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수근거림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에즈라는 눈을 홉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