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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46화 (46/113)

46화

“그럴 리가. 다 너를 위함이지.’’

아버지의 야망을 모르지 않았다. 긴 시간 동안 황족을 쥐고

흔들 권력을 얻기 위해 어떤 짓을 해 왔는지도. 나를 위한 것이라.

악랄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할 때마다 해 대는 그럴듯한 변명 또한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라티아, 갖고 싶으면 그만큼 발버둥 쳐라.”

흥분을 가라앉히려 숨을 몰아쉬자 아브타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쐐기를 박았다.

“네가 마녀라 손가락질하는 망국의 공주처럼 사람을 죽일

정도는아니더라도……"

‘그래, 누군가를 상처 입힐 정도의 결단은 해야 하지 않겠어?’

아브타크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라티아는

부산스럽게 굴었다. 이불을 덮은 채로 몇 번이나 뒤척거리자

히폴로테스는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 촛불의

불꽃이 그의 움직임에 꿈틀댔다.

오늘따라 귀찮게 구는 여자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안 그래도

에즈라를 안지 못해 신경이 한껏 곤두서 있는 상태였기에 힘겹게

감정을 내리누르며 입을 뗐다.

“오후에 아브타크와 만남이 있었다고 하던데.”

짧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자 기다렸다는 듯 라티아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 건강을 염려하신 모양이에요.”

“그 일에 관해서는 내가 할 말이 없어요. 다시 한번 미안해요.”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표정에 라티아는 크게 안심했다. 마치 할

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히폴로테스가 눈짓하자 라티아는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에즈라 님을 우선시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는걸요. 그리

큰일도 아니었구요. 아버지는 안부 인사 겸 만난 일이니 걱정

마세요.”

모를 줄 알고 하는 말이라면 더없이 멍청하긴 했다. 위선적인

말에도 빙긋 웃어 보인 히폴로테스는 상냥하게 물었다.

“며칠 후면 탄일이죠?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갖고 싶은 건 아니고…… 원하는 게 있어요.”

“에즈라 님의 근신을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분을 초대하고

싶어요.”

다시금화두에 오른 이름에 히폴로테스의 입꼬리가 멈칫했다.

생각 없이 웃어 보이는 게 힘들어 고개를 틀자 자신을 집요하게

살피는 라티아의 눈길이 느껴졌다.

나설 용기는 없으면서 침만 질질 흘리는 개.

쥐여 준 것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가증스러운 여자에게 환멸이

이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브타크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의심스럽습니다.

굴러가는 상황이 좋지 않아요. 움직임이 잠잠해질 때까지

황비님께 걸음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코스와의 대화를 회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느릿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늘상 옆에 두고 있던 칼로 손을 뻗었다.

여전히 달려 있는 천 조각. 그것에 새겨진 이름을 지분거리며

티끌 같은 평온을 좇는다.

습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도 잠에 들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고 싶으면 그리해요.”

“진정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잠시 얼빠진

얼굴로 되묻던 라티아는 잔뜩 들떠 단정한 머리칼을 매만졌다.

여기서 모든 것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는 법. 히폴로테스는

악문 잇새로 덧붙였다.

“당신이 부담스러우면 말고요.”

“아뇨, 아뇨. 부담스럽지 않아요.”

“만족한다니 저도 기쁘네요.”

“정말 감사해요. 히폴로테스님.’’

수줍게 얼굴을 붉혔으나 그의 시선은 여느 때처럼 창밖을 향해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도, 침상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단 한 번의

품도 허락하지 않았으나 어려운 부탁을 선뜻 허락해 준 탓일까.

라티아는 떨리는 맘을 다잡으며 용기 내어 말을 꺼냈다.

“저……하나 더원하는 게 있어요.”

“말해 봐요.”

“입, 맞춰 주세요.”

다행히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으나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쿵쾅거리는 심음과 속절없이 달아오르는 얼굴.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 후회가 막심했다.

되었다 말하기에도 이미 늦은 상황에 이불자락만 꼭

움켜쥐는데 그가 선뜻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침 새어 들어온 달빛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를

비추었다. 눈가에 닿아 찰랑이는 시린 은발. 남성적인 턱선이

그림자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매끈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모든 순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갖고 싶은 열망이 심겨진 그날처럼 남자의 손끝은 차가웠다.

뺨을 감싸 온 커다란 손에 온기를 찾듯 얼굴을 부비자 적막

속으로 짧은 웃음이 스며들었다. 곧 다가올 입맞춤을 한껏

기대하며 라티아는 눈을 감았다.

“ 미안하지만.”

“……네?”

코앞에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요염했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치고는 냉혹했다. 평소처럼 대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데 죽어도 듣고 싶지 않았던 기만이 이어졌다.

“꼴리지가 않네요.”

존귀한 이가 입에 담은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이나

저속한 말이었지만 단번에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를

보는 눈에 나를 닮은 열망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충격에 얼어붙은 라티아의 눈꺼풀이 파들파들 떨렸다.

자존감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당혹감 뒤로

비참함이 사무쳐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이미 들켜 버린 연기를 접었다.

“음…… 아무래도 지금은. 내가 없는 게 낫겠죠.”

틈 하나 없는, 평생 얼어붙어 있을 것만 같은 냉혹한 남자는 채

대답하기도 전에 미련 없이 뒤돌아 멀어져 갔다. 라티아는 그런

그를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챙겨 오던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아브타크가

남기고 간 말이 귓가를 울렸다.

‘라티아. 갖고 싶으면 그만큼 발버둥 쳐라.’

어느새 문은 소리 없이 닫혀 있었다. 너무도 깨끗한 자신의

침의를 더듬던 라티아는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젠장. 또야?”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한편. 이른 아침부터 별궁은 소란스러웠다. 요 며칠 매일같이

이어지는 공방전은 양쪽 모두를 지치게 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늘 홀 한구석에 누운 채였고 그런

저를 병사들은 하나같이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몸

이곳저곳에 생채기가 나 있는 것 또한 하루 이틀 일이 아님에도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더 억울했다.

“죄송하지만…… 이것 좀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두 손이 밧줄로 꽁꽁 결박된 에즈라는 급히 자신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얇은 침의만 입은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진 꼴이

부끄러워 몸을 옹송그리자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은 같잖다는 듯

사납게 내뱉었다.

“지금 장난합니까? 벌써 며칠쨉니다. 며칠째 매일같이 말썽을

일으키고 계시잖습니까!”

“나는, 나는 몰라요. 자꾸만 눈을 뜨면 다른 곳에 와 있단

말이에요. 성가시게 했다면 죄송하지만 저는 진짜 모르는

일이에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새벽마다 문 열어라 소리 지르고. 잠깐

눈 돌리면 밖으로 나와 소란이란 소란은 다 피우고. 어젯밤에는

뻔히 대화까지 나눴으면서 발뺌하시는 겁니까?”

이어지는 말에 에즈라는 기함하며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로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대체 저들이 왜 이러는지

모를 정도로. 하나도 짚이는 게 없는 터라 그저 눈앞이 캄캄했다.

“저는정말로기억이……”

“이젠 저희도 못 참습니다. 자꾸만 이러시면 당장이라도

히폴로테스 님께 말씀을 올릴 수밖에 없어요.”

“아,안돼요!”

히폴로테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에즈라는 벌레처럼 몸을

꿈틀댔다. 처절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애처롭게 빌기 시작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러니까 제발……

히폴로테스 님께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네?”

“그러니까 저희 말을 잘 따르란 말입니 다.”

“네. 네. 그럴게요.”

유순한 대답에도 병사들의 태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짐짝

다루듯 일으킨 이들이 마구 어깨를 밀어 대자 걸음마다 멍 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다 힘이 풀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들은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찼다.

모든 게 달리 지켜보는 눈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기……저 그러니까요.”

“뭡니까.”

“셀리는 잘 있는 건가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못 만났거든요.

차. 찾아오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못하고.”

제발 대답해 주길 기도하며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묘한 침묵을 참지 못하고 에즈라는 어설프게 말을 이어 갔다.

“그것만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어디 있는지는 아니어도.

괜찮은지 벼, 별일이 없는지 정도만……!”

“조용히 하십쇼!”

일순, 복도를 울리는 커다란 외침에 머리칼이 쭈뼛 섰다. 너무

놀라 돌처럼 굳어 마른침만 삼키자 그런 에즈라를 내려다보던

병사는 혐오를 감추지 않으며 또다시 소리쳤다.

"제발 좀 가만히! 가만히 있으란 말입 니다.”

병사는 마치 발작하듯 몸을 비틀며 눈을 부라렸다.

“안 그래도 당신 때문에 여기 있는 모두가 눈칫밥 먹으며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데!”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후려갈길 듯한 태도에 에즈라가 잔뜩

겁을 집어먹자 더욱 의기양양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병사는

사냥개처럼 이를 드러내며 그녀를 겁박했다.

“당신 때문에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매일같이 불려 가

추궁당하고. 당신이 도망간 그날 이후로 눈 밖에 나서 이제

진급은 꿈도 못 꾸고!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평생을 당신 같은

여자 호위만 하다가 죽게 생겼다고.’,

“미, 미안해요. 정말 그러려던 건 아닌데.”

“네가 알아? 여기 있는 사람들 심정을 아냐고!”

“이봐, 말이 너무 심하잖은가!”

"너는 닥치고 빠져! 네놈이야 이빨 빠진 늙은이니 그렇겠지.”

야망 덩어리인 젊은 병사는 혈기를 못 이기고 발을 구르며

욕지거리를 해 댔다. 소란을 방관하는 병사들 중 늙은 병사의

편을 들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속 시원하다며

바닥에 퉤, 침을 뱉거나 에즈라의 드러난 팔다리를 흘깃거리며

휘파람을 불어 댈 뿐이었다.

완벽한 조롱에 익숙해진 탓일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에

움츠러들면서도 에즈라는 꿋꿋이 물었다.

“셀리는 안전한 거죠?”

“이거 진짜 미쳤네.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지? 볼모로

기어들어 온 주제에 귀한 년이라고 말씀 올리고 조금 대우해

주니까. 별 거지 같은 게!”

에즈라는 곧 마지막 말을 후회했다.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찬

병사는 치미는화를 참지 못하고 손을 치켜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매서운 손찌검이 뺨을 강타하자 에즈라는 넘어지는 것도

모자라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뺨에 번개가 친 듯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화끈거리고 얼얼한 통증에 넋이 나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말마의 신음을 흘리며 일어서려 했으나 이내 팔에 힘이 풀려

다시 어푸러지고 말았다. 넘어지며 잘못 짚은 것인지 팔목은

욱신거리고, 바닥에 부딪힌 어깨 또한 아려 왔다.

차마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낑낑거리자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던 병사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젠장, 일어나!”

나동그라진 에즈라를 신경질적으로 일으킨 병사는 마치 홈집

난 물건을 살피듯 몸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어깨나

손목이야 옷으로 가릴 수 있다 하더라도 벌겋게 부푸는 뺨은

시퍼런 멍이 자리 잡을 게 분명할 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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