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죄, 죄송합니다.”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라티아의 부드러운 물음에 셀리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지만 되돌아온 것은 차디찬 질책이었다. 자신
때문에 에즈라가 곤경에 처한 게 분명했으므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곧장 무릎을 꿇으려는데 옆에 서 있던 에즈라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히폴로테스의 시선을 차단했다.
“답답해서 제가 먼저 나가고 싶다 며칠을 졸랐습니다.”
“셀리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그랬는데도 제 부탁을 외면하지
못해서, 그래서……,”
끌어모았던 용기는 어디 간 걸까. 에즈라는 어물어물 내놓던
말끝을 흐렸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히폴로테스의 눈치를
보자 끊길 듯 팽팽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히폴로테스가 걸음을 뗀 그때였다.
“에즈라 님 !”
커다란 외침에화들짝 놀란 에즈라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문을 부술 듯 밀어닥친 이들은 병사들이었다. 총 다섯인
그들은 저를 찾아다녔던 것인지 땀에 푹 젖은 상태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멀찍이 서 있는 히폴로테스와 라티아에게
닿자 그들은 곧 더할 나위 없이 퍼렇게 안색이 질려 갔다.
나어린 병사는 오줌이라도 지릴 듯한 모양새로 굳어 다리만
덜덜 떨어 댔다.
젠장, 누군가 그리 속삭이는 것도 같았다.
“여, 여기 계셨습니까. 갑자기 사라지셔서 저, 정말
놀랐습니다.”
개중 우두머리같이 보이는 병사 하나가 어설프게 움직거리자
히폴로테스는 오만한 미소를 걸쳤다.
“뭐 하고 있는 거지? 황비를 잡아라.”
“예? 아, 예!”
마치 죄인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멈칫거리던 병사들은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에즈라의 양팔을 잡아 고정했다. 졸지에 뒤로
밀려난 셀리는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에즈라를 조금이라도 황비라 여긴다면 아랫것들이 보는
곳에서 이리 대우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에 비해 너무한 처사였다.
“명을 어기고 멋대로 행동하다니;
휘적휘적 다가온 히폴로테스가 고개 숙인 에즈라를
내려다보며 연극조로 말을 이었다.
“황비를 걱정하는 제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다니 속상하군요.
고개를 드세요.”
“저, 히폴로테스 님 !”
홍홍해지는 분위기를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라티아는 키톤
자락을 말아 쥐고 히폴로테스를 향해 달려갔다. 뒤에 선
라티아가 가슴팍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는 동안 히폴로테스는
사나운 손속으로 에즈라의 턱 끝을 잡아 들어 올렸다.
말간 눈동자에는 늘 그렇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예상했던 모습에 그는 에즈라의 목덜미를 남몰래 지분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벌을 주고 싶었다. 절대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못하게. 꿈도 희망도 꿀 수 없게. 그렇게 망쳐 버리고만 싶었다.
“선택해요.”
그는 꼭 잔혹한 짓을 하기 전이면 다정하게 웃어 주곤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 속, 그의 분노를 여실히 실감해서일까.
이토록 공포스러울 수가 없다. 에즈라는 더듬거리며 겨우겨우
물었다.
“무, 무엇을요?”
“저 하녀의 피를 볼까요, 그게 싫으면……"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흥미로운 눈동자가 셀리를 스쳐 지나가
다시 되돌아온다. 굳어 가는 피처럼 눅진해진 눈동자는
서늘하다. 그가 에즈라의 창백한 뺨을 엄지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대신 뺨을 맞는 건?”
“히폴로테스 님! 과한 처사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던 라티아가
끼어들었다.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여자에게 환멸이 일었지만
그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한 후 에즈라만을 살폈다.
“뺨을, 뺨을 때려 주세요.”
그리 애원하는 눈동자가 퍽 간절하다. 혹시라도 그의 마음이
변할까, 수치스러운 말을 고민 없이 내뱉으며 털썩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에즈라를 그는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리 원하니 어쩔 수 없네요.”
“네, 네.”
“벌을 내리는 내 마음도 헤아려 줬으면 좋겠어요.”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한 걸까. 그는 둘만 있을 때와 다르게
상냥하게 웃어 주었다. 눈을 마주친 순간, 허공을 가르는 그의
움직임이 느리게만 보였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곧 닥쳐올
아픔을 기다리는데 얼굴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졌다.
이윽고 울려 퍼진 섬찟한 마찰음은 제 것이 아니었다.
“훗!”
“라티아 님!”
이름에 깜짝 놀라 눈을 뜨자 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라티아가
보였다. 얼마나 세게 내리친 것인지 주저았은 라티아는 고통에
신음하며 자신의 뺨을 감싸 쥐었다.
“괜찮아요?”
멀리서 달려오는 제논과 이름 모를 남자가 보였다. 다시
시선을 가까이 하자 잔뜩 인상을 쓴 히폴로테스는 바닥에
넘어진 라티아를 부축해 일으키고 있었다.
“미련한 짓을 했어요.”
“처사가 과하셨어요. 에즈라 님은 제국의 황비님이셔요.”
라티아가 그럴듯한 말을 지껄이며 체면을 차렸다. 어울리지
않게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에즈라와 자신의 사이에
끼어들다니.
늘 고상한 척, 조금의 틈도 내보이지 않던 라티아의 속셈은
“번했다. 이것을 미끼로 분명 다른 것을 요구해 올 것이다.
히폴로테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경멸을 감추었다.
“그래요……내가 생각이 짧았네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은 자신을 논했다. 얼굴 가득
걱정을 담은 히폴로테스는 너무도 낯설어서. 부드럽게
라티아의 뺨을 감싼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에즈라는 그의
살벌한 눈길을 마주하곤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서로를 생각하고 또 바라보는 오직 두 사람만의 세상. 그것을
깨닫자 우습게도 뺨을 맞은 이가 나이기를 바라고 말았다. 늘
내게만 야속한 사람. 억울함에 말아 쥔 손안에는 촉촉한 흙만
가득 담겼다. 치미는 울화를 들키고 싶지 않아 에즈라는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가죠. 어서 가서 차가운 것이라도 뺨에 대야겠어요.”
“……네.”
히폴로테스는 조급하게 라티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 스쳐
지나갔다. 싸늘하게 이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 눈앞에서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터놓을 수 있었다.
“이제야 인사드립 니다. 테르모스라고 합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단정한 목소리의 주인은 아까부터
히폴로테스의 뒤를 지키던 남자였다. 어깨에 꽁지가 긴 검은
새를 얹은 남자는 무척 수더분한 인상이 었다.
“……에즈라예요.”
“예. 알고 있습니다.”
조금 늦게 나온 대답에 그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가
히폴로테스 쪽과 주저앉은 에즈라를 번갈아 보며 고민하자
옆에 서 있던 제논이 먼저 가라며 눈짓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길게 인사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이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에즈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대강
훑어본 테르모스는 재빠르게 히폴로테스의 뒤를 쫓았다. 그가
멀어지자 홀로 남은 제논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무릎이 까지셨습니다.”
“이미 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은 버리지 않으셨네요.”
멀어지는 히폴로테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즈라가
중얼거렸다. 뭘 버리지 않았다는 걸까. 뚱딴지같은 대답에
제논은 멀뚱히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에즈라는 말없이 히폴로테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떠올렸다. 번쩍거리는 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회색빛 천
조각이 하릴없이 흔들리던 것도.
에즈라는 그 칼을 알았다. 손잡이의 감촉과, 무게, 그리고
그것이 살을 가르는 감각까지. 손끝에 새겨진 기억을 더듬다가
서글픈 웃음을 짓고 말았다. 너덜너덜해진 채로도 여전히 묶여
있는 마음에.
“차라리 미련 없이 버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한참을 그리 서 있던 에즈라는 훌쩍이는 셀리를 알아채곤
그녀를 끌어안아 다독여 주었다. 두 여자를 지켜보던 제논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별궁까지 안내한 후에야 돌아갔다.
굳게 닫히는 문틈 사이로 잔뜩 신경질이 난 병사들의
욕지거리가 들려온다. 그러든 말든 붉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
두려워 침상을 파고들며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사랑은 혼자여도,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껍데기라도 가질 수
있어 다행이라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 나가야 했다.
“꼴좋구나.”
“탓하시려는 거면 이만 돌아가세요. 이미 충분합니다.”
마주 았은 채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뗀 이는
아브타크였다. 볕이 따가운 오후, 딸을 찾아 황궁 안에 든 그는
내어진 찻잔을 밀어 내며 턱을 괴었다.
“탓을 하고 또 해도 충분치 않으니 이런 것이지. 네가 망친 게
무엇인지, 얼마나 멍청하게 굴었는지 되새겨 주는 게 내
일이니까.”
“늘 바쁘신 줄로만 알았는데, 제게 신경 쓰실 여유가
있으신가 봅니다.”
살포시 눈을 내리깐 라티아가 찻잔을 쥐며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으나 아브타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뿐인 딸의 상처를 무시할 수 있는 아버지가 있을까.”
“세상에, 영광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농담하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단숨에 차갑게 돌변한 얼굴. 예상했던 태도에 라티아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잠잠히 아브타크의 말을
기다렸다.
“그 비천한 황비 말이다. 여기저기 입방아에 오르는 게 여간
아니더구나. 네 이름은 몰라도, 황비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정도야. 사람들은 으레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법이니까.”
미묘하게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말에 그녀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벼랑 끝에 내몰린 딸의 반응을 즐기며 아브타크는
목소리를 죽였다.
“그래. 미쳐 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냐?”
“사랑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남들을 희생시킨 여자예요. 겉은
유약해 보여도 안은 악독하고 잔인한 여자죠.”
미친 건지, 미친 척하는 것인지. 모르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라티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날카로운 시선을 외면하자
아브타크는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나는 말이다.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굽힌 적이 없어. 물론
네게도 말이야. 너는 내가 네 뜻을 받아들여 그를 황제로
선택했다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틀렸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아브타크는 몸을 기울여 라티아에게
불쑥 다가갔다. 입술을 질끈 깨무는 라티아의 귓가에 음습한
속삭임이 닿았다.
아내가 그를 선택한 거야. 너는 우연히 그를 사랑했을 뿐이고.”
“하고 싶은 말씀을 하세요. 더 이상 돌려 말하시지 말고요.”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라티아는 이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딱딱한 무표정을 고수한 딸과 아버지의 대립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덕분에 응접실 안 분위기는 싸하게
얼어붙었다.
잔뜩 날 선 태도에도 아브타크는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본론을 꺼냈다.
“곧 있으면 네 탄일이구나.”
“……놀랍게도 알고 계셨네요.”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 먹자는 주의라.”
그럼 그렇지. 체념한 얼굴로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브타크는 매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그 자리에서 황비를 짓눌러 버려. 네가 진정한 실세라는 걸,
네 뒤에 누가 버티고 서 있는지 제대로 보이란 말이야.”
아버지.”
“이 이상은 안 도보 그까짓 여자에게 밀리는 것도 모자라
허우적거리는 꼴로 가문에 먹칠을 한다면, 나도 다른 수를 쓸
수밖에 없다.”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