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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44화 (44/113)

44화

헐떡이던 숨이 잠시 멎었다. 사방이 어두운 침실 안, 울고

있던 여자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불붙은 분노에

눈이 뒤집힌 남자는 그녀의 뒷목을 사정없이 짓누르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입 닥쳐.”

손을 떼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지 않았다. 더 고통스럽길

원해서. 더욱 원망하기를 바라서. 그래서 네가……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다고 해.”

어깨를 잡아 돌리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분이

가시지 않아 팔을 치켜들자 에즈라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움츠러들었다. 때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허공에 멈춘 손을

천천히 내린 히폴로테스는 눈물로 범벅된 에즈라를 살피며

짓씹듯 내뱉었다.

“한 번만 더 그딴 가증스러운 말 해 봐. 죽여 버릴 테니까.”

아무렇지 않게 악한 말만 쏟아 내는 남자를 미워할 수

없었다.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미워하는 순간, 완전히

파괴되는 건 나일 테니까.

셀 수 없을 정도의 열락이 지나간 후, 에즈라는 몽롱한

상태로 침상 위에 늘어져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친 상태였고, 바짝 말라 쉬어 버린 목에서는 단말마의

신음도 나오지 못했다.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이곳에 있어.”

소문? 에즈라가 없는 힘을 쥐어짜 상체를 들어 올리자 등에

덮고 있던 이불자락이 흘러내리며 가녀린 어깨가 드러났다.

그것에 시선을 고정한 히폴로테스는 쇄골 부근을 손끝으로

진득하게 훑으며 입을 뗐다.

“다 아는 소문을 당사자만 모른다니.”

오 0 수”

I “.

“네가 제논과 붙어먹는다는 소문 말이야.”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는지는 까맣게 몰랐다. 당혹감에 움찔

몸을 떨던 에즈라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 와 사실이

아니라 변명한다 해도 그는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믿을 필요조차 없겠지. 그에게 나는 발에 차이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처지 니까. 하등 쓸모없는 돌 따위에 관심을

쏟는 이는 없다.

“물론 나는 소문 같은 건 안 믿는 주의라. 확인할 것도

없지만.”

부정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에즈라는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인 채 침상 끝에 구겨져 있는

이불을 끌어당겨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온몸을 태울 듯 강렬했던 쾌락이 지나간 후, 느꼈던 가뿐함은

어디 가고 여자의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또다시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다가가 여봐란듯이 에즈라의 손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읏, 작은 신음과 함께 에즈라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그를 직시해 왔다.

난폭했던 정사의 향기가 공중에 떠돌았다. 히폴로테스는

거칠게 에즈라가 꼭 쥐고 있던 이불자락을 헤집고 씻!어 들었다.

드러난 가냘픈 어깨와 뚜렷한 쇄골, 그 아래 희뿌연 젖가슴까지 .

에즈라의 몸 곳곳에는 울긋불긋한 흔적이 빼곡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 놓은 잇자국을 손끝으로 짚어

나가던 히폴로테스는 마음을 놓았다.

“이것 보수. 네 몸에는 내 흔적들만 가득하거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허망한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이제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느껴서일까, 에즈라는 또다시 달려드는 남자를 마주

안았다. 너무나도 기껍지 못한 마음으로.

에즈라가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게 된 건, 일언반구 없이

발길을 끊은 제논 덕분이었다. 그가 더 이상 호위를 맡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온 셀리는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눈치를 보다가 울적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죄송합니다, 에즈라 님:

황제와 머무는 침실에서 쫓겨난 황비. 그리고 그 자리를 꿰찬

측실. 언젠간 이리될 줄 알았다며 황궁 안 사람들은 입을

놀렸으나, 사실 파격적인 행보가 아니라면 거짓말이었다.

전대 없는 박대에 모두가 라티아의 편으로 돌아섰고, 본래

황비의 것이어야 할 보물들은 그녀에게 돌아갔다.

그것뿐이라면 다행이건만. 황궁 전체에 정숙치 못한

황비라며 에즈라를 향한 비난은 커져 갔고, 그럴수록 진정한

황비는 라티아 님뿐이라는 칭송이 하늘을 찔렀다.

게다가 망국의 공주인 에즈라에게 눈길을 돌리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별궁은 반질반질하고

깔끔했지만 그만큼 텅 빈 채였다.

“셀리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답답하시지요? 날이 좋은데 커튼이라도 떼어

드릴까요?”

“걷어 둔 걸로도 충분한걸요. 고마워요.”

조그맣게 뚫려 있는 창은 본궁의 침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했다. 정원과 멀어진 거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창밖에 보이는 것은 별궁 밖을 둘러싼 병사들뿐. 그들은 지루한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 잡담을 하거나,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적거렸다.

저런 삭막한 풍경이 뭐 그리 볼 게 있다고 하루 온종일

달라붙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셀리는 깊은 한숨을 뒤로하며

부러 살갑게 말을 꺼냈다.

“아이참, 말씀 놓으시래도요.”

“그러려고 노력은 하는데……"

제국의 황비가 고작 하녀 따위에게 말을 낮추려 노력한다니.

처음에는 불편하고 솔직히 한심하게까지 느껴졌으나 에즈라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저자세를 유지하는, 조금

독특한 사람. 때마다 보여 주는 웃음에 마냥 해맑던 여동생이

떠올라서 더 마음이 쓰이는 걸까.

게다가 우물쭈물하는 말간 얼굴은 영락없이 수줍은

소녀였다. 그게 못내 귀여워 셀리는 눈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를 썼다.

“에즈라 님, 안되겠어요.”

“뭐가요? 말 놓으라는 거라면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아뇨, 아뇨. 그게 아니고요.”

“그럼…”?”

의아한 얼굴로 에즈라가 말을 늘였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좁은 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겨우 바람 한 점에 눈을 감는 에즈라를 보며 셀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은밀히 속삭였다.

“저희 몰래 나가 봐요.”

대답 대신 에즈라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뻣뻣한

움직임으로 창밖의 병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셀리는

어림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으며 당당히 외쳤다.

“벌써 며칠째예요. 저들도 기강이 해이해져 있다구요.

조심하면 분명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어요.”

정말 그런가? 에즈라는 눈살을 좁히며 다시금 병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 그런 듯도 싶었다. 에즈라의 흔들리는 마음을 눈치챈

셀리는 이때다 싶어 더욱 의견을 피력했다.

“무엇보다 에즈라 님은 하나뿐인 황비 님인데 뭐 어때요!”

“저를 가둔 건 히폴로테스 님인데요? 그분은 황제시잖아요.”

틀린 것 없는 에즈라의 말에 셀리는 잠시 침묵했지만 어깨를

으쓱이 며 그럴 듯한 말을 해 댔다.

“한창 집무가 바쁘셔서 모르실 거예요. 제게 맡겨 주세요.

별궁은 본궁보다 크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 들꽃이 가득한

들판이 있어요. 저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들꽃이 가득한 들판이라니.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조합에

에즈라는 뺨을 긁으며 고민했다. 과연 가능할까. 잡히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잠자리에서 거침없이 손을 치켜들던 히폴로테스를

떠올리자 두려움이 밀려들었지만 그만큼 반발심 또한 일었다.

“보세요! 날은 선선하고, 하늘이 높아요. 들꽃들은 이제 막

만개했는데…… 진정 나가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야 당연히 나가 보고 싶어요.”

“방법이 있어요. 이리로.”

망설이던 에즈라는 결국 의자에서 일어나 셀리에게

다가갔다. 셀리의 도움을 받아 자리옷 대신 보랏빛 키톤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옷자락을 매만지며 감동 어린 눈을 했다. 얼마

만에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춘 것인지 까마득한 탓이다.

“흰색이나 검은색은오히려 더 튈 거예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손을 맞잡은 두 여자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며 황금문을 밀어 보았다. 역시, 문 앞을

지켜야 할 병사들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제 말이 맞죠? 병사들은 별궁 밖만 지키면 된다 생각하고

있어요. 게다가 요즘 유행하는 도박에 모두 정신을 못 차려요.”

“도박이요?”

“돈을 걸고 하는 놀이예요. 하실 생각일랑 일절 하지 마세요.

황비님은 무조건 먹잇감이 될 인상이거든요.”

앞서가던 셀리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단호하게 일갈했다.

고개를 저어 보이는 게 아주 조금 얄미워 에즈라는 입을

비죽였다. 그렇게까지 얼빠진 인상인가. 남들이 보기에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으로 보인다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셀리와 손을 맞잡은 에즈라는 혹 병사가 갑자기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한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좁은

복도를 지나 길 모퉁이를 돌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잠시만요. 제가 먼저 내려가 확인할 테니 이곳에 계세요.”

셀리는 조심스레 사방을 살피며 계단을 내려갔다. 다행히도

주변에 병사들은 없었다. 하녀 몇몇이 흘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모두 제 할 일에 몰두하느라 셀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셀리는 눈에 보이는 한둘의 하녀들이 제 갈 길로 사라지자

이때다 싶어 팔랑팔랑 손짓을 했다. 용케 알아들은 에즈라는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셀리의 손을 붙들었다. 두 사람은

쏜살같이 숨겨진 뒷길로 들어섰다.

“이럴 수가, 진짜로 성공이에요!”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찰나가 영원 같던 그때, 앞서가던

셀리가 출구를 발견하고는 환호했다. 작달막한 나무문 앞에서

모험을 끝낸 아이들처럼 기뻐하던 두 사람은 벅찬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있는 힘껏 문을 밀어젖혔다.

그리고 곧 마주한 광경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셀리가 말한 대로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탁

트인 들판에 군집된 코스모스는 하늘거리며 벌과 나비를 꼬여

내고, 지나칠 수 없는 향기를 뿜어 댔다. 그뿐인가.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듯 웅장한 플라타너스 나무는 줄 지어 선

채로 인사하듯 가지를 흔들어 댔다.

“에즈라……?”

황궁이 이리도 좁았구나. 들꽃으로 조성된 길 중간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꽃밭에 둘러싸인 그들은

다정하게 거닐던 중이었는지 갑자기 착아온 불청객의 이름을

당혹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황스러운 건 에즈라도 마찬가지였다. 앞서가던 두 사람고누

그들의 뒤를 멀찍이 떨어져 따르는 이들을 살펴보며 눈만

껌뻑였다. 그대로 굳어 있기도 잠시, 에즈라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그곳에 모인 이들 중 태연자약한 이는 히폴로테스밖에

없었다. 별궁의 뒷구멍에서 튀어나온 에즈라를 발견한

히폴로테스는 어그러진 심사를 숨기려 여유를 가장했다.

감히 명령을 어기고 제 발로 도망쳐 나오다니. 주제에 깜찍한

짓을 벌이지 않았나. 가녀린 발목에서 흔들리는 보랏빛 키톤

자락이 창백한 피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려서일까. 한참

에즈라를 훑어보던 히폴로테스는 픽,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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