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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43화 (43/113)

43화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 하녀는 홱 고개를 돌려 셀리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발끈한 셀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들려오는 에즈라의 목소리에 바로 몸을 물렸다.

“제게도 알릴 수 없는 일인가요?”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시라는 황명이 계셨습니다. 한시가

급한지라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몇 마디 질책을 감당하려 굳게 마음먹었으나 돌아온 것은

기이한 희망에 찬 물음이었다.

“별궁이 라면 혹,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별궁은 황성 가장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가장 깊은 곳. 그 말을 듣자마자 불안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황망한 표정의 에즈라는 급히 고개를 돌려 탁 트인

창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붉게 물들어 가는 시야가

어지러웠다.

“이곳은 이제 라티아 님의 침실이 될 것입니다. 어서 짐을

옮겨라.”

“예!”

싹싹 긁어모아도 얼마 되지 않는 에즈라의 짐은 벌써 문밖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하녀의 명령을

따라 라티아의 침실을 지키는 병사들과 하녀들은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그녀가 즐겨 읽는다는 서적 따위를 품에 가득 안은 채

드나들며 침실을 꾸며 갔다.

“에즈라 님……"’

황비와 황제가 머무는 침실은 단 한 사람의 취향으로 하나둘

물들어 갔다. 마치 그 한 사람만 머물 것처럼.

급격히 차분해진 에즈라와 달리 셀리는 발을 동동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필 제논 님도 계시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생길 건 또 뭔가. 제논 님이 계셨더라면, 적어도 이런 망신은

당하지 않았을 터인데.

“이제 자리를 비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별궁까지는

저들이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여태 떠나지 않고 뭐 하고 있었냐는 듯 하녀는 겁을 상실한

것인지 에즈라를 똑바로 마주 보며 지껄였다. 분개한 셀리가

또다시 앞으로 나서려 하자 에즈라는 셀리의 팔을 움켜쥐고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히폴로테스 님의 명령이잖아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터져라 입술을 내리 문 셀리를 보며 에즈라는 세상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건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셀리가 물었던 입술을 놓자

에즈라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신화내 줘서 고마워요.”

“따르시지요.”

투구까지 쓴 수십 명의 병사들은 완전 무장 한 채였다.

키보다 긴 창을 각 맞춰 잡은 병사들은 마치 죄인을 호송하는

모양새로 에즈라와 셀리의 주변을 둘러쌌다.

든 것 하나 없어서일까. 내딛는 걸음은 흘가분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에즈라는 지금의 상황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소망이 이루어진 것만 같아

기쁘기마저 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깊은 밤. 온몸에 쏟아져 내리는 홍포한

정욕을 받아 내야 하는 지독한 나날들. 마치 벌을 주듯 머리채를

험하게 움켜쥔 채 허리 짓을 해 대는 그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그토록 바라던 아침이 오면 그는 쓸모없는 인형처럼

내버리고 떠나 버렸다. 남은 건…… 그가 지나간 곳마다 자리

잡은 크고 작은 멍과 붉은 낙인들뿐.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날들은 황폐한 모래알이 되어 마음을 긁어 내렸다.

“에즈라?”

“……도망치고 싶어.”

그를 피하고 싶었다. 혼잣말이 귓가를 파고든 순간, 에즈라는

자신의 속마음에 지레 놀라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맑고

우아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라티아가

서 있었다. 그녀의 뒤에 줄 지어 서 있는 하녀들을 훑어보기도

잠시, 라티아는 가까이 다가와 간단한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라티아 님.”

고개를 들어 마주한 에즈라는 안타까울 정도로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별궁으로 쫓겨나는 일이 퍽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라티아는 히폴로테스의 잔인함에 안심하며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넸다.

“미안하게 됐어요. 저 역시도 예상치 못한 황명이었답니다.”

“네, 네.”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에즈라는 넋이 나간 듯

보였다. 라티아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숨겨 두었던 오만함을

풍겼다. 부러 맞잡은 에즈라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작은 손등을 두드리며 같잖은 연기를 해 댔다.

“제가 직접 부탁드린 건 아니라는 사실만 알아주세요.”

“네, 알아요. 저는 뭐든 상관없으니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그럼 편히 지내세요.”

“감사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를 돈 에즈라는 마치 도망치듯

라티아의 손을 떨궈 낸 후 병사들을 뒤쫓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옆에서 흥분에 차 무어라 말하는 셀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에즈라 님, 괜찮으세요?”

‘혼자두지 말아주세요.’

언제부터였나. 혼자 남기 싫다며 그의 애정을 갈구했던

자신은 어디로 간 걸까. 그를 위해 망설임 없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켰으면서. 겨우 이 정도 괴로움에 힘겨워하다니.

사람이라면, 적어도 사람이라면 이래서는 안 되었다.

“어 떡해 ! 많이 안 좋으신 거죠. 네?”

“괘,괜찮아 셀리. 정말 괜찮으니까……"’

부축하는 손을 다독이며 괜찮다 몇 번을 중얼거리다 보니

별궁 앞에 다다른 후였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사방을 가로막고 있던 병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흩어져 길을

냈다.

앞에 내어진 길 끝에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즈라는 익숙한 발끝에서 시선을 올려 새하얀 클래미스

자락을 보았다. 고개를 높게 들어 올려야만 마주할 수 있는 붉은

눈동자는 벌써 가까이에 와 있었다.

“히폴로테스 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까딱인다. 가리킨 곳은

이제부터 그녀가 머물게 될 별궁이었다. 훨씬 작고 초라한, 그

어느 날 불에 타 죽어 버린 어머니가 머물렀던 그곳.

“밤이야.”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뺨을 감싸 주었다. 식어 버린 뺨에

닿는 손바닥이 불붙은 것처럼 뜨거워서 에즈라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이 터져라 주먹을 쥐었다.

“사랑해요.”

다짐하듯 건넨 말. 눈을 내리깐 에즈라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머리 위로 신랄한 비웃음이 쏟아져 내리자

에즈라는 안도감에 그제야 숨을 터놓았다.

세상에 이리 혐오스럽고 이기적인 인간은 또 없을 것이다.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살아가겠다 큰소리칠 땐 언제고. 겨우 이 정도 괴로움에 약한

소리를 해 대는 나는…… 나 같은 건 그냥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유약한 손목을 움켜쥔

히폴로테스는 성큼 별궁으로 나아갔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홀을 지나 침실로 들어설 때까지 에즈라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따라잡기에 너무 벅찬 큰 보폭에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그를 따랐다. 발가락 끝과 발꿈치가 살짝 붉어졌으나 두 사람

모두 그런 것에 신경 쓸 새는 없었다.

황금색 문이 닫히기 무섭게 그는 안달 난 사람처럼 에즈라를

침상으로 몰아붙였다. 지나치게 커다란 체격에 밀려 침상에

눕게 된 에즈라의 위를 그가 떡하니 차지했다. 언젠가부터 눈을

마주하지 않는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난폭한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익히 알고 있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에즈라는 찾아올

고통을 받아들이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았다.

“아, 아직 이른 저녁이에요. 무엇보다 침실에서 라티아 님이

기다리고 계셔요. 정리가 다 끝났을 테니 가셔서 먼저 식사를

하시는게……"

“지금나보고 꺼지라는 거야?”

“……그럴 리가요.”

그가 같잖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당기며 빈정거렸다. 길쭉한

손가락이 가슴을 꾹 짓누르자 몸이 경직되고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으읏.”

“누가 입혀 놓은 건지는 몰라도 꽤 좋은 선택이었어. 너는 이

정도 차림새가 적당해. 밖을 나돌아 다닐 필요 없이, 이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네 삶의 전부니까.”

어깨에 고정된 피불라를 그가 툭 건드리자 키톤 자락이

어깨에서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너무 쉽게 드러난 가슴이

민망해 급히 한 팔로 가슴께를 가렸으나 풍만한 가슴은 다

가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이로 비치는 살결은 더욱

야살스러웠다.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에즈라는 힘 빠진 목소리로 물어 왔다.

“어째서 저를 가두시는 건가요?”

“라티아도 똑같은 말을 하던데. 왜 다들 그리 부정적인 건지.”

“저, 저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요. 지금보다 훨씬 더 있는 듯

없는 듯 지낼게요. 그러니까 제발…… 가두지는 말아 주세요.”

의연하게 대꾸했으나 돌아온 반응에 히폴로테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단숨에 살벌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가 에즈라의 턱 끝을 잡아 자신에게 고정했다.

“히폴로테스 님, 제발요. 히폴로테스 님께 피해 가는 일 없게

조심하고 또 조심할 테니까……

“에즈라, 그새 올챙이 적 기억을 잎은 모양이야.”

“티텐에서는 그 황량한 돌탑을 세상 둘도 없는 요새처럼 여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근원을 알 수 없는 격렬한 분노. 달빛을 받아 미려한 남자의

손이 꺾일 듯 가느다란 목을 감싸더니 꽉 조여 오기 시작했다.

좁아지는 숨통에 머리끝까지 열이 몰리는 건 당연하다. 허나

벅차 오는 호흡에도 에즈라는 차마 그의 손등을 해할 수 없었다.

홀로 고통을 감내하는 에즈라를 즐기며 그는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나는 너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뿐인데.

이러면 내가 섭섭하잖아.”

그가 손을 거두기 무섭게 입술을 겹쳐 왔다. 섞이는 숨결

사이로 눈물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는 에즈라의 얼굴을 새기며 그는

움직였다. 이상하다. 기억을 되짚고 또 뒤져 봐도 이 여자가

웃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정한 척, 손을 뻗을 때마저도 에즈라는 울었다. 내 손길

안에서는 항상 이렇게 울기만 했어.

“습관처럼 울지 마.”

히폴로테스의 반듯한 얼굴이 칼에 찔린 사람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고통을 주면서 쾌락에 몸부림친다. 열기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눈물처럼 방울져 떨어지자 에즈라는 손을

뻗어 그를 훔쳐 주었다.

“맘대로 손대지 마.”

턱 끝에 닿아 오는 손길을 매섭게 쳐 낸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당기더니 명령했다. 곧 부어오르기 시작한 여린 손등을

모른 척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봐 봐, 네 쓸모는 아직 남아 있어 에즈라.”

무엇이냐고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흐려지는 시야와

먹먹한 귓가. 그가 잔뜩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움켜쥐며

다시금 입술을 겹쳤다. 입 안을 한참 어지럽힌 후 떠나간 입술은

자신의 타액으로 번들거 렸다.

“……홋.”

“나처럼 조금 더 애써 보는 게 어때. 밥만 축내는 건, 너와

나를 위해 죽어 간 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잖아.”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치 짐승을 길들이듯 저를

몰아붙였다. 미미한 고백이 흘러나온 건, 그가 휘몰아치는

감각에 떨던 그때였다.

“……사랑해요.”

내게 준 배신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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