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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42화 (42/113)

42화

“제대로 일러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던 것뿐이에요.”

“세심한 충고 고마워요.”

기분 나빠 할 것이라고, 적어도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까

싶었건만. 그가 취한 태도는 너무도 예상 밖의 것이라 라티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여느 때처럼 간결한 인사를 남긴 채, 그는 가뿐한 걸음을

옮겼다. 아침 볕에 환히 빛나는 은빛 머리칼은 어느새 바싹 말라

목 부근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선물처럼 남기고 간 입맞춤은 곧 희망 고문이 되었다.

그는 완벽한 황제가 되기 위해 의무에 충실한 것뿐. 어쩌면

정말 에즈라 같은 건, 그에게 안중에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문이 완전히 닫히자 히폴로테스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시간을 보내던 그의 어깨가

곧 들썩였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오자

히폴로테스는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끅끅거렸다.

상황이 이토록 재미있게 흘러가는데 웃지 않을 수가 있나.

자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내던진 수가 겨우 에즈라 그

여자라니. 우스운 꼴이다.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지.”

히폴로테스는 시원하게 트인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다시금 풋,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몸을

곧추세운 히폴로테스가 턱을 들어 올리자 시린 무표정이

드러났다.

누가 보았다면 미치광이처럼 보일 정도로 감정 기복이 널을

뛰었다. 싸늘하게 굳어 버린 표정을 고수한 히폴로테스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복도를 벗어났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를 매만지던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히폴로테스님. 오셨습니까.”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야.”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다 하시네요.”

먼지 한 톨 날리지 않는 널따란 집무실 안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카코스가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수북이 쌓여 있는 양피지를

발견한 히폴로테스는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의자에 털썩 자리한

그는 테이블 가득한 것들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카코스를

노려보았다.

“네가 처리해도 되는 일까지 보고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함부로 결정할 사안은 아닌 것 같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건……그럴 만하네.”

히폴로테스는 가장 위에 올려져 있던 양피지를 잡아 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데모스 가문의 아브타크. 라티아의

아버지이자 웬만한 귀족들을 쥐락펴락하는 제국의 실세 중의

실세.

데모스 가문을 등에 업는 자는 황제가 될 것이다. 모두가

황자들을 둘러보며 그런 이야기를 해 대던 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별 볼 일 없던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형제들의 피로

목욕하는 것 말고 또 어떤 수가 필요했던가.

히폴로테스는 남성적인 턱선을 검지로 은근히 쓸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매력적인 눈꼬리가 휘어지자

유혹적인 새빨간 눈동자는 더욱 돋보였다. 자신을 잘 아는 만큼

그는 어떤 이의 눈길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분명 이 얼굴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아름답나?”

“예? 그, 그야 아름다우십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흔치 않은 은빛 머리칼과 강함을 증명해

내는 붉은 눈동자는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이끌리고 마는

것이었다. 카코스는 오늘따라 더욱 눈부신 미모를 감상하다가

퍼뜩 의뭉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헌데 갑자기 그런 것은 왜 물으십니까? 평소라면 달리 관심을

두지 않으시잖습니까.”

“내게 황제의 자리를 선물해 준 일등 공신이니까.”

더욱 이해 가지 않는 말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는 카코스를 보며

히폴로테스는 들고 있던 양피지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턱을 괸

채로 무료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적, 우연한 계기로 라티아를

처음 만난 날.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여자를 보며 그는

희망, 비스무리한 것을 느꼈더랬다.

그것뿐인가. 잊혀지지 않는 순간은 하나 더 있었다. 에즈라, 그

너절한 여자를 처음 만나 손끝을 맞잡았던 찰나. 자신에게

사로잡힌 얼빠진 얼굴과 억누르지 못하는 열기가 맺혀 가던

연둣빛 눈동자까지.

모든 게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건 열망이 변모한 소유욕 따위가

아닌…… 처음으로 빛을 본 사람의 당혹감에 가까웠어.

“어쨌든 아브타크가 배신감에 휩싸이는 건 당연한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네.”

“그게 걱정이 됩니다. 아무리 히폴로테스 님께서 라티아 님을

총애하신다 하더라도. 그분의 위치는 황비가 아니라 측실이

아닙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외동딸이 망국의 공주

출신인 여인에게 밀린 꼴이니……?

“나를 탓하는 걸로 들리는데.”

“조금 성급하셨습니다.”

시선을 피하며 어렵사리 내뱉은 말에 충격적인 대답이

되돌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왕 성급한 거 한 번 더 성급하지 뭐.”

“ 예?”

답지 않게 되묻자 히폴로테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말했다.

“에즈라를 별궁으로 옮겨. 단단히 문을 잠그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 천하게 대우하면 할수록 좋겠지. 그럼

라티아의 위상은 조금 더 올라갈 테니까.”

여상한 말투에 카코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는 점점 더

속내를 알 수 없는 주군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 대우할

것이라면 애당초 에즈라를 황비의 자리에 올린 연유가 대체 뭔가.

사랑을, 마음을 모질게 배반한 남자가 거짓 약조 하나를 지키려

일을 꼬다니. 그답지 않았다. 미궁 속에 빠진 카코스는 불편하고

기묘한 위태로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정도라면 아브타크도 쉽사리 손을 쓰지 않을 거야. 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는 품고 있는 노인네라면 상황을 지켜보겠지.”

“적어도 시간은 더 벌게 되겠군요.”

“불만 있는 얼굴인데, 뭐 달리 할 말이라도?”

진정 말을 꺼내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도 잠시. 카코스는 눈을

단단히 빛내며 한 박자 늦게 입을 뗐다.

“주제넘지만 에즈라 님을 황비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생각은

없으십니까? 저로서는 굳이 어렵게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이니 노여워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무슨 뜻인지는 알아.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도 알고.”

고저 없는 목소리가 집무실을 나지막이 울렸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 감도는 은근한 분노가 느껴졌다. 눈치 빠른 카코스는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런데 주제넘었어.”

“예. 죄송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자 히폴로테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처리해야 할 일이 수십 가지건만.

습관처럼 집무를 뒤로하려는 움직임에 카코스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알 수 없이 뒤틀린

감정을 삭일 수 없었다. 히폴로테스는 마치 심통 난 다섯

살배기처럼 쌀쌀맞게 그를 스쳐 지나가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화를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 건가.

‘붙여 주신 호위 기사 말이에요. 너무 격이 없던데요. 천한

출생을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우습다며 대놓고 비웃었던 그 한마디가 살살 신경을 긁어 대고

있었다는 걸 더 이상 부정하기란 어려웠다.

‘황후를 지키는 기사가 감히 황후의 얼굴을 쓰다듬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요. 보고 있던 제가 다 민망하더군요.’

손을 댔다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손을 댔을까. 손가락

끝으로 작은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쓸어 보았을까. 세게 쥐면

찢어질 듯 보송한 뺨을 손바닥 가득 담았을까.

은밀히 지분거렸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히폴로테스는 문득 자신이 우스워졌다. 설마, 제논은 그럴 만한

이가 못 되었다. 여색에 무지한 건 둘째 치고 그 누구보다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수족이니까.

고개를 내저으며 불결한 상상을 털어 냈으나 자꾸만

머릿속에서는 제논의 손길에 뺨을 부비적거리는 에즈라가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길에 툭하면 눈물짓던

에즈라를 그리던 히폴로테스는 차갑게 일갈했다.

“카코스, 제논을 다시 복귀시켜.”

“복귀라면, 기사 단장 자리를 일컬으시는 겁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제논의 이름에 카코스는 급히 되물었지만

히폴로테스는 여전히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춰 있을 뿐.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랬나?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도록 해.”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에즈라 님의 호위는 어찌할까요?

테르모스보다는 데몰레온이 더 적합할 것 같기는 하지만……

달가워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카코스로서는 당연한 물음이겠지만, 심기는 더욱 꼬여만 갔다.

어차피 혼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하찮은 여자.

괜한 인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비틀린 미소는 이내 혼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반 병사들을 별궁 앞에 배치시켜. 명령이 있을 때까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도록 해.”

“……예.”

화풀이는 애먼 곳으로 향했다. 가혹하고, 정도가 지나친 처사라

생각하면서도 저 따위가 끼어들 만한 부분이 아니었기에

카코스는 정해진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하녀들이 침실에 들이닥친 것은 장미 정원에서의 꿈같던

시간이 지나간 지 고작 하루가 흐른 오후였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도 모자라 그녀들은 뭐가 그리도

급한지 제대로 예를 갖추지도 않았다.

덕분에화가 난 것은 에즈라가 아니라 셸리였다. 다 같은

하녀인 주제에 저리 방종맞게 굴다니.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지

않은가. 셀리는 여기저기 손가락질하며 아랫것들을 지휘하는

하녀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일언반구 없이 찾아오다니.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여기는 두

분의 침실입니다. 황제와 황비께서 머무시는 곳이란 말입니다!”

“네까짓 게 나설 일이 아니다.”

네까짓 거? 낮잡아 이르는 말에 잔뜩 미간을 찌푸린 셀리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눈을 치켜떴다. 자신이 모시는 이는 제국의

하나뿐인 황비였다. 셀리는 자신의 뒤에 멀거니 서 있는 에즈라를

곁눈질하다가 하녀를 노려보았다.

“제가 모시는 황비님의 일입니다. 이래도 내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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