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티 나게 눈살을 좁히던 라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쥐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노란 장미에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향기를 들이마시는 여자는 눈을 감은 채로 맑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지나치게 티 한 점이 없다. 저 순진한 얼굴로 어떤 짓을
벌였는지 다 아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굴다니.
사람이 저토록 몰염치해도 되는 걸까.
라티아는 고상하게 눈을 내리깔며 씁쓸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 죽음이라는 게 도통 와닿지 않는 탓이다. 타고나길 드높은
귀족이었고, 대다수의 것이 제 발아래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죽음은, 정확히 말하면 피를 보는 죽음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었다. 평온한 삶을 이어 가다가 온전한
죽음에 이른다. 그것 말고는 다른 죽음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과연 어떻게 죽였을까. 사형수를 죽이듯 칼로
머리를 쳤을까. 가슴을 내리찍었을까. 아니, 아니다. 더
잔혹하게 창으로 내장을 짓이 겼을지도 모른다.
비릿한 상상에 식어 가는 찻잔을 조금 험하게 내려놓자
테이블이 흔들려 찻물에 파란이 일었다. 눈을 감은 라티아는
고요히 그날을 회상했다. 피범벅이 된 사내의 품에 안겼던
그날을.
알 수 없는 이의 피를 뒤집어쓴 남자를 마주한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혐오감. 반가움보다 앞섰던 감정이 짙어서
망설임 없이 다가온 히폴로테스를 거리낌 없이 품어 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단단한 어깨 너머, 그와 다를 것 없는 꼴을 한
에즈라의 진실한 눈망울은 너무 지독했다. 네 사랑은 고작 그
정도일 뿐이라고. 지금까지도 남아 그날의 자신을 채찍질할
만큼.
길었던 상념에서 빠져나온 라티아는 어느새 가빠진 숨을
고르며 떨리는 손을 가슴팍 위에 얹었다. 쿵쿵, 손바닥의 울림에
눈을 빠르게 깜빡인 그녀는 다시금 창밖을 살펴보았다.
아직까지 정원에 머물고 있던 에즈라는 아쉬움이 흘러 넘치는
얼굴로 장미 정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붉은 머리
하녀가 무어라 귀엣말을 하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라티아는 에즈라가
자신을 발견하기라도 할까 봐 급히 몸을 돌려 창을 뒤로했다.
이내 어깨 너머로 돌아간 시선에 에즈라의 곁을 지키는 번듯한
기사가 담겼다.
가만 보아하니 아주 거북해할 일은 또 아닌 듯했다. 에즈라의
옆에 자리한 기사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훑어보던 라티아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고심하던 라티아는 번뜩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왜 진작 알아보지 못한 걸까.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 니 히폴로테스의 가까운 수족 중 하나였다.
히폴로테스가 직접 슬럼가에서 데려와 자작가의 양자로
삼았다는, 그 미천한 출신의 기사. 검술이 빼어나다며 홀리듯
이야기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이름이 뭐더라.”
“네? 누굴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저기, 저 기사 말이야. 머리카락이 아주 새까만.”
난처한 얼굴의 하녀는 까치발까지 들어 가며 라티아가
턱짓한 곳을 확인했으나 이내 고개를 조아리며 일러 왔다.
“죄송합니다. 높으신 분의 이름은 알지도 못할뿐더러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지라……"
“됐으니 고개를 들렴. 그렇게까지 궁금했던 건 아니니까.”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어린 하녀는 제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애쓰는 하녀의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라티아는 온화한 어투로 물었다.
“그래서, 정리는 끝냈니?"
“예? 아, 예. 모두 끝났습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없으니 괜찮아. 이제 가보렴.”
“예.”
단정한 대답을 내놓으며 하녀는 뒷걸음질로 사뿐사뿐
물러났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라티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녀는 위험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라티아의 직속 하녀로 배정받은 지도 어언 수십 일.
히폴로테스 님께서는 동이 터 올 즈음이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라티아 님의 침소를 찾았다. 분명 그랬지만……오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침구와 너무도 정갈한 침상.
더럽혀지기는커녕 황홀한 향기만 뿜어내는 이불에선 도저히
사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탓이다. 매일같이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라티아 님을 찾으시건만. 그럴 수 있는 걸까. 황비님을 모시는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침상 정리를 하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더욱 의심스러웠다.
“거기서 뭣하고서 있는거냐.”
얼빠져 있던 하녀는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다가오는 병사를 발견한 그녀는 급히 예를
갖춰 보이며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고개를 주억거린 하녀는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풀리지 않은
의문만 가득 남긴 채로.
시퍼런 동이 터 오는 아침이었다. 히폴로테스를 기다리느라
밤을 샌 라티아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막 들어서던 히폴로테스는 깨어 있는 라티아를 발견하곤
피로한 얼굴을 쓸어 내렸다.
“편히 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또 깨운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네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기뻐하는 일이니까요.”
무척이나 이기적인 대답이라는 걸, 저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는 모를 것이다. 헛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히폴로테스는
침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 마련된 의자에 몸을 묻었다.
등받이가 푹신한 의자. 선잠을 자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히폴로테스는 긴 다리를 꼬며 촉촉이 젖은 머리칼을
느른히 쓸어 올렸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의 붉은 눈동자는 곧
자취를 감추었다.
방금 전까지 에즈라와 진탕 굴렀던 자신은 어디 간 것인지.
메말라 있었고, 그만큼 신경은 곤두섰다. 앙알거리다가 종국엔
엉엉 울며 놓아 달라, 애원하던 얼굴. 달뜬 채로 입을 틀어막고
신음을 삼키려 노력하던 여자는 결국 제 위에 았아 어설프게
둔부를 흔들었더 랬다.
“요즘 많이 바쁘신가요? 피로해 보이세요.”
“……그러네요.”
기꺼운 되새김 속, 불쑥 끼어든 불청객이 기껍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짧은 대답에 라티아는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서 오는지. 뭘 하고 오는지 모르지
않으니, 퍽 자존심 상할 법도 하겠지.
“모르는 척하는 것도 이제는 벅차네요.”
“글쎄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어쩜 저리 무심하게 굴 수 있는 걸까. 라티아는 그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르며 강경하게 내뱉었다.
“저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모르는 척은 그만하세요.”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면 단번에 입을 다물게 할
수 있겠지만……오 잠시 고민하던 히폴로테스는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아직은, 아직은 안 되었다. 저 오만한 여자의 배경이
탐나는 것은 분명 했으므로.
“알고 있는 줄 알면서 이러는 거잖아요.”
“미안해요. 내가 배려가 없었네요. 앞으로는 다른 곳으로
가죠.”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히폴로테스의 앞을 라티아는
절박하게 가로막았다. 히폴로테스가 낮게 조소하며 반듯한
이마를 대강 쓸자 그런 그를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라티아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완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럼 이건……무슨 뜻인지.”
성가셨는데. 이보다 더 성가실 수 있다니. 미명이 밝아 오는
침실 안에서는 여자의 차림새가 너무도 잘 보였다.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은 침의는 그녀의 알몸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히폴로테스 님.”
남은 한 발짝을 좁힌 라티아가 옷깃을 말아 쥐는 것까지 모두
살펴본 히폴로테스는 감흥 없는 눈으로 그녀의 알몸을 대강
훑어보았다.
평소보다 짙은 장밋빛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잔뜩 빨아 댄
탓에 부풀어 오른 에즈라의 입술이 떠올라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뿐, 눈앞의 여자에게는 저조차도 놀랄 만큼 아무런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전혀 성적인 충동이 일지 않아서일까.
굴곡진 여체는 그저 고깃덩이 같기만 했다. 찌르면 피를 흘리며
헐떡이다 곧 죽어 갈, 그런 몸뚱이.
“잘 알다시피 오늘 내가……"
히폴로테스는 한껏 아쉽고 애탄 얼굴을 꾸며 냈다. 숨결이
섞이는 거리에서 목덜미를 지분거리는 서늘하고 까칠한 손끝.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붉은 눈동자를 코앞에서 마주하자
심장이 곧 멎을 듯 뛰어댔다. 갈 곳 잃은 그녀의 시선이 한참을
배회하다가 결국 발끝을 향했다.
“너무 피곤하네요.”
정중하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그리고 완전한 거절에
벗은 것과 다름없는 자신의 차림새가 수치스러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머리끝까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라티아는
보지 않아도 시뻘게졌을 얼굴을 가리려 재빨리 뒤를 돌아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설마, 이리 대놓고 거절할 줄은 몰랐기에 충격은 더 컸다.
덕분에 첫사랑에 빠진 처녀처럼 수줍어하던 마음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늘 재밌는 광경을 보았어요.”
대답은 없었다. 잠깐의 침묵 후, 일정한 박자의 발소리만
들려왔다. 라티아는 결국 마지막 끈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에즈라와 관련된 일인데.”
“별일이네요. 내 앞에서 에즈라의 이름을 다 꺼내고.”
“정원을 거닐고 있더라고요. 특별히 허락하신 일인가요?”
겨우 그 이름 하나에 그의 걸음이 멎었다. 그 반응에 간신히
붙잡았던 마음이 저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불자락을 움켜쥔 손등에 절로 힘줄이 불거졌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뭐, 가겠죠. 그게 내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던가요?”
“아닌가요? 제국의 황비님께서 침실을 나서지 못한다는
소문이 황궁 안에 파다해요.”
되묻는 말에 히폴로테스는 의아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긴장으로 굳어 있는 새파란 눈동자와 옷자락을 꼭
말아 쥔 작은 주먹까지. 히폴로테스는 경멸을 감추느라 조금
늦게 대답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아랫것들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편인가 봐요.”
“소문이 아니잖아요. 알고 있으니 바보 취급은 그만하세요.”
비아냥거리는 어투가 명백히 자신을 탓하고 있었기에
라티아는 표독스럽게 눈을 뜬 채 대꾸했다. 그런 그녀를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히폴로테스는 곧 발걸음을 돌려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진정하라는 듯 떨리는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내가 에즈라를 가둬 두었다고 생각해요?”
그야 내놓기 부끄러운 여자는 당신의 치부가 될 테니까.
앞으로 당신이 무얼 하든, 그 여자는 당신의 발을 걸고 넘어질
돌덩이일 뿐이니까.
그리 외치고 싶은 것을 힘겹게 삼키자 솟구치는 억울함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그렁그렁한 눈가를 다정한 손길로 훔쳐
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가둬 놓는 건, 가축에게나 하는 짓이죠. 나는 한 번도 그녀를
가둔 적이 없어요. 보호했을 뿐.”
“보호, 보호라……,”
하, 헛웃음이 났다. 음습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위화감. 집착과 그 어떤 감정으로 얼룩진 그것은 정상이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한데 섞인 질척한 감정을 알아챈 라티아는
오기로, 그리고 악의로 내뱉었다.
“이제 곧 다른 소문이 돌 테니 히폴로테스 님께는 잘된
일이겠네요.”
“글쎄요. 고작 소문에 휘둘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서.”
무심히 툭 내던진 말에 라티아는 몸을 움찔했다. 자신을
겨냥한 말에는 분명한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이제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 그녀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붙여 주신 호위 기사 말이에요. 너무 격이 없던데요. 천한
출생을 티 내는 것도 아니고……"
“황후를 지키는 기사가 감히 황후의 얼굴을 쓰다듬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요. 보고 있던 제가 다 민망하더군요.”
묵묵히 듣고 있던 히폴로테스는 활짝 웃어 보이며 그녀의
매끄러운 머리칼을 지분거렸다. 물빛 눈동자를 뚫어져라
직시하던 그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술을 내렸다. 입술 끝에
살짝 닿았다 멀어지는 온기에 라티아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할말은 다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