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니.”
“한순간이라도요. 찰나라도, 아주 잠시라도.”
“절대.”
그건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부정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는 웃음기마저 섞여 있어서,
에즈라는 그가 누웠던 자리를 더듬으며 남은 온기를 느끼려
애를 썼다.
‘나는 네가 싫다.’
혼자 있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방 안에서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면 이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질까 보수. 조금은 덜해져서, 덜
아프게 될까 봐.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러기엔 너무 사랑한다는 것만 깨닫게
되었지만.
새로운 황제의 즉위 후, 황실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전에 없던 황제의 용모에 황궁 안 여인들이 서로 눈에 띄기 위해
애쓰는 모양새가 이어졌으나 그것도 잠시뿐.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던 전대 황제와 달리 히폴로테스는 얼핏
금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방탕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뿐더러,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엄숙해진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목줄을 맨 개처럼
답답하고 불편해했지만 그것 역시 그는 괘념치 않았다.
안팎으로 황제의 의무에 충실한 히폴로테스에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황비와의 잠자리 이후에 쏜살같이
라티아를 찾는다는 것 정도일까.
매일이 그러하니 황비라 불리우고는 있으나, 허울뿐인
황비라. 라티아 님이야말로 진정 히폴로테스 님께서 총애하는
여인이며, 그녀만이 유일한 황제의 반려라는 소문은 널리 퍼져
황성을 넘기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셀리는 통창 앞에 멀거니 서
있는 에즈라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여자는 밤마다 찾아오는 황제를 맞이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한심하게 여기며 혀를 찼으나 시간이
갈수록 어째 새장 안에 갇힌 듯한 에즈라를 동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황비가 침실을 나가기 위해서는
황제의 명령이 필요했으니까. 믿을 수 없게도 그랬다.
이것 역시 유례없는 일이었다. 황비의 침실 앞에는 늘 열댓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으며, 이곳을 드나드는 하녀들도 고작
다섯이 전부였다.
엉망으로 구겨져 있는 이불과 시트. 마호가니 나무로
이루어진 침상 헤드가 삐걱거릴 정도인 걸 보면 어찌나 험하게
잠자리를 가지는지 예상이 갔다. 눈썹을 들어 올린 채 고개를
살짝 내저은 셀리는 새 이불을 구김 없이 정리한 후 허리를 쭉
폈다.
“에즈라 님. 정리가 끝났습니다. 달리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요?”
“아, 아뇨. 없어요.”
“요즘 식사를 제대로 들지 않으셔서 히폴로테스 님의 수심이
깊으셔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부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고마워요, 셀리.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부끄럽지만……
입맛이 없는 것뿐이에요.”
에즈라는 손끝을 맞잡은 채 셀리를 마주 보았다. 붉은
머리칼을 하나로 땋은 하녀는 눈꼬리가 치켜올라가 있었지만
성정은 무척 온화해 모든 것을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것 또한 그녀 하나뿐이었다.
에즈라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매번 자신을 꼼꼼히
살피는 시선에 절로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날씨가 쾌청하니 오늘은 정원 산책이라도 하셔요. 기사님과
동행하면 가능하시잖아요.”
“……제논이 바쁘지 않을까요? 요즘 한창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에즈라 님의 명령이라면 기쁘게 임하실 거예요. 제가 말씀을
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인 셀리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빠르게
뒤를 돌았다. 이름을 불러 그녀를 잡을 수도 있었지 만 에즈라는
한 걸음 내디뎠던 발을 곧 뒤로 물렸다.
고개를 돌리자 얼굴에 쏟아지는 오후의 찬란한 햇볕.
에즈라는 눈을 감고 그것에 집중했다. 지나치게 따스해서
무시할수 없었다.
“오랜만이 니까 괜찮지 않을까.’’
익숙해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에즈라는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황제로서의 의무를 끝내고 가차 없이 침의를 걸치던
그는 예상치 못하게 먼저 말을 걸어왔더랬다.
‘답답하지는 않고?’
집요하게 온몸을 가지고 놀던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건
오랜만이었다. 난폭한 정사 중, 신음밖에 흘리지 않는 그는
심지어 뒤를 돌아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기까지 했다.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곧장 부인했지만 그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 자신을 올곧게 직시해 오는 붉은 눈동자가 섬찟했기에
그녀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 그에게서 슬쩍 물러 났다.
‘……제논을 붙여 줄 테니 가까운 곳 정도는 둘러봐도 좋아.
물론 한낮에, 제논과 하녀를 대동한 채로.’
누그러진 말씨에 지쳐 늘어져 있던 에즈라의 눈에 얼핏
희망이 비치더니 반짝 빛났다. 침상을 짚은 가녀린 두 팔과
어깨에서 반쯤 흘러내린 침으1. 그 사이로 향긋한 가슴골이 훤히
드러났다.
또다시 묵직해져 오는 아래를 느낀 히폴로테스는 도망치듯
뒤를 돌아 걸어 나갔다. 헌데 예전처럼 멀어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도, 붙잡지도, 무언가를 묻지도 않는 여자 때문일까.
그는 문 앞에서 아주 잠깐 주저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을
잡아 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처연한 모양새로 어둠에 잠긴 창밖을 응시하던 뒷모습이
뇌리에 박혀 가시질 않는다.
‘ 감사해요.’
닫히는 문틈 사이로 들려오던 나지 막한 속삭임까지 .
“에즈라 님.”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음성에 그녀는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이미 침실 안으로 들어선 제논이 보였다.
본의 아니게 놀라게 한 것 같아 머쓱해진 제논은 머리를
긁적였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과 마른 흙이 묻어 있는 뺨을 훑어본
에즈라는 입술을 내리 물어 웃음을 참다가 결국 하하, 작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왜 웃으십니까?”
“죄송해요. 얼굴에 흙도 묻고, 머리칼도 엉망이고…… 바쁠
텐데 제가 귀찮게 했죠.”
“아닙니다. 엉망인 꼴을 보여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급히
오느라 채비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하다니요! 당치 않아요.”
손을 내저으며 급히 부정하자 제논은 드물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늘상 딱딱한 무표정만 짓는 남자의 미소는 귀해서
에즈라 역시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에즈라 님. 이거 걸치세요.”
어느새 옆에 서 있던 셀리가 다정한 손길로 어깨 위에 얇은
망토를 둘러 주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간단한 채비를 마친 후,
오랜만에 궁을 나섰다. 문을 열고, 우윳빛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황궁 계단을 내려간 그들은 곧장 잘 관리된 메타세콰이어 길로
들어섰다.
하늘에 닿을 듯 시원하게 뻗은 나무 아래. 그들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쭉 걸어가자 무척이나 넓은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미네요!”
조성된 장미 정원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꿈같았다.
멍하니 서서 구경하던 에즈라는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들였다. 살짝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흙바닥은 푹신했고, 퀘퀘한
날것의 냄새를 풍겼다. 갖가지 색으로 활짝 핀 장미에서
흘러나오는 아찔한 향기와 섞여 무척이나 상쾌했다.
“다홍색도 예쁘지만 흰 장미가 더 향이 짙어요. 원래 그런
걸까요?”
“노란 장미도 있습니다.”
제논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말 노란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에즈라는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에 둘러싸인 채 뺨을 붉혔다. 흘러나오는 기쁨을 감출 수
없어하는 모양새가 꼭 산책 나온 강아지 같아서 제논은 답지
않게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에즈라 님. 녹색 장미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본 적 없어요.”
사실 본 게 그리 많지 않았다. 돌탑에 갇혀 생활한 삶이
너무도 길었기에. 에즈라의 얼굴 위로 씁쓸함이 비치자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제논은 급히 수습하려 손을 뻗었다.
“에즈라 님의 눈동자도 연녹빛입 니다.”
“ 아.”
투박한 손끝이 나비가 내려앉듯 닿아 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리자 제논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에즈라의 눈가를 건드린 제논은 어떻게든 수습하려
답지 않게 주절거렸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 죄송하긴요.”
손길이 떠나가자 에즈라는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물씬
밀려오는 민망함에 괜스레 말을 돌렸다.
“음……그런데 정말 장미뿐이네요?”
“네, 아쉽지만 장미 모종으로 온통 갈아엎었다고 전해
들었어요. 라티아 님께서 흰 장미를 좋아하신다……고.”
별 뜻 없이 줄줄 내뱉던 셀리는 어색하게 말을 끝맺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순간, 정말이지 제 머리를 콱 쥐어박고만
싶었다. 에즈라 님 앞에서 라티아의 이름을 꺼내다니.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무엇보다 자신의 뜻을 오해할까 두려웠다. 정말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다고. 애달픈 얼굴로 급히 에즈라를 살폈으나
그녀는 오히려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장미를 골똘히
들여 다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에즈라 님.”
“오늘 다들 죄송한 게 이리 많으세요? 저는 오늘 정말
행복한데요.”
올곧은 진심이 전해져 오는 터라 두 사람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에즈라가
쑥스러움에 코 밑을 쓸자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흙
자국이 남고 말았다. 귀여운 수염이 생긴 모습에 셀리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 모를 웃음에 에즈라는 순수한 미소로화답하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어요. 라티아 님이 정원에 애정을 쏟는다는
이야기는 익히 전해 들었거든요. 저도 장미를 좋아하니까 잘된
일이에요.”
하녀들의 귀엣말은 너무도 잘 들리는 편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평온한 오후, 마음 가득한 쓸쓸함을 내비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에즈라는 손바닥으로 꽃봉오리와 활짝 핀
꽃잎을 살살 쓸며 감정을 억눌렀다.
손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뭉클한 간지러움. 나 같은 게 감히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걸까. 티 없이 맑은 것에 이리 닿아도
되는 걸까. 내가 죽음으로 몰고 간 삶들이 여기에 핀 꽃들보다
많을 텐데.
“너무 좋은데…… 두 번은 오지 못할 것 같아요.”
좋아서 오지 못한다니. 셀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그냥 윗전이 그렇다 하니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 다였다.
그녀의 말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퍽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기에.
한편,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응접실 안. 티
테이블에 았아 있던 라티아는 우아한 몸짓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녀 하나가 막 내어온 향긋한 차에서 피어오르는 뽀얀
김을 감흥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살짝 열린 창 가까이 다가갔다.
“라티아 님?”
시중을 들기 위해 곁을 지키고 서 있던 하녀의 말도 무시한
채로 그녀는 오직 창밖에 시선을 붙박았다. 찬란한 오후의
햇살이 만물의 싱그러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 풍경 속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침실에 갇혀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여자가 어떻게 정원에
발을 들인 걸까. 그것도 저가 아끼는 정원이라 암암리에 소문이
퍼져 그 누구도 쉬이 발 들일 생각을 하지 않는 나만의 정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