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가시 돋친 혀가 잔인한 사실로 가슴을 사납게 찢었다.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마음을 외면한 남자는 빙긋 미소를 띤 채 손을
뻗어 손목을 움켜쥐었다.
에즈라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잡힌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았으나 욱신거리기만 할 뿐. 그가 쳐 놓은 올가미는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네가 사라질까 보I 어느 날, 나를 뒤로하고 도망쳐서 이 지옥
같은 삶 속에 나 홀로 남겨 두고 미련 없이 날아가 버릴까 봐.
그런 추한 말을 내뱉으면 너는 어떤 표정을 할까. 저조차도
역겹게 느껴지는 속마음을 힘겹게 삼킨 히폴로테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네가 고르지 못하는 것 같으니. 내 방식대로 할게.”
여유로운 대답에 에즈라는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아, 참고로 나는 저질스러운 걸 아주 좋아해.”
공포가 가져다준 흥분에 머리끝까지 열감이 훅 끼쳐 왔다.
히폴로테스는 혐오스러운 벌레를 짓밟는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며 에즈라의 어깨를 잡아 침상 위로 내리눌렀다.
은은하게 어둠을 밝히는 램프의 불빛 아래, 에즈라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히폴로테스는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 여자의 모든 것을 눈에 새겼다.
상처가 다 아물지 못해 벌겋게 달아오른 손목까지
만지작거린 히폴로테스는 손톱으로 예민한 부분을 사정없이
긁었다.
“흐읏……!”
찌릿한 감각에 움찔 어깨를 굳히자 그가 홉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까워진 습한 숨결. 히폴로테스는 입술로 귓바퀴를
살살 쓸다가 혀를 내어 톡, 건드려 보았다. 홋, 짧은 신음과 함께
턱없이 작은 손바닥이 그의 가슴팍을 미약하게 밀어 댔다.
그 같잖은 반항이 기꺼워 귓바퀴를 아플 만큼 깨물자
에즈라는 대놓고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아!”
“그거 알아? 네겐 구질구질한 게 딱 어울려.”
구질구질하다는 말과 함께 거칠게 옷자락을 들추자 에즈라는
마구 도리질 치며 그의 아래에서 바르작거렸다. 붉어져
울먹이는 얼굴이라니, 이 모든 게 남자를 충동질한다는 걸 알긴
할까. 히폴로테스는 옴짝달싹 못 하는 여자를 흡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자존심을 건드려 온 말에 에즈라는 눈을 홉뜬 채
원망 어린 말투로 내뱉었다.
“왜 저를 찾으셨어요? 왜 저를…… 이런건, 이런건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내가 싫어?”
그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턱을 잡아채고는 억지로 시선을
맞추었다. 피할 수 없는 눈길은 몰아치는 겨울바람처럼
매정했고 무정했다. 그토록 바라던 이가 입술을 겹칠 듯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온기는 닿지 않는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미려한 얼굴에 걸린 비릿한
조소가 선명했다. 수치와 모멸감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럼 라티아 님을 사랑하시나요?”
“사랑?”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말에는 분명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에즈라는 문득, 이 얼마나 바보 같은 물음인가 싶어 입 안을 콱
깨물었다. 두려움에 귀를 틀어막으려던 찰나, 히폴로테스가
작은 웃음을 홀렸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내 곁을 지켜 주던 여자야. 우아하고
고상한 몸가짐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그녀의 배경은 늘
내게 도움을 주었지. 구질구질하게 손을 더럽힌 너와 달리,
손쉽고 깨끗한 방법으로.”
“필요하고, 또 원해. 그게 사랑이라면 사랑인 거겠지.”
그녀를 원한다는 말에 에즈라는 괜한 반항을 관두었다. 그저
사실과 닥친 상황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의지와는
달리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죽어도 가질 수 없는
마음 한편일 뿐이니까.
“미안하지만 황비, 그 이상을 바라지 마. 너를 안는 이유는
그게 황제의 의무이기 때문이야. 괜한 오해 하면 좀 곤란해.”
“오해안해요.”
“행위가 싫으면 하루라도 ‘빨리 애를 배는 게 낫겠지. 황손은
귀하거든.”
에일 듯 차갑게 일갈한 남자는 무성의한 손속으로 얇은
옷자락을 헤쳤다. 적나라한 시선에 몸을 바짝 긴장시키던
에즈라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건 뭐든 말하라고 하셨죠.”
“뭐 생각난 거라도 있어?”
“그, 그럼 혼자두지 말아주세요.”
처연한 어조에 주저않고 손을 뻗던 남자의 움직임이 아주
잠깐 멈칫거렸다. 오늘로서 황비가 된 여자는 온몸 가득 상처를
새긴 채로 급히 애원했다.
“가깝지 않아도 좋아요. 곁에 서지 못해도 괜찮아요.
가끔이라도, 아주 잠깐이라도. 지나가는 시선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외면하지만 말아 주세요.”
“만남보다 이별이 감당 안 될 것 같아요.”
그 말을 끝으로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귓가로
흘러내렸다. 대답을 듣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는 그저 못 본 척 보드라운 살 내음을
들이마셨다.
“아! 자, 잠깐
“왜?”
어깨를 밀어 냈으나 그는 밀리지 않았다. 빤히 닿아 오는
시선이 부끄러워 입술을 깨물자 그는 알 만하다는 듯 조소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겨우 이걸로 엄살떨면 안 되지.”
벅차오른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대답 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그 위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내렸다.
“말했잖아. 저질스러운 게 좋다고.”
“꺅!”
말이 끝남과 동시에 히폴로테스는 그녀를 제 것처럼 잠식해
갔다. 고통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섬찟한 쾌감에 신음을
내지르자 그는 기쁘게 웃었다. 에즈라는 손길이 닿을 때마다
바짝 긴장하면서도 결코 물러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상처 입힌 그를 의지하며 간절하게 마주 안기까지 했다.
“……히폴로테스님.”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에즈라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망가뜨리는 남자의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몰아치는
흥분을 못 이겨 포근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데 머리칼 사이로 조심스러운 손길이 와 닿았다.
“처, 천천히요.”
스치는 감촉 하나에 얼마나 망설였는지 알 수 있어서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렇게 마치 위로하듯 쓸어내리다가
힘을 줘 껴안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안달 난 사람처럼 굴던
남자는 끝내 가장 깊은 곳에서 눈을 감았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당장 미쳐도 좋을 만큼 좋았다.
그날, 달뜬 살결이 맞닿고 스치는 소음은 침실을 넘어, 짙은
밤을 건넜고 미명이 밝아 오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하늘이 바쁘게 움직였다. 타오르던 불꽃이 죽고, 열렬한
열기가 가신 침실 안. 옅은 구름이 반쪽짜리 달을 가렸다가
드러냈다가 멋대로 구는 탓에 사방에 달그림자가 졌다.
선잠에 들었던 히폴로테스는 어느 순간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자다가 흘린 땀에 오한을 느끼던 찰나, 옆에서 느껴지는
들큼한 숨결에 그는 바로 숨을 죽였다.
잠이 들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잠든 것만은 분명했기에 혼란을 감출 수 없었다.
커다란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시간을 죽이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상에 걸터앉았다.
이런 감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일까. 색욕에 빠져
여자를 부르짖던 남자들을 아둔하다 여겼던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그는 깨달았다.
이렇게 좋은 걸 여태 모르고 살았다니.
덕분에 반쯤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 미친놈이 맞았다.
어깨 너머로 곤히 잠든 여자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아래로 열이
몰렸으니까. 그는 난감한 얼굴로 은근히 다리를 꼬았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하, 자신에 대한 조소를 머금으며 답지 않게 혼잣말까지 해
댔다.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지도, 침상 옆에 제 몸의 일부인 양
두었던 칼을 지니지도 않은 채 세상모르고 잠을 자다니.
그로서는 다섯 살 이래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용기 내어 그녀의 눈가로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하고
배회했다.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조금만 더. 아주
잠깐만 더. 어째서인지 향하는 시선을 좀처럼 끊어 낼 수가
없다.
온화하고 말갛게만 보이는 얼굴에는 눈물 길이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언제부턴가 울지 않던 이를 울게 했다. 괴로움을
이겨 내려 애쓰던 이를 무너뜨리고 더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다.
그건 지워지지 않는, 지워 낼 수 없는 사실이어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아. 너를 배반하고 기만한 나를, 한결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네가.
“나는 네가 싫다.”
“너는 멍청하고 또 미련해.”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전하는 말이 아니었기에 들을 수
없는 이를 보며 흘로 다짐했다. 연민도, 그 무엇도 내주지 않을
거라고.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여자에게 휘둘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히폴로테스는 힘겹게 그녀를 외면하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침상 옆, 작은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진 침의를 걸친 그는
습관처럼 잠든 여자를 또다시 바라보았다.
벌거벗은 어깨가 훤히 드러난 것이 마음에 걸린 걸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침상에 다가간 그는 흘러내린 이불자락을 들어
에즈라의 몸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목 부근부터 봉긋한 가슴팍까지. 자신이 새겨 놓은 붉은
흔적들을 발견하자 어처구니없게도 안심이 되는 건 왜일까.
히폴로테스는 고개 숙여 짧게 조소한 후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움켜쥔 그때였다.
“……히폴로테스 님.”
잠든 줄로만 알았던 여자의 목소리에 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머뭇거린 사이, 미약한 목소리는
이어졌다.
“어디, 가세요?”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굳이 뒤돌아 확인하지 않아도
안절부절못하는 에즈라가 눈에 훤해서. 망설임 없이
잔인해지기를 택했다.
“주제넘지 마, 에즈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뭘 하는지. 네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신랄한 비웃음이 섞인 대답은 비수처럼 꽂혀 들었다.
사무치는 입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의무를 다했으니 돌아가야지.”
그는 왔다가 떠나간다. 오지 않는 것보다 힘든 건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 당신인데.
“라티아가기다리고 있거든;
에즈라는 지워 내고 싶은 기억을 회상했다. 히폴로테스의
검으로 황후의 가슴을 직접 가른 그날. 저지른 죄가 두려워서.
멀어지던 그의 뒤를 있는 힘껏 쫓았던 그 절박한 순간.
당신이 향한 곳은, 당신의 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거긴 결코 내가 갈 수 없는 자리였어. 순결한 두 손.
피로 얼룩지지 않은 찬란한 그녀는 그를 온통 끌어안아
주었었다.
그래서 차마 다가갈 수 없었어. 냄새나고 지저분한 내가
당신을 끌어안는다면 당신마저 더럽히고 말 테니까.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이 부디 조금만 더
머물기를. 그도 아니면 나를 떠나는 당신의 발걸음이
느려지기를 바라는 것뿐.
“저를 사랑했나요?”
아닌 걸 알면서도 물었다. 나를 살린 당신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