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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38화 (38/113)

38화

붉은 눈과 시선을 마주한 하녀들이 차마 신음도 내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몇 명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이고

하녀장은 허둥거리며 처절한 몸짓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지만

그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에즈라.”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히폴로테스는 칼을 빼 들어

하녀장의 정수리를 겨누었다. 막 찍어 내리려던 순간. 그의

예상대로 부서지듯 문이 열리고 에즈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나 급하게 문을 열었는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문턱에서

넘어진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바르작거렸다. 가느다란 팔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는데 시야에 그의 발끝이 걸렸다.

금세 그녀의 앞에 다가와 선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웠다. 반강제적으로 일어선 에즈라는 절망을

감추기 위해 그의 시선을 대놓고 피했다.

닥쳐올 일에 대한 불안감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에즈라를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속살이 어렴풋이 비치는 침의는

몇 겹 덧대어 놓은 형태였으나 몸의 윤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흐트러진 침의 사이로 봉긋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매끈한 팔다리가 드러난 차림새는 누가 보아도 즉위식에 입을

법한 것이 아니었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뺨을 부드럽게 감싸기도

잠시. 히폴로테스는 퍽 소리가 날 만큼 여린 뺨을 내리쳤다.

“ 꺅!”

소리를 지른 것은 에즈라가 아니라 어린 하녀였다. 급히 입을

틀어막은 하녀는 바닥에 어푸러진 에즈라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리 미려하고 온화해 보이는 남자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여인을 폭행하다니.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하녀의

실수에 다른 하녀가 눈을 부라렸다.

“일어나.”

믿을 수 없게도 다정한 어투였다. 스스로 몸을 일으킨 에즈라의

몸가짐은 아까보다 더욱 난잡해진 상태였다. 그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히폴로테스는 가느다란 손목을 틀어잡고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히플로테스님!”

넋이 나간 채로 서 있던 카코스는 그를 부르며 급히 뒤따랐다.

설마 저 상태로 에즈라를 황비의 자리에 앉히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덮쳐 왔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기에 간절하게 히폴로테스를 따라잡으려 뛰어

보았지만 그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안 됩니다. 히폴로테스 님! 제발 의, 의복이라도 갖추고……!”

“완벽한 상태야. 에즈라에게는 이게 제일 잘 어울리거든.’’

대답을 내놓은 히폴로테스는 사람의 키를 훨씬 웃도는 황궁의

문 앞에 섰다. 양옆을 지키고 선 병사들은 그의 손에 붙들린

에즈라를 보며 당황했지만 스쳐 지나간 히폴로테스의 시선에

창을 꽉 잡으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문을 열어라.”

“예!”

총 세 명의 병사들이 온 힘을 다해 걸쇠를 풀고 황궁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정오의 볕은 새하얗게 부서져

만물을 비추고 있었다. 즉위식을 위해 성대하게 꾸며진 안뜰

중심에는 황금색 융단이 깔려 있었고, 그 끝에는 황금의자 두개가

놓여있었다. 반들반들한 융단을 사정없이 짓밟으며 그는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그 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뉜 귀족 가문들은 직위 고하에

따라 빼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황금색 천에 검은 자수가

새겨진 와스터 제국의 문양이 크게 휘날렸다.

황금 의자를 향하는 히폴로테스에게 고개 숙여 예를 갖추던

귀족들은 그의 손에 붙들린 에즈라를 발견하곤 충격에

얼어붙었다. 혼란스러운 시선을 교환하던 귀족들은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고 그사이로 무언의 말들이 오갔다.

그 누구라 해도 저런 차림새로 성스러운 즉위식에 발을

들이다니.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눈을 비비면서도 차마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혈육을 모두 베어 버린 무도한 황제. 그의 뜻을

거슬렀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안 봐도 뻔했으므로. 하나부터

열까지 어긋난 즉위식이었으나 그들은 못 본 척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개미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적막 속, 금나팔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두 개의 황금 의자. 본래 전대

황제가 앉아 있다가 자리를 내어주는 게 관례였으나 이것 역시

달랐다. 잠시 텅 빈 의자를 노려보던 히폴로테스는 뒤를 돌아

에즈라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종이 인형처럼 휘둘리는 여자의 뺨은

벌겋게 부풀어 오른 채였다.

“이리 오느”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기에 그는 내어진 계단에 발을 들였다.

발밑에서 구겨지는 금빛 천 자락. 끝내 열 개의 계단을 오른

히폴로테스는 붉은 단상 위에 놓여진 황금 왕관에 손을 뻗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핏물이 잔뜩 묻어 있던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 티 없이 발광했다. 와스터를 상징하는 검은 문양을

손끝에 새기다가 여유롭게 뒤를 돌았다.

그렇게 황금 왕관을 제 머리에 얹으며 스스로 황제가 된 남자를

모두가 겁먹은 눈으로 올려다보았으나 상관없었다.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 이들은 생글거리는 황제의 얼굴에도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숨죽이기만 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턱이 각진 병사 하나가 들고 있던 와스터 제국의 깃발을

펄럭이며 입을 떼자 승전기가 하늘 높이 올랐다.

절박하게만 들리는 커다란 함성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린다.

그를 찬양하는 외침이 열 번 넘게 반복될 때까지 에즈라는 바람에

펄럭이는 승전기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티텐의 멸망을 상징하는 승전기는 더욱더 높은 곳에 올랐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하늘 위로.

그런 에즈라의 손을 맞잡은 히폴로테스는 고요해진 가운데

드디어 입을 열었다.

“티텐의 넷째 공주, 에즈라를 황비로 세우겠다.”

그제야 베일에 싸여 있던 여자의 존재를 확인한 이들이

커다래진 눈으로 경악하기도 잠시, 곧 약속이나 한 듯 아브타크의

눈치를 보았다. 가늘어진 눈가와 패인 미간. 인정할 수 없는

사실에 뺨을 실룩이다가도 이윽고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감춘다.

그곳에 모인 모두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분위기 속에

갇혀 있었다. 무시무시한 황제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린

데모스 가문. 라티아의 아버지인 아브타크는 배신감에 휩싸여 입

안을 꽉 깨물었다. 힘 있게 말아 쥔 주먹이 떨려 왔다.

“새로운화. 황비를 뵙습니다!”

뒤늦은 병사의 외침에 모두 만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에즈라가 자신의 발밑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이들을 보며

뒷걸음질 치자 히폴로테스는 성가심을 감추지 않으며 에즈라를

뒤로 밀쳤다.

“아……!”

졸지에 황금 의자에 앉게 된 에즈라는 본능적으로

일어서려다가 짐승의 것처럼 형형한 그의 눈을 보고 움찔했다.

결국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수그리자 옆에 마련된 의자에

그는 여유롭게 앉았다.

새로운 황제와 황비를 맞이하는 날임에도 축복과 환호보다는

공포가 휩싸인 공간은 삭막했다. 저 멀리 황궁의 문이 다시

열리더니화려하게 단장한 라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 흐르듯 차르르 떨어지는 하얀 베일을 머리 위에 쓴 채로

그녀는 천천히 다가왔다. 눈부신 아름다움에 쳐다볼 법도 하건만,

라티아가 계단 아래 마련된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에즈라의

흐려진 시선은 승전기만을 향했다.

모든 걸 체념한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그런 에즈라의

옆얼굴을 흘깃거리던 히폴로테스는 나지막이 일렀다.

“데모스 가문의 아브타크, 그의 여식인 라티아를 측실로

임명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브타크의 포악한 눈빛이 라티아를 향해

찔러 죽일 듯 닿아 왔다. 망국의 공주 따위에게 황비 자리를

뺏기는 것도 모자라 자존심도 내버린 채 제 발로 후처를

자처하다니.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졸지에 완전히

황제의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린 신세가 되어 버린 그는 가문에

먹칠한 딸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치를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는 아버지를 보며

라티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문에 못 할 짓을 한 것은 알고

있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는 그의 한마디면 모든 게

충분했다.

‘예전처럼 내 곁을 지켜 줘요.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하게 만드는 남자의 다정한 속삭임. 꽂혀

드는 여러 시선들 속에서도 라티아는 결코 고개 숙이지 않았다.

열 개의 계단 우I,높다란 황금 의자를 당당히 쟁취한 남자. 그의

곁을 지킬 사람은 저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제 자리를 가로챈 여자가 거슬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천박하게 그런 마음을 티 낼 수는 없는 법. 멀지 않은 날.

히폴로테스와 이곳에 자리한 모두에게 자신이 진정한 황비의

재목이라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 다짐할 뿐이었다.

피바다가 되었던 승전식의 여파일까, 즉위식은 너무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황성을 나서는 이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으며 음울하기만 했다. 모두의 머리 위로 두터운 그림자가

잔뜩 졌다.

무정하고 흉포한 황제와 개뼈다귀보다 못한 천한 출신의

황비까지. 와스터 제국의 명성에 금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며 고위 귀족들은 남몰래 콧김을 씩씩거렸으나 범접하지

못할 무력을 목격한 이들 중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에즈라는 휘황찬란한 욕탕 안에서 넋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하녀들은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감기고, 미온수에 경직된 근육을 풀어 주며 정성스레 에즈라를

다뤘으나 그녀는 휘둘리기만 했다. 몰아치는 상황 속.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그리 느꼈다.

넋이 나가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에즈라는 마치 감정 없는

인형과 같아서 하녀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눈치만 보았다.

“히폴로테스 님은 어디에 계세요?”

“곧 이곳에오실 것입니다.”

곁을 지키던 하녀 하나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지금껏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으나 마음껏 굴러도

좋을 만큼 널따란 침대 앞에 자리하자 저절로 손이 떨렸다.

버릇처럼 고개를 푹 숙이자 촘촘한 빗살로 빗어 내린 검은

머리칼이 목 부근을 간지럽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의를 찢을 듯 쥐어짜기도 잠시,

옷자락을 정리해 주고 입술에 붉은 연지를 발라 주던 하녀들은

문밖에서 이는 소란에 빠르게 물러났다.

“히폴로테스 님께서 드십니다.”

문밖의 병사가 크게 알려 오자 하녀들은 문 가까이로 이동했다.

묵직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 길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히폴로테스는 거칠 것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나가 봐.”

“ 예.”

짧은 명령에 하녀들이 재게 방 안을 빠져나가자 문은 곧

닫혔다. 빛줄기가 사라진 곳에 멀찍이 서 있던 그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심장이 터질 듯 뛰어 댔다.

“오늘로서 완벽한 황비가 되었는데. 기분은 어때?”

“히폴로테스 님은 어떠세요? 호느 황제가 되셨잖아요.”

“모두 네 덕분이지. 고마워.”

고맙다는 말에 에즈라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물끄러미 직시해 오는 눈빛이 공허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감흥 없이 바라만 보았다.

손끝조차도 거부하는 눈동자로.

히폴로테스는 느긋하게 허리를 숙여 에즈라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까워진 얼굴을 세세하게 담는 눈에

기어코 눈물이 비친다. 그는 상냥한 어조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안을 것 같아? 다정하게? 난폭하게? 그도

아니면 저질스럽게?”

“원하는 걸 말해 보느 나 때문에 혈육도 죽이고. 백성들을 처참한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라를 멸망시킨 네게…… 내가 못해 줄 게

뭐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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