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새파란 눈동자와 혈통을 내보이는 블론드빛 머리칼. 작은
얼굴에 선명한 이목구비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던 히폴로테스는
살짝 얇고 기다란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약속을 했어요.”
문득,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의 조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만물이 투명하게 빛나던 여름날. 손에 감겨 오는 새까만 머리칼의
촉감과 쫄딱 젖은 채로 오물거리던 도톰한 입술. 반쯤 충동적으로
입술을 맞댄 순간 전해져 오던 뜨끈한 온기와 나누던 숨결까지.
헐떡이는 숨을 삼키고 촉촉하고 말캉한 혀를 한껏 얽었다.
가슴팍에 닿아 오는 떨리던 손끝에 이성을 잃고 달려든 자신을
떠올린 그는 커다란 손으로 슬쩍 입가를 가렸다.
“……황비의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그의 의중을 캐내려 잔뜩 긴장했던 라티아는 단번에 여유를
잃었다. 황비의 자리를 망국의 포로에게 주겠다니. 아마 서
있었다면 비틀거렸을지도 모른다.
곧장 의연함을 연기하는 라티아를 간파한 히폴로테스는 어디
한번 지껄여 보라는 듯 라티아의 입술만 응시했다.
“히폴로테스, 황비의 자리는 그리 가벼운 게 아니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감흥이 일지가 않는다. 에둘러 말하는 여자는
간절한 얼굴로 다시금 입을 떴!다.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인가요?”
“나를 위해 티텐의 왕족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백성들을
배신하고. 결국 나라를 멸망시킨 여자거든요.”
나지막한 어조에 라티아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어 갔다.
“스스로 말이죠.”
새파랗게 질려 가는 얼굴이 꽤 볼만한 터라 그는 유쾌함을 꾸며
냈다.
“아, 그러고 보니 나 대신 황비를 직접 찔러 죽이기까지
했네요.”
“그럴 수가……”
늘상 고상하고 품위를 유지하던 라티아는 드물게 입을 벌렸다.
끝까지 실망시키지 않는 반응에 권태를 느낀 히폴로테스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별 하나 비치지 않는
밤하늘 아래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이 검었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았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 속, 팔을 휘적이며 허둥거렸다. 무언가 잡히길
원하면서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기를 바라며.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도는데 누군가
퍼뜩 손을 뻗어 왔다. 질척이는 손바닥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슬금슬금 팔을 타고 올라온 괴팍한 손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 이윽고 목을 틀어쥔 손의 주인이 무어라
중얼거린다.
‘에즈라, 내가 왔어. 말했잖아. 네 영혼을 조금씩 잡아 갉아먹을
거라고.’
턱 밑이 뻥 뚫린 글로사가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전히
콸콸 흘러내리는 핏물에도 글로사는 그날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썩어 들어간 그녀의 눈은 시커멓고 구더기가 바글거렸다.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평생 네 등 뒤에 머무르며 네게
불행만을 안겨다 줄 거야.’
뭐가 그리 재밌는지 글로사는 역겨운 얼굴을 마구 들이밀며
킥킥거렸다. 저리 가, 제발 나를 놔줘. 말하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절망 어린 귓가에 그녀가 속삭인다.
‘우리가 곁에 있으니. 이제 외롭지 않겠구나. 내 동생.’
밀어내려 할수록 달라붙어 오는 그림자. 지칠 때까지
허우적거리다가 가늘게 뜬 눈 너머로 또 다른 이의 인영이
비쳤다.
‘……아버지.’
콩콩거리며 발치에 다가온 아버지는 머리뿐이었다. 산발이 된
머리칼과 뭉개져 피떡이 된 얼굴. 선명하게 저주를 내뱉는 입술이
섬뜩했다. 죽어라, 죽어 버려. 혈육을 잡아먹으려 태어난
저주스러운 것아.
‘너는 내 딸이 아니야. 너 같은 건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어.
그런데 감히 네까짓 게 내 나라와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네가 없었다면! 네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게 평화롭고.
우리는화목한 삶을 영위했을 거다.’
그건 가슴을 찢어 내는 말. 죽어도 듣고 싶지 않은 말. 알아.
모두 알고 있단 말이야.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으려 발버둥 쳐도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된다.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아버지는 끝까지 귓가에 속삭이며 입꼬리가 찢어져라 샐쭉
웃어 보였다. 잘못했다고 빌면 나를 떠나 줄까. 얼마나 빌면 나를
놓아줄까. 두렵다. 혼자는 너무 무서워. 기꺼이 홀로 남기를
택했던 그날의 내가 원망스러워질 정도로.
차라리 나를 잡아먹어 줘. 그리 빌다가도 영혼이 되어서도
혼자가 될까 봐 고개를 세게 저으며 부정했다. 여전히 목을 졸라
오는 손에 컥컥거리다가 엉엉 울었다. 이 손을 풀어 줘, 부디
잘못이라도 빌게 해 줘.
까드득, 소리를 내며 목이 꺾여 버릴 것 같던 순간, 단번에 맥이
풀리며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밭은 숨을 내쉬며 목 언저리를
이리저리 더듬다가 땀에 젖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래. 꿈이야. 꿈일 뿐이었어. 흘린 땀 때문에 주변의 공기가
피부에 서늘하게 닿아 온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꽉 움켜쥐고
있자니 이곳마저도 꿈속 같았다. 다를 게 없잖아. 여기도
어둠이야, 이곳에서도 나는……혼자야.
아마 나는 평생 혼자일지도 몰라.
“히폴로테스님.”
에즈라는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텅 비어 버린 눈은
흐리멍덩했다. 여전히 이불자락을 몸에 감은 채로 그녀는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걸음을 내디 뎠다.
문을 열고 나선 에즈라는 기다란 복도를 배회했다. 멀뚱히 걸어
나가다가 이불자락을 밟고 넘어졌으나 꿋꿋이 일어나 또다시
헤매었다. 손으로 벽을 짚으며 미로 같은 궁 안을 돌고 돌았다.
트여 있는 홀과 아래로 이어진 계단. 벽에 걸려 있는 몇 개의
램프는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어둠에서 해방된
것이다. 에즈라는 한구석에 기대어 있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대리석의 냉기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더욱 옹송그리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발견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수십 번 중얼거리던 그녀는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거기……누구 있어요?”
새의 지저귐처럼 높고 아름다운 목소리. 가느다란 떨림마저도
사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혹시, 에즈라 공주님?”
저 멀리 등불을 들고 서 있는 여자는 기민한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어지는 입을 가리는 정갈한 손가락. 포근한
향기를 뿜어내는 여자를 알고 있었다. 무언의 인사를 건네던
새파란 눈동자 역시.
그녀를 가슴 가득 끌어안아 주던 등은 무심했었어. 두 번 다시
뒤돌아봐 주지 않을 것처럼.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거예요? 아직 밤은 쌀쌀해요. 이러다가
열병이 들지도 몰라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되고 싶어. 그럴 수만 있다면 당신이
되어서라도 그에게 사랑받고 싶어.
보랏빛 입술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에즈라는
어디로 보나 제정신이 아니어 보였다. 섬찟함에 대놓고 꺼리는
기색을 보이며 몇 발자국 물러나자 그녀는 갑자기 절박한
모양새로 기어 왔다.
“가, 가지 마세요. 여기 있어 주세요.”
“……이러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바닥이 차요.”
기어코 발목을 붙든 손가락은 생각보다 힘이 없었다. 손쉽게
에즈라를 뿌리친 라티아는 말과 달리 그녀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오히려 멀어진 채 방관할 뿐이었다.
히폴로테스가 끌어들인 여자. 즉위식이 가까워질수록 닳아
가는 인내심에 몰래 여기까지 찾아온 라티아는 눈앞의 상황에
당황했다. 황비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 거만하게 굴 줄 알았건만
이리 미쳐 버렸을 줄이야.
가슴속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희열과 우월감을 동정으로
포장하며 라티아는 친히 에즈라를 부축해 주었다.
“사실 제가 황비님을 죽였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다
죽인 거니까.”
힘없이 끌려가던 여자가 더없이 차분하게 용서를 구했다.
마주친 희뿌연 눈동자는 죽은 사슴의 것 같았다. 함께 걷는 내내
에즈라는 용서해 달라며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여자가 섬뜩했기에 그녀는 에즈라를 버리듯 방에
밀어 넣었다.
바닥에 엎어진 에즈라는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점점
좁아지는 문틈,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빛에 손을 뻗어 보았다.
와스터 제국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대체로 머리 꼭대기에서
타오르는 햇볕에 더운 나날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만큼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했다. 티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푹푹 찌는 탓에 힘이 쭉쭉 빠지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에즈라가 시들어 가는 풀잎처럼 하루하루 메말라 가던 어느 날.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던 즉위식 준비는 드디어 끝을 맺었다.
황궁은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는 날임에도 엄숙한 분위기만을
풍겼다. 잔뜩 긴장한 시종들은 그에게 검은 의복을 입히고.
허리에 황금 띠를 둘러 주었다. 가슴팍에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브로치를 단 히폴로테스는 마지막으로 투박한 칼을 허리에 찼다.
칼집에 단단히 묶여 있는 뉙스는 어느덧 해어져 있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바느질 솜씨로 삐뚤빼뚤하게 쓰여진 이름을
은근슬쩍 매만지자 울퉁불퉁한 촉감이 느껴졌다. 카코스는 그
무의식적인 행위를 묘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래서, 아직도 버티고 있다고?”
“예. 욕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상태라고 합니다. 하녀들도
차마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습니다. 그
탓에 아직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고……
“내가갈게.”
“ 예?”
카코스의 말을 뚝 끊어 낸 히폴로테스가 시종장에게 눈짓하자
그는 말없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히폴로테스는 거칠 것 없는 걸음걸이로 휘적휘적 나아갔다.
계단을 오르고, 큰 보폭만큼 빠르게 홀을 가로질러 사방으로
뻗어 있는 복도를 거닐었다. 가장 구석진 곳에 마련된 방 앞에 선
그는 묵직한 문을 손쉽게 열었다.
“화,황자님!”
그의 등장에화들짝 놀란 하녀들은 소리 없이 경악하며 몸을
움찔거렸다. 저도 모르게 황자라는 말을 입에 담은 하녀장은
파리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곧 황제가 될 분에게 황자라 불렀으니
목이 댕강 잘려도 할 말이 없는 탓이다.
자비를 구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히폴로테스는 그녀를 돌멩이
보듯 지나쳐 갈 뿐이었다. 하녀장은 한숨 돌리며 욕실 앞에
다다른 히폴로테스의 뒷모습만을 눈에 담았다.
“에즈라, 문열어.”
건너편에서 여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히 안에 있음에도
에즈라는 대답하지도 않고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숨을 죽이며 이 순간이 그저 지나가기를 바라는 유약한
모습이 눈에 휜했다. 잔뜩 비틀린 웃음을 걸친 채로 히폴로테스는
다시금 입을 뗐다.
“여기 있는 하녀들이 몇 명인 줄 알아?’’
잔뜩 가라앉은 얼굴은 무표정했고 그만큼 싸늘했다.
그때까지도 에즈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총 열두 명. 에즈라, 이제부터 내가 너를 한 번씩 부를 거야.’’
방 안에 모인 모두가 의아한 얼굴을 하던 그때. 히폴로테스는
열두 명의 하녀들에게로 몸을 돌리며 내뱉었다.
“네 손으로 문을 열고 나오지 않으면 한 명씩 죽여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