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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36화 (36/113)

36화

“아뇨.”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은 확연히 달랐다. 끝을 예감한

황비는 버둥거리는 몸을 늘어뜨린 채 사랑만 남은 여자를 마구

비웃었다. 광기에 찬 황비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쳐 댔다.

“미친년! 어떤 새끼인 줄 알고 그런 눈을 해! 저놈이 사람

새끼인 줄 알아? 저놈은 악마야, 괴물이야! 자신의 형제들을

도륙하고, 낳아 준 어미까지 죽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버지까지 죽였지. 그러니 어떻게 저런 게 인간일수…… 윽!”

마구 비아냥대던 황비의 목을 꾹 짓누르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캑캑거리는 황비를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모든 수치가 드러난 기분. 감추고

있던 더러운 부분이 샅샅이 까발려지자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른다.

낭패감에 미간을 좁히는데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고개 숙여

황비와 눈을 맞추었다. 옆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탓에

여자의 표정을 볼 수가 없다.

“잘됐네요.”

꺾일 듯한 목소리에 깃든 힘. 히폴로테스는 멍한 표정으로

에즈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

“히폴로테스 님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에즈라는 여전히 묶여 있는 뉙스를 잠시 만지작거리며 말을

늘였다. 있는 힘껏 허공으로 치켜든 칼날, 버거움을 한껏 담아

내리찍는다.

“저는 못할 게 없는 사람이거든요.”

감춰진 뼈를 바스러뜨리는 소음. 살을 가르는 소리는

둔탁했다. 꽂힌 칼날을 빼지 못한 채 에즈라는 비틀거리며

시체에서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결국 피 웅덩이에

주저앉은 여자는 저와 똑같은 몰골이었다.

친족의 피로 목욕한, 나를 닮은 저주스러운 여자.

칼을 뽑는 것은 그의 일이었다. 자신의 칼을 거둔 그는

에즈라에게 한 자락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

끈질기게 닿아 오는 열망 어린 눈길을 무시하며 그는 흔들림

없이 걸어 나갔다.

“히폴로테스 님. 가, 같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 피에 젖어 철벅이는 발걸음과 가냘픈

몸의 움직임까지.

나는 나를 증오하는 만큼이나 네가 경멸스러워. 그러니 나는,

죽어도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을 거다.

안간힘을 다해 멀어지는 그를 쫓았으나 힘 빠진 몸으로

따라잡기란 역부족이었다. 아직까지 타인의 뼈를 으스러뜨리던

감촉이 손안에 생생했다.

바르르, 몸을 떨던 그녀는 두려움에 황급히 히폴로테스를

쫓아 계단을 기어올랐다. 얼마나 그의 발자국을 쫓았을까,

황궁의 가장 높은 곳. 한 방울의 피도 닿지 않은 꼭대기에

다다른 에즈라는 숨을 헐떡였다.

주변은 난장판이 된 아래와는 달리 모든 게 찬란했다. 황금과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널따란 홀은 먼지 하나 없었고 그

한편에는 커다란 석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평온하게 타오르는 램프를 멍하니 응시하던 에즈라는

피범벅이 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순결하고 깨끗한

이곳마저 더럽히는 추악한 욕망을.

여직 벅찬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리자화려한 복도 끝에 멈춰

선 그가 보였다. 막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히폴로테스!”

부르려던 이름을 다른 이가 불렀다. 이름 모를 여자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품을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의 낭창한 몸을 히폴로테스는 놓을 수 없다는 듯 꽉

끌어안는다.

그로 인해 핏물에 젖어 가도 여자는 그를 밀어 내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품에서 안정을 찾듯 여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입 안에 맴도는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을 걸 너무 잘 알아서. 그게 너무

두려워서.

천천히 그에게서 몸을 떼 낸 여자는 새파란 눈동자로 저를

마주했다. 당황이 서린 눈망울이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호선을 그린다. 그 언젠가, 누군가와 닮은 너무도 상냥한

미소였다.

무언의 위로에 고개를 숙여 피 칠갑이 된 제 손과 발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몰려오는 수치심에 남몰래 발가락을

오므렸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목구멍이

뜨겁게 막혀 오고 쓰라렸다. 거칠어진 숨결 뒤로 깨닫지 못한

눈물이 하나둘 흘러내렸다.

심장이 녹아 버린 듯 멈추지 않고 흐르는 눈물이

부끄러웠으나 서로를 파고드는 그들에게서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사람이, 사랑이 떠나는 건 그냥 그랬다.

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젖은 발에 스며들었다. 히폴로테스는

달려오는 라티아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걱정과 불안, 그리고

안도가 깊게 서린 얼굴로 그녀는 제 품을 파고들었다.

간절하리만치 꼭 안겨 드는 라티아는 조금 떨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피 냄새 때문일 것이다. 용케 도망가지 않는 게

고마워 그는 보란 듯이 그녀를 더욱 감싸 안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더라면 이리 손쉽게 황실을

무너뜨리지 못했을 테니까.

“기다렸어요. 혹시나 어떤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계속

걱정하면서 매일 기도했어요.”

“이리 건강하게 돌아왔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요.”

라티아의 몸을 떼어 낸 그는 다정한 손길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피가 잔뜩 묻은 손끝은 티 없는

뺨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멈추었다. 망설임을 읽은 라티아는

스스로 눈물을 훔쳐 냈다.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돌아와 줘서.”

그는 정말 흔한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였다. 수많은 이를

베면서도 강건한 그를 자랑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던 라티아의

눈이 자꾸만 저 뒤로 향했다. 시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나

부러 모른 체하며 라티아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나야말로 마중 나와 줘서 고마워요.”

“당연한일이잖아요.”

히폴로테스는 에즈라를 향해 눈웃음치는 라티아를 보며

은근히 눈살을 찌푸렸다. 끈질기게 닿아 오는 시선. 다가올

용기도 없으면서 주제도 모르고 이곳까지 따라오다니.

머저리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여자가 거북했다.

“들어가요.”

버릇처럼 웃어 보인 히폴로테스는 라티아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이끌었다. 라티아는 당연한 듯 그의 곁에서 사뿐사뿐

걸음을 내디뎠다. 발 맞춰 걷던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에즈라는 손등으로 젖은 얼굴을 험하게 닦아 냈다.

주변이 온통 환한 가운데 끔찍한 것은 오로지 저 혼자였다.

온몸에서 진동하는 고약한 피비린내를 맡으며 멀어져 간 두

사람의 흔적을 좇았다. 나는 버림받은 것도 혼자 남은 것도

아니라고. 그냥 조금 멀어진 것뿐이라고. 그렇게 위로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돼.”

사랑은 나 혼자 하는 걸로 충분하니까.

“혼자두지만 않으면 돼.”

정말이지 청승은 떨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꾸 입에서는

괴로운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참담함. 깨물어 터져 버린 입술 새로 막지 못한 울음을

흘린 그때, 힘이 빠져 휘청이는 몸을 누군가 굳건히 받쳐

주었다.

“……제논?”

“모시겠습니다.”

고개를 빠듯하게 들어 올리자 단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와 같은 검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의 뺨에도 핏줄기가 묻어

있었다. 발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언제 다가온 것일까. 놀라 굳어

버린 여자를 보며 그는 조금 어색한 모양새로 부축하던 손에

힘을 주었다.

“어디로요?”

제논은 금세 맑아진 눈망울에 시선을 빼앗겼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동자에는 약간의 반가움이 담겨 있어 그는 몸을

뻣‘썻하게 굳혔다.

“그건……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당당하게 모시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콧잔등을 긁적이는

제논은 어딘가 허술해 보였다. 달갑지 않은 상황에 나타난

남자의 다른 면모를 발견한 에즈라는 데굴데굴 눈을 굴리다가

힘없이 웃어 보였다.

“제가 머물 만한 곳이 있을까요?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냥,

그냥이곳이면……"

간절한 목소리가 애처롭게 흔들린다. 내쫓을까 불안한 듯

손끝을 쥐어짜는 에즈라의 팔을 움켜쥔 제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시죠. 황궁은 아주 넓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성큼 앞서가는 남자의 등은 아주 넓었다.

에즈라는 널찍하고 높은 등에 자신을 이끌어 주던

히폴로테스를 겹쳐 보았다. 그는 계단을 몇 개나 내려가고, 또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았다.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멈춰 선 제논은 그제야 뒤를

돌았다. 따라온 여자는 퍽 지쳐 보였기에 그는 대신 문을 열어

주었다. 그곳으로 반쯤 떠밀린 에즈라는 문을 닫으려는 제논을

부모 잃은 어린아이처럼 절박하게 올려다보았다.

“하녀들을 보내겠습니다.”

엉망진창인 몰골을 신경 써 준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워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제논은 고개를 까딱인 후

문을 닫았다. 그 간단한 인사를 뒤로한 제논은 문을 닫자마자

대놓고 미간을 좁혔다.

꺾일 듯 가느다란 손으로 치켜든 칼날과 온 힘을 다해 황비를

조각내던 뒷모습. 솟구치는 핏방울을 왕창 뒤집어썼던 처절한

얼굴이 생생하다. 그는 자꾸만 들러붙는 거북한 감정을 떨치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시간.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라티아를 찾은

히폴로테스는 목욕을 끝낸 후 그녀와 마주 았았다. 살짝 물기가

어려 더욱 반짝이는 은발은 널따란 어깨를 조금씩 적셔 나갔다.

마디가 굵은 손으로 머리를 대충 털어 내는 그를 보자 바짝

긴장이 되었다. 적나라한 시선에도 히폴로테스는 그녀와 눈을

맞추곤 활짝 웃어 주었다.화들짝 놀라 눈길을 돌리는 라티아는

달아오른 목덜미를 손으로 슬쩍 가렸다.

그녀가 자신을 의식하는 모습에 히폴로테스는 남몰래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한 여자가 자신을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것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을 쥐락펴락할 정도의 권세를 부리는 가문.

라티아의 배경은 그에게 늘 힘이 되어 주었다. 물론, 자신의

딸을 미래의 황비 자리에 았히려는 아브타크의 야망도

한몫했겠지만 철이 들 무렵부터 저를 이성으로 여기는

라티아의 입김 탓이 더 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지 알 것 같은데요. 나를 따라온 여자가 궁금한 거죠?”

여전히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라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해 보이는

그를 보며 막힌 숨을 터놓았다.

“내가 말했던 티텐의 공주예요. 이제 티텐은 사라졌으니

공주라고 부르기에도 그렇지만.”

히폴로테스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하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우아한 몸짓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는 라티아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히폴로테스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당신이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에요.”

결코 먼저 나서지 않는다. 사랑을 속삭일 때까지 기다릴 뿐.

그건 드높은 자존심일까, 아니면 확신을 원하는 교활함일까. 그

자리에 멈춰서 기다리기만 하는 여자가 지겹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히폴로테스는 지친 눈가를 문질렀다.

“쓸모가 다한 여자를 살려서 데려온 이유가 있나요?”

아무렇지 않은 척, 도도하게 굴 줄 알았건만. 은근슬쩍

떠보는 라티아의 물음은 그를 당황케 했다. 살려서 데려온

이유라. 히폴로테스는 살짝 비틀었던 고개를 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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