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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35화 (35/113)

35화

무자비한 무력에 굴복한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권력에 편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황실로 뛰어

들어갔다. 어영부영 앞을 가로막는 황실의 병사들의 배를 뚫고,

여종 남종 할 것 없이 소리를 지르는 이들의 목을 갈랐다. 피를

뒤집어쓰면 쓸수록 그들은 무언가에 무뎌져 갔다.

죄악감을 지우기 위한 합리호누. 이것은 모두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위한 것이다.

황궁으로 가는 길목. 그를 환영하는 승전식 한구석에

에즈라가 있었다. 덩그러니 놓여진 황금 전차에 묶여 있던

그녀는 멀어져 가는 군대를 보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리저리 찢어진 귀한 천 조각들이 허공에 나리고, 넘어진

화로는 바닥에서 타들어 간다. 손님을 위해 준비한 다기와

테이블은 모두 부서진 채 잔해만이 나뒹굴었다.

“아악! 사, 살려 줘 !”

병사들의 새된 신음과 누군가를 찾는 간절한 목소리. 황궁

안의 아비규환은 과거가 되어 버린 티텐을 닮았다. 어지러운

시야에 에즈라는 마구 고개를 저어 댔다. 눈앞이 자꾸만

빙글빙글 돌아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날의 충격이 생생하게 다가와 절망이 전신을 덮친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에 젖은 온몸이 발작하듯 떨려 왔다.

“무, 무서워……,”

싫어. 싫다. 나를 놔줘. 나는…… 나는, 도망치고 싶어. 저건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니야. 저들의 죽음은 내 탓이 아니야. 몸을

감싸 안으며 묶여 있던 팔목을 마구 잡아당겼다. 거친 밧줄에

손목이 까져 피가 비쳤으나 멈추지 않았다.

“혼자는 싫어. 혼자가 아니어야 해.”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손을 마구 비틀었다. 어느새

눈물범벅이 된 뺨이 손목보다 쓰라리다. 어찌나 험하게

몽부림쳤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즈라는 한쪽 손을 빼낼 수

있었다. 흉이 질 게 분명한 손목을 한 채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내게는, 내게는……"

그래, 나에게는 히폴로테스가 있어. 나를 받아 주던 단 한

사람이 있으니, 나는 분명 혼자가 아니야. 아니어야 해.

“히폴로테스님!”

가녀린 몸은 휘청이며 황궁 안으로 달음박질쳤다.

반들거리는 대리석 계단을 기듯 오르고, 넓게 펼쳐진 홀 중앙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고인 피 웅덩이, 누군가의

팔다리와 살점. 걸음마다 툭툭 걸리는 시체들.

“아아……,”

그 사이를 건너며 에즈라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아연한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 내자 말간 이마에 핏물이 잔뜩 묻었으나

그녀는 상관 않고 둥글게 이어진 계단을 하나둘 올랐다.

바닥에 널브러진 물컹한 내장을 밟은 에즈라는 바닥에

철퍼덕 미끄러졌다. 대리석 바닥에 정통으로 박은 무릎이 아려

왔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나, 나는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비척이며 일어선 에즈라는 반미치광이처럼 또다시

중얼거렸다. 그를 찾아야 했다. 이토록 두려운 곳에 홀로 남겨

두지 말라고 애원해야 했다.

내게 어떤 짓을 벌여도 좋으니,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할

테니…… 제발 혼자 두지만 말아 달라고.

황실 깊은 곳까지 진격한 병사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며

쓰러져 갔다. 한번 겨누면 결코 빗나가지 않는 칼을 쥔

히폴로테스는 너무도 손쉽게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갔다.

“제, 제발 자비를…… 아악!”

바닥을 빌빌 기던 이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가슴 중앙에

칼을 꽂거나, 배를 사정없이 찢는다. 칼끝은 단번에 죽음에

이르는 곳을 놓치지 않았다. 칼날을 적신 진득한 핏물이 굳고 또

흘러내린다.

히폴로테스는 자신을 노리는 창을 노련하게 피한 후 병사의

옆구리를 깊게 베어 버렸다. 갈라진 살 틈으로 흘러나오는

핏물과 둥그런 내장들. 아아, 팔을 퍼덕이며 괴로워하던 병사는

결국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로써 홀로 남게 된 히폴로테스는

다시금 칼을 고쳐 쥐었다.

시체들과 핏물밖에 남지 않은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천천히 그 문을 열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마련된 단

하나의 황금 의자. 아득히 높은 곳에서 빛나는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

평소와 같은 목소리는 텅 빈 홀을 커다랗게 울렸다.

닿았을까. 그런 의문을 가진 채 히폴로테스는 유유자적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황제는

늘어뜨린 몸을 바로 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굳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승전식을 마치면 너는 황제가 되었을 텐데.”

수십 개의 계단마저 훌썩 올라온 히폴로테스는 황제의 앞에

서서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쌍의

붉은 눈이 마주쳤다. 노쇠한 왕의 입가가 분노로 실룩였다. 결국

먼저 입을 뗀 것은 그였다.

“그토록 살상이 좋은 것이냐! 이 괴물 같은 것! 네 어미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제에!”

괴물. 어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존재. 아니, 그것뿐이

아니야. 피를 나눈 형제를 제 손으로 찢어 죽이고 사체는

들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지. 가슴속에 묻어 두고 싶던, 허나

그럴수록 더욱 그를 잠식해 나가던 진실을 황제는 들쑤셨다.

히폴로테스는 목울대를 꿀렁이며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아시잖습니까. 저는 황제가 되어야 했습니다.”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만이 나를 평안으로 이끌어 줄 테니까.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죽여라.

그리 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죽음보다 삶을 택한 것일 뿐.

그것도 죄가 되는 일인지요.”

“죄? 너는 악마나 다름없다! 네가 벌인 살상은 평생 지우지

못할 너의 족쇄가 될 것이야! 감히, 감히 내게 칼을 겨누다니 !”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치는 노인은 공포를 숨기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는 파랗게 질린 채 굳어 버렸다. 주름진 손가락에 주렁주렁

끼워진 보석을 무감하게 훑던 그는 칼끝을 황제의 목에 가져다

댔다.

“한번 겨눈 칼끝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이 칼을 잘 아시지요.”

“이, 이……!”

“유일한 황자가 된 저에게 선물하신 것 아닙니까. 당신을

대신하여 대륙을 집어삼키라고 명하셨지요.”

그는 아버지를 모르지 않았다. 가장 강한 자식을 황자의

자리에 았힌 후 장기말처럼 이용하는 것. 황제는 대륙을 지배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 아들들의 희생을 외면했다.

“천한 것의 배를 빌려 타고난 주제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그때, 비천한 몸으로 너를 수태한 어미를 죽였어야

했어!”

그 말에 히폴로테스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분노를 일깨우는

쿵쾅거리는 심음과 솟구치는 살의. 뜨겁게 타오르는 눈물 덕에

알 수 있었다. 이 길의 끝은 낭떠러지라는 걸.

히폴로테스는 입술을 내리 문 채 웃음을 참았다. 정말이지

역겹지 않은가, 모두 이 손으로 죽였다. 낳아 준 어미도, 세 명의

형제들도, 이제는 아버지마저도.

“하하!”

소리 내어 웃는 그의 얼굴은 신이 빛은 듯 아름답기만 했다.

미소를 띤 그는 더없이 부드럽고 온화하게만 보였다.

입을 가린 채 한참을 끅끅거리던 그의 칼끝이 빙글 돌더니

날을 세웠다. 뾰족하게 빛나는 날붙이는 이내 사선을 그었다.

손을 내젓던 황제의 팔이 댕강 잘리고, 사이로 날아든 칼끝은

결국 그의 얼굴을 뭉갰다.

무도한 칼끝은 여전히 노인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신음 한

번 흘리지 못한 황제는 황금 손잡이를 콱 움켜쥔 채 발작했다.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그를 보며 히폴로테스는 조금 지친

얼굴을 했다

“이제 저는 한평생 닿을 수 없을 겁니다. 그토록 원하던

평온한 삶에.”

히폴로테스의 팔이 힘없이 툭 늘어졌다. 황금 의자에 묻은

핏물과 뇌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노인의 몸뚱이를 훑어보던

그는 뒤를 돌아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그러니 너무 원망 마세요. 죽음보다 잔혹한 삶을 살아갈

테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피로 젖은 검붉어진

머리칼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둥근 궤적을 만들었다.

후련하게 웃음 지을 줄 알았는데.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기어코 가슴께가 욱신거린다. 정말

이상하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가 없어.

‘제발 살아줘……:

아아, 그 말만 아니었다면. 새까맣게 타 버린 주제에

가슴속에 잿더미로 남은 그녀만 아니었다면…… 나는 평온에

이르렀을지도 몰라.

홀로 남아 있기에 이곳은 너무 넓다. 그는 칼을 들어 올린 채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손잡이 부근에 단단히 묶여 있는

은빛 뉙스. 이것을 찢어발길 수 없는 이유는 같잖은 공허함

때문일까.

그럴 리가. 잠시 고개를 내저은 그가 막 뉙스를 찢으려 들던

그때였다. 반쯤 열려 있던 문틈 사이로 여린 인영이 비친 것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이제는 퍽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폴로테스 님.”

그녀의 부름에 그는 숙였던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 냄새를 풍기는 여자. 빛나는 녹색

눈동자만이 그녀가 에즈라임을 알게 해 주었다.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거예요?”

에즈라는 그의 동요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평소와 사뭇 달랐기에. 눈앞의 남자는 거칠 것 없이

당당하던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소년 같았다. 그가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제 앞으로

다가왔다.

“네, 네.”

코앞에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여자는 어색한 모양새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제 발로 아득한 지옥에 발을 들인 여자.

혼자만의 지옥은 이제 두 사람의 지옥이 되었다.

“……제발나를 혼자두지 말아요.”

설사 그 끝이 지옥이라 해도. 에즈라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지껄였다. 슬그머니 뻗어 온 손이 피로 흠뻑 젖은 남자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눈을 크게 뜬 히폴로테스는 이내

쓰라린 웃음을 걸치며 허리를 숙여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럼 나를 위해 황비 님을 죽여 줄 수 있어요?”

“네?”

“저기, 저 밖에 황비님이 있거든요. 나를 죽이겠다고 독이 든

칼을 든 채로 몰래 숨죽이고 있어요.”

에즈라는 재빨리 뒤를 돌아 문밖을 훔쳐보았다. 좁은

문틈으로 보이는 공간은 한정적이라 그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에즈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나 대신 죽여줄 거예요?”

“네.”

망설이는 줄 알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여자는 투명한

눈동자를 빛냈다. 여전히 맑은 시선에는 저를 향한 을곧은

믿음만이 새겨져 있었기에 히폴로테스는 기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는 너덜너덜 살갗이 찢어진 손목을 콱 움켜쥔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문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던 순간,

히폴로테스가 팔을 험악하게 끌어당겼다.

비틀거리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에즈라는 자신과

히폴로테스를 노려보는 황비를 마주했다. 분노에 씩씩거리는

여자의 어깨는 분명한 공포로 떨리고 있었음에도 두 사람을

향한 시퍼런 칼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님.”

“닥쳐! 그 역겨운 목소리로 어머니라 부르지 마!”

“그래도 하나 남은 아들인데, 부르지도 말라니. 너무 박하신

거 아닌가요.”

“더러운 놈! 네 어미와 너는 저주받은 괴물이야. 너 같은 건

세상에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해!”

투II,황비는 바짝 다가오는 히폴로테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히쫄로테스는 황비가 든 칼날이 두렵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을 뿐. 칼을 겨누지 않았다.

불안하게 혼들리는 황비의 칼끝. 혹여 그것을 그에게

휘두를까 봐 에즈라는 급히 몸을 일으켜 두 사람에게 겁 없이

다가섰다. 얼굴도 모르는 계집애까지 자신을 향해 오자 황비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녀가 잠시 방심한 사이, 히폴로테스가 황비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꺅, 신음을 지르며 뒤로 넘어간 황비는 칼을

놓치고 대리석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날아간 칼로 손을 뻗었으나 히폴로테스는 무자비하게 그녀의

손을 콱 짓이겼다.

황비가 엄청난 고통에 몸을 바르작거리는 동안 히폴로테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에즈라에게 칼을 건넸다.

“이건……,”

히폴로테스의 칼이었다. 두 손으로 들기에도 묵직한 그것을

받아 든 에즈라는 휘청이는 다리에 힘을 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제압당한 황비를 향해

턱짓했다.

“죽여 준다고 했잖아요.”

“거짓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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