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주 조금이라도 나를 사랑했을지
모르잖아. 한순간 정도는 진심이었을 수 있잖아.
간절한 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 같잖은 자존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을
달싹이는데 눈앞이 번쩍일 정도의 통증이 뺨을 갈기고
지나갔다.
퍽 소리를 내며 돌아간 고개. 찢긴 입 안에 금세 비릿한 피가
고여 온다. 차마 신음도 내지 못하고 옆으로 어푸러진 에즈라는
꽁꽁 묶인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흐윽 …,”
무뎌진 고통보다도 가슴의 울렁임을 참기 힘들었다. 또다시
흐느끼는 에즈라의 위로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그는 가볍게 여자의 배를
걷어찼다.
윽. 소리를 내며 몸을 둥글게 마는 에즈라의 검은 머리칼이
바닥에 흐트러진다. 얼굴을, 원망과 증오에 젖은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가 발로 에즈라의 한쪽 어깨를 강하게 밀자 허여멀건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탁해진 눈동자가 느리게 끔‘썩인다. 여전히 한 점의 미움도
담겨 있지 않은 여자의 눈은 가학적인 성향을 부추겼다. 그는
분노에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너는 내 곁에서 살아 나가야 하잖아.”
에즈라의 검은 머리칼을 세게 움켜쥔 히폴로테스는 꾹꾹
눌러 참아 온 분노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걸 위해 너는 티텐을 흔적도 없이 불태웠지. 바로 네
손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가슴을 후벼 파서…… 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감히 변명할 수도 없어. 모든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를 선택한 것은 나 자신이 니까.
에즈라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살린 이유도, 살아 나가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 죄에서 도망치려
하다니. 이토록 이기적이고 저주스러운 인간은 또 없을 것이다.
히폴로테스에게서 고개를 돌린 에즈라는 킥킥거리며 바닥에
이마를 부볐다. 한번 터져 나온 웃음은 쉬이 멎지 않았다.
끝까지 이기적인 자신을 향한 비웃음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눈물로 변모했다.
가슴을 찢어 내고 싶었다. 머리가 깨질 때까지 누군가가
내리치기를 바랐다.
그래,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게 돌을 던지고, 불로 온몸을
지지고, 뼈를 조각조각 으스러뜨리고, 있는 힘껏 두들겨 패서
온몸이 부서져 버렸으면.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아주아주 오래도록 살아가다가 가장 추한 모습으로 죽어
버렸으면.
“제국의 황비님이 미쳐 버리다니. 재밌는 일이야.”
그는 싱글거리며 에조라를 비꼬았다. 여전히 힘겹게
헐떡이는 에즈라를 무표정하게 훑던 그는 미련 없이 그녀를
뒤로했다. 터벅터벅 걸어 나가던 그는 문 앞에 서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는 매일 깨닫게 될 거야. 네가 얼마나 아둔한 사람인지.
매일 후회하게 될 거야.”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아도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에즈라는
또다시 울다가 웃었다. 그의 말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살아가게 되겠지. 하지만……오
“당신을 살린 걸 후회할 리 없어요.”
선실의 문이 닫히기 전에 미약한 음성이 들려왔다. 쿵,
소리를 내며 닫힌 문 건너편에서 히폴로테스는 잠시 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어지는 폭력에도 저항하지
않던 여자.
히폴로테스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괴롭게 해도 저 여자는
평생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할 것이라는 걸.
“히폴로테스 님! 드디어 와스터가 보입니다!”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선실로 내려온 데몰레온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히폴로테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평온한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앞서가는 데몰레온이 드디어 뱃멀미에서 탈출이라며
호들갑을 떨든 말든 히폴로테스는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제국을 멍하니 응시하기만 했다. 고요한 물살처럼 잔잔하기만
한 히폴로테스를 흘긋거리던 데몰레온은 민망함에 코 밑을
쓸었다.
“아직 끝이 아니야. 준비는?”
“완벽합니다.”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코스가 허리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순식간에 갑판 위는 비장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것이
퍽 마음에 드는 터라 히폴로테스는 힘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배가 육지에 닿자마자 수도로 진격한다.”
“예!”
우렁찬 대답을 들으며 그토록 원했던 것을 움켜쥘 일만
남았다 생각하던 그때, 티텐의 신관의 말이 불쑥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따르는 법. 당신께서 티텐의
멸망으로 황제의 자리를 얻는다면…… 그로 인해 영원히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영원히 잃게 되는 것이근노 히폴로테스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역겨운 신관 따위는 알지 못한 것이다. 저는 애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편, 제국은 티텐의 멸망 소식으로 연일화제였다. 백성들은
신관의 말대로 티텐까지 정복한 히폴로테스의 위용을 입이
마르게 칭송하며 황제의 재목으로는 그만한 이가 없다
치켜세웠지 만 귀족들은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한층 더 강력해진 황제의 권위. 무력으로 똘똘 뭉친 황실의
권력 아래, 귀족들은 다방면에서 제약을 받을 게 분명한 일. 그
탓에 그들은 맘 편히 황자를 환영할 수 없었다.
귀족들이 신중하게 침묵을 고수하는 와중에도 황자의 무사
귀환을 반기는 축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수도의 거리는
평소보다 활력이 넘치고, 매일이 불야성이었다. 황성은 승전식
준비로 하루하루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황자의 배가 육지에 닿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국은 난리 법석을 떨었다. 며칠 동안 수도로 향하는
동안 백성들은 귀환한 히폴로테스와 그의 군대를 보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거리마다 줄줄 늘어놓았던 등에 불을
붙이며 그를 환영했다.
금빛 전차에 오른 채 거리를 가로지르던 에즈라는 바람에 쉴
새 없이 펄럭이는 승전기를 올려다보았다. 제국을 상징하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그것에는 이름 모를 이의 핏자국이
선명했다.
두 손이 밧줄에 꽁꽁 결박된 채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움츠리면서도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티텐보다 훨씬 높은 건물들과 질 좋은 원단으로 옷을
지어 입은 백성들. 이어지는 더위 때문인지 그들은 모두 가벼운
차림새로 손을 흔들었다.
수십 개로 나뉘어진 널따란 길목 사이, 낡은 것은
고풍스러웠으며 새것은 찬란한 볕 아래서 선명했다. 짧은
깃발을 단 상점들과 통행을 방해하지 않는 노점들은 마치 칼로
자르듯 구획되어 무척이나 깔끔하고 다채로웠다.
황자의 행렬이라 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는 무척이나
많았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들을 반기는 백성들은 쉬지 않고
환호했다. 들뜬 분위기를 즐기며 쉬엄쉬엄 갈 법도 하건만,
히폴로테스와 그의 전사들은 그 무엇에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로 수도로 진격했다.
뭐에 쫓기듯 수도만을 향해 달리는 전사들을 보며 백성들은
입맛을 다셨으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주인 잃은 축제를 즐기러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문제는 황성이었다. 히폴로테스의 군대가 쉬지 않고 달려와
성문 앞까지 도달했다는 소식에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다.
무장을 해제하지도 않고, 전사들을 대동한 채라니. 공기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황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렇게 며칠을 달려 하늘이 새까맣게 물든 어느 날, 완전
무장을 한 군대는 성문 앞에서 멈추었다. 황실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성문을 단단히 잠그는 것도 모자라 위병들 수십을 그
앞에 배치해 두었다.
누가 보아도 삭막해진 분위기 속, 히폴로테스와 그의
전사들은 성문 앞에 서서 앞을 가로막고 선 위병들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위병들 또한 하나같이 살의를 뿜어내는
전사들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설마설마했던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온 것을.
“지금 뭣 하는 짓이냐. 감히 황자님의 앞을 가로막다니 !”
먼저 입을 뗀 것은 데몰레온이었다. 히폴로테스의 뒤를
지키던 그는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목소리로 위병들을
겁박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의 외침에 몸을 움찔 떨면서도 쉬이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들끼리 눈치를 보는 위병들 사이에서 가장 우두머리로
보이는 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히폴로테스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자님! 황자님을 위한 승전식이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허나, 황제께서 완전 무장을 한 채로는 황성 안에 발을 들일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무장을 해제하셔야……"
“ 아아.”
히폴로테스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병사의 말을 뚝
끊어 냈다. 서리가 내려앉을 듯한 붉은 눈동자는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어째서지? 내가 쳐들어가 황제의 머리통이라도 딸 것
같아서?"
나른한 어조에 병사는 고개를 처들었다. 공포에 질린 시선이
이리저리 배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누가 보아도 반역을
주도할 게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 병사는 혼돈에 빠졌다.
“하긴, 이 정도 군사면 황실을 짓밟는 것은 일도 아니지. 네가
보기엔 어때? 내가 피바람을 몰고 올 것 같아?”
느릿한 물음에 병사는 그와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횃불처럼 강렬한 눈동자. 그것에
매료된 병사는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누군가 위급함을 알린 것인지 성문 앞을 지키기 위해
위병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물러나지 않으면 무력도
불사하겠다는 반응에 히폴로테스는 싱글거렸다. 여전히 눈치만
빠른 늙은이. 이제 그 지긋지긋한 면상을 짓뭉개는 일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나와 이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설마 그 조악한 칼로 나를
겨누기라도 할 셈인가?”
“황자님!”
횃불을 등진 히폴로테스는 온통 시커멓게만 보였다. 황금
전차 위에 올라탄 그는 허리춤에 있는 칼에 손을 대며 말을
이었다.
“열지 않으면 벨 것이다.”
고저 없는 목소리는 방금 전과 차원이 달랐다. 그에게서
풍기는 피 냄새를 맡은 병사들이 꽁꽁 얼어붙자 히폴로테스는
능숙하게 칼을 빼 들었다. 불어온 바람에 손등을 간질이는
뉙스를 느끼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칼끝을 병사들에게
겨누었다.
“선택해. 나를 따라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죽을
것인지.”
그를 대적하던 이들의 얼굴이 점차 황망해졌다. 온화한
황자의 껍데기를 벗어 던진 지배자 아래에서 병사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직위가 높은 병사까지
이마를 바닥에 박고 나서야 성문은 매끄럽게 열렸다.
그 사이로 히폴로테스는 전차를 몰았다. 황금 전차가
거침없이 앞장서 달려 나가자 전사들과 그들에 가담한
병사들은 그를 쫓아 성 안으로 진격했다.
승전식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성 안은 온통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불을 밝히지 않은 등불들과 황금빛 천이 바닥에 깔려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퍽 정성을 들인
모양새였으나 아무도 자리하지 않은 그곳은 금세 무용해졌다.
텅 비어 있는 승전식 자리를 잠시 둘러보던 히폴로테스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가 전차에서 내리자 다른 이들도
말에서 내려 무기를 꺼내 들었다. 소식을 전해 듣고 급히 달려
나온 병사들은 창을 고쳐 잡거나 투구를 잘못 쓰는 등
오합지졸이었다.
그럴 리 없다 외면해 두었던 일이 벌어지자 그들은 살육에
번쩍이는 눈들을 채 마주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을 양껏 비웃은 데몰레온은 창을 치켜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항복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터.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때, 황실을 지키는 병사 중 하나가 움츠러든 이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히폴로테스를 가로막았다. 그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부러 더욱 뻣뻣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저희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황실을 지킬
것입니다.”
“그래, 좋은 자세구나.”
다정한 대답에 눈을 크게 뜨던 병사는 갑자기 뒤바뀐 시야에
영문 모를 얼굴을 했다. 허공에 날아오른 그의 머리통이
포물선을 그리더니 바닥으로 추락한다. 퍽, 소리를 내며 떨어진
병사의 머리는 어딘가에 처박혔다.
“죽기 좋은 자세야.”
주인을 잃은 몸은 휘청이다가 핏줄기를 세차게 뿜어냈다.
무너져 내린 두터운 몸뚱이. 기겁한 병사들은 끅, 볼품없는
신음을 삼키며 질서 없이 뒷걸음질 쳤다. 여직 그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다른 병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외쳤다.
“뭐 하는 건가! 수는 우리가 훨씬 많다. 겁내지 말고 황실을
위해 싸워라!”
그러나 주변은 적막했고 곧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먼저 달려들지 못하고 우물쭈물 눈치만 보았다. 심지어 황실을
위해 싸울 것이라 과감하게 외친 병사마저도 홀로 남은 자신의
주변을 휙 둘러보다가 대항하지 못하고 입술을 콱 깨물었다.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는 병사를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히폴로테스는 뺨에 튄 핏방울을 손등으로 대강 흝으며 짧게
내뱉었다.
“ 가자.”
그것이 시작이었다. 히폴로테스의 뒤를 따르는 전사들과
병사들이 다시금 진격하기 시작하자 잠시 앞을 가로막았던
병사들은 멍하니 길을 텄다.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던 이들은
곧 허겁지겁 그들의 뒤꽁무니를 따라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