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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33화 (33/113)

33화

모든 일은 버러지 같은 신관의 예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황자의 자리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여태껏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신관이 드디어 예언을 했다.

‘티텐을 정복하는 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남은 황자라고는 형제들을 모두 척살한 히폴로테스뿐이건만,

티텐을 정복할 다른 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제국

전체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잔혹한 황자에

대한 뒷소문과 불만이 끊이질 않던 터라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갔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떠밀려 온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황제가 보낸 칙서를 한참 동안이나 읽어

내리던 히폴로테스는 이내 있는 힘껏 양피지를 구겨 버렸다.

험한 손속과는 달리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였다. 허나

핏줄이 불거진 주먹이 잘게 떨리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숨기려 능글맞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고작 작은 섬나라의 멸망이라니. 그것까지 원하신다면

그리하면 될 일.’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인가. 대체 얼마나 더 손을 뻗어야

닿을까. 그런 의문이 피어오를 때마다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가던

어미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기어올라 온 제게 남은

것은 이제 티텐의 멸망뿐.

히폴로테스는 칼을 갈며 티텐의 멸망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이들을 수소문하여 티텐의 공주들에

대한 정보를 손안에 넣게 된 그의 계획은 한 가지였다. 성벽을

수호한다는 비밀스러운 신전, 그 위치를 알고 있는 첫째 공주를

달콤한 말로 구슬려 티텐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는 테르모스를 통해 확실치 않은

소문 하나를 더 건네 듣게 되었다. 신전의 위치를 알아낸다 해도

허락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비밀에 그는 곤란해졌다.

그런 그에게 더불어 들려온 넷째 공주의 존재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넷째 공주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사실 존재 자체도 확실치는 않지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렇다고 합니다. 허나 만약 정말 넷째 공주가

존재한다면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같은 공주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감추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비밀리에 부처진 넷째 공주의 존재가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테르모스는 진지한 어투로 덧붙였다.

‘게다가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아주 오래전 티텐의 왕이 현재

왕비가 아닌 미천한 출신의 여자를 궁에 들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질투에 눈이 먼 왕비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여자를

저주했으나 그 어떤 능력도 통하지 않았답니다. 물론 항간에

떠도는 아주 은밀한 소문이지 만요.’

테르모스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알아낼 수 있는 것 역시 그

정도가 한계였다. 글로사가 아닌 넷째 공주를 선택하는 것은

분명한 모험이지만 글로사를 이용한다 해도 신전에 들어갈 수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허나 존재조차 모호한 공주라. 한참 고민하던 히폴로테스는

이내 묘안을 생각해 내고는 눈을 반짝 빛냈다.

‘가장 허름한 외관을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 외관을

그 공주가 꿰뚫어 볼 수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겠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넷째 공주의 존재는 확실치

않습니다.’

테르모스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대꾸하자 히폴로테스는 턱을

괴며 툭 내뱉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네 명의 공주 중 한 분과 연을 맺고 싶다고

미리 언질을 해. 이미 넷째 공주의 존재를 다 알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면 될 일이지. 답신이 오면 넷째 공주의 존재를 확실시할

수 있을 테고.’

명쾌한 혜안에 테르모스는 탄성을 흘렸다. 별일도 아니건만,

우러러보는 그의 태도에 히폴로테스는 낮게 조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넷째 공주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모호한

답신이 도착했고 이후 모든 일은 착실히 진행되어 갔다. 술술

풀려 가는 일련의 상황에 그는 치밀어 오르는 희열을 억누르며

가뿐한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황위에 았기 위한 마지막 관문. 배가 뭍에 닿았던 그 날, 가장

먼저 티텐의 땅을 밟은 히폴로테스는 손으로 내리쬐는 볕을

가리며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까마득히 높은 성벽의

그림자에 발을 들였더랬다.

흐려진 기억을 더듬던 그는 따갑게 닿아 오는 볕을 피해 몇

번 고개를 혼들었다. 천천히 눈을 뜨기 무섭게 선실 안으로

들어오는 아침 볕에 눈을 잔뜩 찡그리고 말았다.

“흐음.”

그는 잠기 어린 숨을 내쉬며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몇

번 문지른 두I,몸을 일으켰다. 몽롱했던 정신은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금세 맑아졌다. 그는 가죽 침상 위에 앉은 채로 선실

한편에 묶여 있는 여자를 한참 응시했다.

그는 여자의 몸과 발을 꽁꽁 묶은 굵다란 밧줄을 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모든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저렇게 옆으로 누워

작게 몸을 마는 것도. 주제에 내어주는 음식을 거부하는 것도.

개중 가장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혹시라도 바다로

몸을 던질까 봐 저리 묶어 두라 명령한 저 자신이었다.

타들어 가는 티텐을 빠져나온 그날, 에즈라를 등에 업은 채

배에 오르자 경악한 눈길들이 꽂혀 들었다. 그것을 마주하며

여유 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인 히폴로테스는 그러쥐었던

히에로스의 머리통을 갑판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후, 에즈라

역시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럼에도 여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데굴데굴 굴러

한구석에 처박힌 머리통과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창백한 여체.

널브러진 여자와 그를 번갈아 보던 이들은 어색해하며

서둘러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카코스는 도저히 히폴로테스의

의중을 물을 수 없었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남자의 선명한 분노.

그를 목격한 자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딱딱하게

얼어붙었더랬다.

그는 저를 둘러싼 이들을 쭉 둘러보다 우스운 말을 지껄였다.

‘황비로 삼아 주겠다 약속했거든.’

‘예?’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던 카코스는 비틀거리더니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모두가 그리 숨죽이기를 며칠, 항해는

순조로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에 다다를 것이다.

대놓고 히폴로테스의 눈치를 보던 이들은 곧 돌아가 벌어진

일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저들끼리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망국의 공주 따위는 그들에게 있어서

잊혀진 지 오래였다.

그럴 만도 했다. 히폴로테스가 머무는 선실 구석에 묶여 죽은

듯이 숨만 쉬는 여자는 기척도 내지 않았으니까.

아주 가끔 선실 안에서 들려오는 대거리와 고통에 찬 신음

소리. 아침저녁마다 던져 주는 빵 한 조각만이 여자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다 보니 모두는 쉬쉬하며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며 각자의 시간을 죽였다.

무엇보다 그들 모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끝마쳐야 할 일을 상기해 내며 히폴로테스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정신을 흩뜨려 놓는 여자의 존재는

잠시 미뤄 둔 채로, 저렇게 나를 바라보는 눈을 남겨 둔 채로.

“……히폴로테스 님.”

날 선 시선에 여자는 실수했다는 듯 입술을 꾹 내리 물었다.

시뻘건 피딱지가 엉겨 있는 입술은 보기만 해도 쓰라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처연한 눈동자에는 항상 물기가 가시지

않았다.

가증스러운 여자.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성들을 몽땅 죽여

버린 주제에 잘도 저런 얼굴을 한다.

“공주님께서는 습득 능력이 없는 건가.”

대충 옷자락을 갈무리한 그는 에즈라를 등진 채로 은발을

느른히 쓸어 넘겼다. 그의 붉은 눈이 찔러 들어오는 볕을 담아

반짝였다. 휙, 뒤를 돈 그는 구석에 묶여 있는 여자와 눈을

맞추었다.

“아니면 맞는 걸 즐기는 취향인가?”

한 대 갈기기만 해도 쓰러질 듯 연약한 몸 선과 말라비틀어진

핏가루가 뒤덮은 얼굴. 드러난 온몸에는 폭행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것을 흡족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훑던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주저앉은 에즈라의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그가 손을 뻗자마자 에즈라는 돌아올 폭력에 본능적으로

양팔을 들어 올렸다. 벌벌 떨면서도 꿋꿋이 방어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그는 쳐들었던 손을 다정한 척 뻗으며

시퍼런 멍이 든 뺨을 감싸 주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그의 붉은 눈동자가 가까웠다. 부푼 뺨에

닿아 오는 뜨거움이 쓰라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엇이 또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멍이 든 부분을 사정없이 짓눌러 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을

참았다. 몇 번의 폭력의 경험 끝에 체득한 일로 그는 제

목소리도, 신음조차도 듣기 싫어했다. 혹, 눈물을 흘리거나

신음이라도 내면 역겹다며 더욱 성을 내곤 했기에 두 손으로

입을 꽁꽁 틀어막고 눈물을 삼켰다.

“에즈라, 오늘은 어때? 여전히 죽고 싶어?”

그리고 그는 항상 물어 왔다. 에즈라는 그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날에는 뺨이 터지도록

맞았고, 고개를 내저으면 손가락을 마구 짓밟았으니까.

눈물 고인 눈으로 전하는 무언의 애원. 대체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말해 준다면 주저 없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텐데.

“어째서 저를 살린 거예요?”

가느다란 물음에 선실을 나서려던 걸음이 멎었다. 뒤돌아선

채로 굳어 있던 그는 몸을 돌려 에즈라의 앞에 다가와 섰다.

묻는 것은 늘 자신의 일이었으나 겁을 상실한 여자는 가끔씩

한결같은 말을 지껄였다.

“맞는걸 즐기는 쪽이었구나.”

“왜, 왜 나를 살렸어요?”

무시무시한 눈길이 머리 위로 꽂혀 들었다.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에즈라는 그 말만을 반복했다.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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