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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32화 (32/113)

32화

아직 대답하지 못했는데 그는 무심하게 칼날을 천천히 박아

넣었다. 살을 찢으며 박혀 들어가는 칼날이 아버지의 목젖을

조각내고 식도를 찢었으며 목뼈를 우득, 부러뜨렸다. 이내

관통하고 만 칼날에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히폴로테스의 몸에 가려져 있던 아버지의 목이 퍽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떨궈졌다. 채 눈을 감지도 못한 머리에서 울컥

피가 솟는다.

“아빠! 으아악!”

스케네가 자지러지는 소리가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팔로 바닥을 짚으며 바르작거리는데 일순,

누군가 다가와 팔을 억세게 잡아챘다. 강제로 얼굴을 마주하자

텅 비어 흐려진 녹색 눈동자에 익숙한 이가 비쳤다.

“마타리……?”

힘 빠진 여자의 몸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마타리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미친 상태의 여자를 말없이 잡아끌었다.

에즈라는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뒤를 돌아 마구 손을

휘저었다.

“저, 저기……아, 아버지가 있어요.”

“정신 차려요. 이리로!”

“아버지가 저기 있어요!”

“닥치고 따라와요!”

멎지 않는 몸부림에 마타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퍽

소리가 날 만큼 내리쳤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든 것인지 조용히

뺨을 감싸 쥔 에즈라는 어설프게 마타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앞서 뛰어가는 그녀의 뒤에서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던

에즈라는 곧 발에 힘을 주고 스스로 달리기 시작했다.

홀을 빠져나가는 두 여자를 지켜보던 카코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무릎을 꿇었다.

“ 따라갈까요?”

“아니, 내가 직접 갈 거야.”

예상했던 대답에 카코스는 뒤로 물러났다. 시리도록

무표정한 남자는 꾸역꾸역 내뱉었다.

“큰 도움을 주신 공주님께 직접 선물을 드리고 싶거든.”

“나는 탑으로, 돌탑으로 갈 거예요, 마타리.”

마타리는 에즈라를 이끌고 왕궁을 빠져나왔다. 왕궁의

비밀스러운 통로를 꿰고 있는 그녀가 성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멈춰 선 에즈라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미치셨어요? 거기는 안 돼요. 알잖아요, 올라가면 더 도망칠

곳이 없어요!”

“그래서, 그래서 가는 거예요.”

“……뭐라고요?”

우뚝, 앞서 달리던 마타리가 멈춰 서며 에즈라의 팔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윽, 신음을 내든 말든 마타리는 잔뜩 미간을

구긴 채 언성을 높였다.

“지금 죽고 싶다는 거예요?”

“왜 안 도망갔어요. 왜…… 나를 찾았어요?”

시답잖은 물음에 마타리는 애가 달았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으므로. 마타리는 머리를 헝클이며 잔뜩

인상을 썼다.

이봐요.”

“왜, 왜 나한테 잘해 줬어요? 왜 나를 찾아왔어요?”

“지금 그런 말 할 때예요? 나중에, 나중에 말할 테니 우선

빨리 따라와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걸까. 에즈라는 잡힌 팔을 휘둘러 제

팔을 뚝 끊어 냈다. 세 발짝 뒤로 물러난 여자는 마지막처럼

평온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갈 곳이 있어요.”

나를 사람으로 여겨 준 사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몰래

나를 살펴 줬고, 짜증을 내면서도 곁을 지켜 줬잖아. 꽃병을

가져다주고, 매일 이불을 정리해 주고,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안타까워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래, 나는 그런 당신이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조금은

사람다운 삶을 살아 나가는 것 같았어.

아마 이 마음은 평생 전할 수 없을 테지만.

“나는 히폴로테스 님을 기다려야 해요. 나는 그분을 따라

제국의 황비가 될 거거든요.”

그녀에게 죄책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저를 지워 버리고만 싶었다. 그러니 당장

뒤돌아 달려가야 하건만. 미련이 발목을 붙든 것인지 좀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고민하고 또 망설이던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마타리, 꼭 살아줘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즈라는 뒤를 돌아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도망쳤다. 끝까지 멍청하다. 누구를 착아 그토록

헤매었길래. 너덜너덜해진 에즈라의 발바닥을 알아챈 마타리의

두 눈에서 잊고 살았던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렸다.

저런 발로 잘도 뛰었구나 싶어서. 어설픈 거짓말을 남기고

멀어져 가는 여자를 잡을 수 없었다.

돌탑을 올랐다. 너무도 익숙한 돌탑의 먼지를 헤치며,

거치적거리는 옷자락을 한 손에 말아 쥔 채로. 언젠가 그를 보고

싶어 직접 올랐던 꼭대기를 향해.

“하아…”『

잔뜩 녹이 슨 문은 그때와 다를 것 없이 삐걱거렸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에즈라는 잠시 허리를 굽힌 채로 숨을 컥컥 토해 냈다.

끼긱거리는 소음을 내며 열린 문틈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여전히 내리는 비가 다시 스며들어 온다. 에즈라는 빗줄기

속에서 폐허가 된 나라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뿌연 연기.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잿빛 하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그러진 나라. 그리고…… 저 멀리 새파란 물결이 보였다. 그

위에 떠 있는 이름 모를 것들도.

폐허가 된 티텐을 둘러보던 에즈라는 한 방울, 두 방울

웅덩이에 퍼지는 자신의 피를 내려다보았다. 이것 보느 여기저기

고여 있는 빗물을 내가 더럽히고 있어. 내가 모든 걸 망쳤어.

모두를 죽였어. 어머니부터 아버지, 내가 없었다면 평화롭게

살아갔을 죄 없는 이들까지, 모두. 에즈라가 가장자리로

다가서던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남자가 문턱을 넘었다.

그의 인기척에 에즈라는 천천히 뒤를 돌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마주했다. 에즈라는 남자의 한쪽 손에 들린

머리통을 보며 홈칫 몸을 굳혔다.

“어때요? 선물인데.”

히폴로테스는 턱을 치켜들며 그녀의 앞에 머리통을

내던졌다. 데구루루 굴러온 아버지의 머리가 발치에 닿자

그녀는 고개 숙여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는 오랜 정적을

참지 못하고 주절거렸다.

“아버지를 바랐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챙겨 왔어요.”

한껏 비아냥대는 목소리와 기쁨이 들어찬 미려한 얼굴은

그토록 외면해 온 것이었다. 습관처럼 울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는 내게 웃음을 허락해 준 사람인데…… 그 앞에서는 늘 울고

말았어.

“표정이 왜 그래요? 맘에 안 들어요? 아! 왕비님도 챙겨 올

걸 그랬나.”

그럼에도 여자는 바닥에 놓인 아버지의 머리를 고개 숙여

바라볼 뿐이었다. 대놓고 얼굴을 찌푸린 그가 다시 입을

떼려는데 드디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끝까지 아둔한 여자를 양껏 비웃으며 쥐고 있던 칼에 힘을

주었다.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칼집에 묶인 뉙스가

손등을 간질였다. 때마침 눈을 들어 올린 에즈라와

히폴로테스의 눈이 마주쳤다.

말을 잃은 사이, 여자의 입술이 벌어졌다.

“사실 오지 않을 줄 알고 있었으면서.”

오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는 말에 히폴로테스는 그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그는 제 얼굴을 더듬어 보고 싶었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저히 가늠이 가질 않아서.

“히폴로테스 님, 다행이에요.”

다행이라는 말에 그는 분명히 미간을 좁혔다.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을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을까, 그는 느릿하게 물었다.

“뭐가요?”

“이렇게 비가 내리잖아요.”

가냘픈 인영이 탑의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여린

바람 한 점이 너절한 치맛자락을 휘감고 스쳐 지나갔다. 여자도,

저도 피범벅인 채로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자는 별말 없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덜너덜하게

잘린 그녀의 아버지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던 내게.

그것이 어쩐지 안심이 되어 가슴께를 틀어쥐는데 에즈라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았던

날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잠깐

허물어졌다. 휘어진 붉은 눈동자는 무감했다.

고개를 푹 숙인 에즈라는 깨진 손톱으로 피와 빗물에 흠뻑

젖은 그의 옷자락 끝을 말아 쥐었다.

“묻은 피가……다 지워질 거예요.”

뭘 안다고. 그런 표정으로 이런 말을 지껄이는 건가. 평정을

가장하던 히폴로테스의 마른 장작과도 같은 가슴에 불씨가

던져졌다. 소리 없이화르륵 불타오르는 분노는 여자를 향했다.

더 이상 두고 보는 일은 위험했다.

이런 여자 따위. 한 손으로도 목을 꺾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에즈라의 새하얀 목덜미를 움켜쥐려는 찰나, 에즈라는

빠르게 뒤를 돌았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나를 뒤로한 가녀린 등이. 피가

튄 얇은 종아리에서 물결치는 옷자락이. 바람에 헝클어지는

검은 머리칼과……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그 일련의 과정이.

“……에즈라!”

이름을 불렀다. 부르면 멈출까 싶어서. 부름에 멈칫한 여자가

탑의 가장자리에서 흩날리는 잎사귀처럼 나부꼈다. 얼굴을

마주하기 무섭게 히폴로테스는 미친 사람처럼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밀랍 같은 여자의 손끝과 피범벅인 손끝이 스친 찰나의

순간, 그는 죽여야 하는 여자의 손목을 마침내 틀어쥘 수

있었다.

이간 돼……,”

그는 허공에서 흔들리는 에즈라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여자는 죽은 듯 늘어진 채였다.

여자의 발아래서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을 보며 그는 자조했다.

“감히, 감히 도망치려 하다니.”

에즈라를 더욱 꽉 틀어쥐는 자신이 이해 가지 않았다. 죽이려

했으면서, 머릿속을 울릴 만큼이나 세차게 뛰어 대던 심장이

멎는듯했다.

그것도 모자라 세상 둘도 없는 머저리처럼 달려가 죽여야

하는 여자의 손목을 틀어쥐고 말았어.

탑 아래로 늘어진 여체를 꽉 부여잡으며 놓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한 그때.

“……에즈라.”

이토록 절박한 목소리는 제 것이 아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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