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왕이시여. 넷째 공주님을 죽여야 합니다. 공주님께서는, 아니
공주님이 가지신 능력은 티텐을 멸망으로 이끌 것입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그날 밤. 신관들이 비밀스럽게
히에로스를 찾았을 때,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젊은 왕은 한창
비통함에 젖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할 수는 없다.’
그리 윽박질렀지만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나온 어린것. 그 아이에게 죄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무구한 눈동자를 볼 때마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아이를 향한 원망이 스물스물 그를 좀먹었다.
아이만, 이 아이만 없었더라면…… 그녀는 살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아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저는 주저 없이 아이를 버렸을
것이다.
‘아르고스 신의 예언입니다. 불길한 것은 없애야 합니다.’
신관들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모두를 위해서 죽여 마땅한 아이. 어미를 죽이고 태어난.
존재부터가 불길한 아이.
그럼에도 그는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죽여서는 안 되었다.
숨이 끊어져 가는 순간에도 아이를 걱정하던 여자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선해서. 도저히 그리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겠다. 최대한 존재를 지울 수 있을
만큼 지우고, 최소한의 것을 보고 듣게 하겠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이라도 붙여 놓게 해 다오.’
‘ 왕이시여……"
신관들의 얼굴은 깊이 둘러쓴 로브에 가려져 보지 못했으나.
낮은 한숨만은 너무도 잘 들렸다.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를 오래. 더없이 간절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미 이리될 줄 알고 있던 건지는 몰라도
그들은 결국 말없이 돌아섰더 랬다.
툭. 얼굴을 가렸던 손을 떨구기 무섭게 복도 건너편에서
창백해진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들이
무어라 크게 외치는 것 같았는데 귓가를 울리던 찌릿한 소음이
말을 막아 끊겨 들리기만 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마구
털어 냈다.
“왕이시여! 성벽 너머에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군사라면 어느 나라의 군사인가. 하필 이런 때에 침략이라니.
허용 범위를 넘은 혼란에 사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새파랗게 질린
히에로스의 앞에 머리를 조아린 병사 하나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서, 성벽 너머 바, 바다에 수백 척의 배들이!”
“……수백 척?”
그가 힘겹게 되묻자 병사가 쥔 창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 피하셔야 합니다. 당장 이곳에서 피하셔야 합니다!”
“말도안되는 소리!”
그 어느 때보다 언성을 높이며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자 왕의
으름장에 병사들은 찔끔하며 눈치를 보았다. 내가 나라를 비우고
도망치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건가. 왕국을. 백성을 뒤로하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어.
“전쟁! 전쟁입니다!”
모여드는 왕궁 병사들이 한목소리로 전쟁을 알려 왔다. 아아.
어쩌면 이리될 줄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
히에로스는 가슴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상황을 파악하기 무섭게 또다시 땅이 울리자 히에로스는
느리게 고개를 틀어 저 어드메를 내다보았다.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발판 삼아 몰려들어 오는 검은 병사들을.
해를 가린 재앙이 밤을 만들어 냈다. 어둠에 잠긴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던 에즈라는 눈물 고인 눈을 세게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으면서. 정말 나를 버리고 가 버렸어.
그럴 것이라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긴
듯 아파 오다니. 사랑은, 정말 사랑마저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 아악!”
터져 나오는 비명을 지르다가 흐느끼기도 잠시, 제 울음마저도
역겹게 느껴졌다. 에즈라는 떨떨 떨리는 손으로 수차례나 제 뺨을
내리쳤다.
성벽은 무너졌고 그 아래로 죄 없는 사람들이 발밑의 개미처럼
깔려 죽어 갔다. 자신이 저지른 살상을 얼마나 방관하고 있었던
걸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머리 위로 비구름이 몰려들었다.
하나둘 떨어지는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더니 이윽고 쏟아붓기
시작했다. 머리칼을 적시고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어깨와
온몸을 때리며 세차게 내렸다.
한참 비를 맞고 서 있던 에즈라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겨
터벅터벅 걷다가, 달렸다. 이제는 내리막이 되어 있는 오르막길을
허둥지둥 내달렸다.
“윽!”
신고 있던 낡은 샌들은 벗겨진 지 오래. 끝이 뾰족한 돌들이
발바닥 여기저기를 찢었다. 빗물에 축축이 젖은 땅은 미끄러웠고.
험한 뜀박질에 몇 번이나 바닥을 굴렀음에도 에즈라는 멈추지
않았다. 득달같이 일어나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왜 나를. 나를 두고 간 거야.”
나를…… 버리지 마.
그 말만을 중얼거리다가 에즈라는 또다시 넘어져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 칠갑을 한 그녀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생채기가 빼곡했지만 이미 정신이 나간 에즈라는
아픔도 잊은 채 왕성 안으로 달렸다.
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인간인가. 저 같은 인간 하나 때문에 죄
없는 이들의 삶이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그러니 저 같은
건 아파할 자격도 없었다. 모든 게 위선일 뿐이니까.
모두가 나를 역겨운 인간이라 손가락질했으면. 죽어 버리라
하며 마구 돌을 던졌으면. 아니, 아니야 그것도 죄책감을 지우기
위함이잖아.
어차피 태생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괴물이라면……
끝까지 괴물로 남아 그를 살리면 안 될까.
“아버지!”
꽉 막혀 있던 울음이 트이며 그 이름을 내뱉었다. 아이처럼
소리 내 울던 에즈라가 자신이 머무는 돌탑을 지나 막 본궁으로
내어진 다리를 건너던 그때였다. 훅 끼쳐 오는 뜨거운 바람에
에즈라는 멈칫하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망설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왕성 아래 마을들은 온통 불바다였다.
“이. 이게 왜…… ”
대체 누가, 언제부터 불을 지른 건가. 비가 세차게 내림에도
치솟는 불꽃은 꺼질 기미가 없었다. 먼지와 매캐한 연기가 섞인
티텐은 지옥도와 같았다.
에즈라는 아연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으며 다시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몇몇 살아남은 백성들이 왕성 입구에 서서
들어오겠다 마구 몸부림쳤으나 훌쩍 따라온 검은 갑옷을 입은
전사들의 칼에 베여 낙엽처럼 스러져 갔다.
왕성 밖을 지키던 병사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병사들은 왕성까지 뚫고 들어올 것이다.
에즈라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단 한 사람을 향해 다시
달음박질쳤다. 드디어 본궁의 입구로 들어선 그녀는 히에로스가
있을 중심을 향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즈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논……?”
창을 든 채로 멀뚱히 서 있는 남자. 그의 발치에는 커다란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익히 아는 검은 머리칼 뒤로 뜨거운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에즈라 공주님.”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에즈라를 불렀다. 에즈라가 그의 뒤로
다가서는 왕궁 병사들을 보며 눈을 크게 뜨기 무섭게 제논은 창을
반 바퀴 휘둘렀다. 일도에 셋을 베어 버린 그는 병사들이 한껏
뿜어내는 피를 또다시 뒤집어썼다. 그의 옷자락을 적신 피가
주르륵 흘러 내린다.
아주 잠깐 에즈라를 응시하던 제논은 다른 쪽에서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를 저대로 보내야
할까. 아니. 대체 지금 나는 뭘 하려고 이러고 있는 건가.
에즈라는 천천히 걸으며 여기저기 피가 튄 왕성을 둘러보았다.
가서 뭘 어쩔 수 있다고 계속 달리는 걸까. 이렇게 만든 건……
나인데. 모두 내가 저지른 짓인데!
"하. 하하!’’
미친 듯이 허공에 대고 웃다가 핏물에 미끄러져 처참하게
바닥을 굴렀다. 엉망으로 깨진 무릎에도 멈추지 않고 왕궁의
중심으로 뛰었다. 얼얼한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히폴로테스를 찾아 헤매던 에즈라는 어딘가에 멈추어 섰다.
피와 살점으로 뒤덮인 그녀는 느려진 걸음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 맹세했는데.”
에즈라는 언젠가 자신과 히폴로테스가 사랑을 맹세했던 문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입을 열자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황금문 앞에는 얼굴이 갈린 병사들의 시체와 피가 잔뜩
고여 있었다.
문턱 앞에 서자 넓은 홀 안에 빼곡한 병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갑옷을 입은 그들의 칼은 모두 한곳을 향해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길의 끝자락. 다섯 개의 계단 위에 놓인
황금 왕조느 그곳에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아,아
아버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십 번을 외쳐 보았는데 바로
앞에 두고서는 차마 부를 수 없었다. 에즈라의 신음 같은 부름에
여태 눈을 감고 있던 히에로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저 멀리 서
있는 딸을 눈에 가득 담던 그는 놀랍게도 힘겹게 웃어 보였다.
“우습지. 여기까지 와서 바라는 게 고작 저 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거라니.’’
히에로스는 히폴로테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들어 올려 시리도록 무표정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히에로스는 붉어진 눈가를 감추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도 안아 주지 못했거든.”
“그거 다행이군요. 마지막으로 볼 수 있어서.”
에즈라는 멀거니 서서 아버지에게 검 끝을 겨눈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이 갈기갈기 찢어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아서 그의 이름을 차마 부를 수 없었다.
“이 나쁜 년! 너지! 너였어!”
귓가를 찢을 듯한 증오가 울려 퍼졌다. 아득한 절망에서
빠져나온 에즈라는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병사들에게 붙잡힌
채 등이 짓눌린 스케네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안간힘을
써서 고개 돌려 저주를 내뱉는 그녀에게 병사가 험악하게
일갈했다.
“닥치지 못해!”
“아악! 이거 놔! 아빠, 아빠!”
등을 짓누르는 통증이 더욱 심해졌는지 스케네는 히에로스를
부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에즈라는 계단 아래 고깃덩이로 식어
가는 미네스의 시신에 결국 자리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공기마저 무거워진 적막 속, 스케네의 울음을 뚫고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예상치 못한 에즈라의 말에 히폴로테스는 뒤를 돌아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는 에즈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서릿발 같은 붉은
눈길이 닿아 온다. 히폴로테스는 줄이 끊긴 인형 같은 에즈라를
보며 온화한 미소를 걸쳤다.
그 미소에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별이 쏟아질 것 같던
밤하늘 아래의 그도 그렇게 웃어 주었으니까. 젖은 머리칼을 대신
말려 주던 순간의 그도 이렇게 웃어 보였었어.
흐르는 눈물이 뜨거워 마음을 녹인 모양이었다. 에즈라는 결국
울음을 토해 내며 크게 외쳤다.
“왜 먼저 갔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제 발로 온 거예요? 잘됐네요. 찾아갈 필요도
없고. 재밌는 것도 보여 줄 수 있고."
히폴로테스는 더없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다가 할 수 없다는 양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잘 봐요. 보기 드문 거니까.”
휙. 미련 없이 에즈라에게 등을 보이며 그는 히에로스의 목을
향해 칼날을 세웠다. 두터운 칼날은 목구멍에 찔러 넣기만 해도
단번에 목을 찢을 수 있을 것이다.
결코 빗나가지 않을 히폴로테스의 칼이 움직인 찰나, 잔뜩 눈물
고인 갈색 눈동자는 에즈라만을 바라보았다.
“에즈라. 제발……오지 마라.”
너무 고요한 탓일까. 애석하게도 그 잔인한 말은 너무도 잘
들렸다.
“ 도망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