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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29화 (29/113)

29화

죄송해요. 내가 미안해요. 그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는데

글로사는 피를 토해 내면서도 저주를 멈추지 않았다.

“네 탓에. 주, 죽어 가는 영혼이 네 삶을 떠나지 않을 거야.

밤마다 너를 찾을 거야. 찾아서…… 네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을

거야. 그리고 그곳엔, 나도 있겠지.”

헐떡이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저주를 퍼붓던 글로사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피범벅이 된 에즈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피.

피였다. 피밖에 없었다. 익숙해져 버린 비릿한 혈 향 가운데 홀로

남겨진 에즈라는 붉은 입술을 뗐다.

“저…… 머리를 쓰다듬어 준 순간, 사랑에 빠졌어요.”

공허한 목소리에 곧 눈물이 담기더니 축축해졌다.

“정말 우습지만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우습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글로사의 시체를 바로 눕히고 썩어 들어갈 귓바퀴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에즈라는 아무도 듣지 못할 혼잣말을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줄곧 혼자 남는 것을 택할 거예요. 아주 기껍게.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다면…… 그마저도 모르게.”

티텐의 왕궁은 중심을 기준으로 크게 사방으로 뻗어 있는

구조였다. 가장 따뜻한 남쪽 궁은 글로사가. 동쪽 궁은 디케가.

서쪽 궁은 스케네가 각자 머물고 있었다. 서로의 취향에 따라

궁이 뿜어내는 분위기가 각각 달라 퍽 볼 만한 왕성이었다.

하지만 북쪽에는 궁이 없었다. 그저 스산한 분위기를 내뿜는

커다란 산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산으로 향하는

길이 나 있지 않았다. 그러니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뿐더러

혹, 길을 알고 있다 해도 굳이 들여다보지 않을 만한 산이었다.

그나마 전해져 오는 괴담이라면, 어떤 알 수 없는 무리들이

검은 산을 드나든다더라. 딱 그 정도였다.

“검은산이라.”

재가 쌓인 것처럼 시커먼 산속에 파묻혀 있을 줄 상상이나

했나.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자 히폴로테스는 피가 튄 뺨을

긁적이며 픽, 조소했다. 혈육을 죽인 것이 충격이긴 한 모양인지

제 앞에 주저앉은 여자는 피 묻은 단도를 여직 꽉 부여잡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꼴에 신물이 났으나 지금은 연기를 끝마칠 때가

아니었다.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피 묻은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귓가에 꽂아 주었다. 그제야

휜히 드러난 말간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히폴로테스 님. 이제 무얼 하면 되나요? 저, 저, 더 할 수

있어요. 히폴로테스 님을 위해서라면.”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까지 했는데 더 못할 게 뭐가 있을까.

에즈라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쩌면…… 디케의 죽음을

원했는지도 몰라. 끓어오르는 복수심에 글로사를 죽였는지도

모르지. 나는. 나는 아마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끝까지 당신의 삶을 선택하고 끝내 죽고 말겠어.

에즈라가 다짐하며 히폴로테스의 하얀 옷깃을 꽉 쥐었다.

처절한 눈빛과 어딘가 광기 서린 말투. 히폴로테스는 그 모든

것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 혈 향에 에즈라를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무언가에 찢긴 듯한 상흔을 발견했다. 갈라진 살

틈에서 흐르는 피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말하지 않았어요.”

급히 옷깃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는 동안에도 여자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탁한 눈동자 안에 담기만 했다.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리던 히폴로테스는 힘없이 늘어지는

팔을 놓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망친것만 같아.”

“그렇지 않아요. 나를 망친 건…… 나예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

가요. 아직 할 일이 남았잖아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여자는 잘도 지껄였다. 그는

에즈라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시퍼런 미명은 가시고 하늘은 밝아 온다. 곧 모두가

깨어날 것이다. 여자의 말대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왕성의 뒤쪽, 검은 산을 향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양 빼곡하게

늘어서 있던 나무들이 양쪽으로 휘어지더니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만들어 낸다. 빛 한 점 들지 않아 무척이나 어두웠고 스산한

길은 제 발끝에서 멈추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에 말을 잃고 서 있던 두 사람은

마치 짜 맞춘 듯 오르막길을 응시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 길을 따라 산을 올라야 한다.

히폴로테스는 에즈라를 잡아끌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보폭이 큰 그를 따라가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지만 숨을

고를 새는 없었다. 뒤돌아보니 허리춤에 커다란 칼을 매고서도

빠르게 뒤를 따르는 데몰레온이 보였다. 이내 앞만 보고 뛰었지만

동여맨 옷깃에는 계속해서 핏물이 비쳤다.

결국 숨이 벅차 멈춰 버린 에즈라를 곤란한 얼굴로 바라보던

히폴로테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어깨에 그녀를 들쳐

멨다.

“미안해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으읏…”:’

짐짝처럼 그의 어깨 위에 실린 에즈라는 신음을 흘렸다. 단단한

근육과 어깨뼈가 사정없이 배를 짓눌러 오자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내려 달라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한시가 급박한

지금, 그들에게 자신은 짐짝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니까. 에즈라는

입술을 터져라 내리 물고 신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거의 다 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히폴로테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르막길이 끝나자 탁 트인 평지가 보였다. 히폴로테스는 들쳐 멜

때만큼이나 빠르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잠시 비틀거리던

에즈라는 곧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시선을 바로 하자 저 멀리 낯선 궁이 자리해 있었다. 북쪽에

궁이라니. 의아함도 잠시. 에즈라는 거리낌 없이 새까만 돌바닥을

짓밟으며 그곳을 향해 뛰었다. 다른 궁들에 비하면 턱없이 비루한

궁에서는 신성하고 시린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원래부터 존재했던 걸까. 아니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걸까.

주변을 둘러싼 황량한 산에는 계절이 없었고. 닳아빠진 세월의

흔적만이 가득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문 앞에 다다른 에즈라는 가쁜 호흡을

고르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은색 문에는 알 수 없는 붉은

신어들이 가득했다. 그녀의 옆을 지키고 선 히폴로테스는 그것이

다알리아 신의 신명임을 알아채고는 환희를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티텐의 성벽을 지켜준다는 신성력이

잠재워져 있는 곳을.

히폴로테스는 에즈라를 앞세웠다. 여성의 힘으로 열기에는

택도 없을 두터운 문은 그녀가 손을 뻗자마자 활짝 열렸다.

당황한 에즈라는 주변을 둘러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들어가세요. 공주님.”

망설이는 마음을 눈치챈 히폴로테스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떠밀었다. 한 발짝 들어서자 생경한 광경이 펼쳐졌다. 까마득히

높은 둥근 천장은 물론이고 사방이 시꺼먼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에 줄 지어 이어진 촛대와 그 위에서 타오르는 새파란

불꽃들. 어둑한 궁 안을 밝히는 불꽃은 영원히 타오를 것처럼

오묘한 빛을 내뿜는다. 어디로 보나 평범한 곳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중심에 위치한 계단은 지하로 향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입구

양 끝에 덩그러니 꽂혀 있는 두 개의 검이 두려웠지만 에즈라는

결연한 얼굴을 했다. 끝이 암흑뿐인 그곳을 내려가려 한 발짝

다가서는데 양쪽 벽에 감추어져 있던 문이 열리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물러나시지요.”

로브로 모든 것을 가려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 나선 이의 목소리는 무척 낡아 있었다. 걸음을 멎게 만들

정도로 위엄 서린 목소리는 어딘가 무기력하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처럼.

그것이 발목이라도 붙든 양 멍청히 멈추어 있자 히폴로테스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얻었다. 반강제적으로 그와 시선을 맞춘

에즈라는 불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걱정 말고 내려가요. 우리는 저곳에 다다르지 못하지만

당신만은 들어갈 수 있으니까.”

“어, 어째서 저만……,”

“당신은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

뜻밖의 사실에 깜짝 놀란 에즈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제서야

머릿속에 담겼던 의문들이 하나둘 풀려 가기 시작했다. 그의

본모습을 홀로 알아본 것도, 글로사가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숨겨져 있던 이곳을 찾아낸 것도…… 모두 이해가 갔다.

히폴로테스는 단숨에 굳어 버린 에즈라를 살짝 흔들며 급박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러니 저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요. 당신이 나올 때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가요.”

에즈라는 고개를 돌려 자신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발은 모두

자신을 향해 있었다. 에즈라가 휙 뒤를 돌아 돌계단을 하나

내려간 순간, 벼락같은 외침이 떨어졌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티텐이 멸망할 것입니다!”

히폴로테스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그들은 에즈라에게 경고할

뿐,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대답 없이 계단을 한 층 더

내려가자 누군가 다급하게 등에 대고 외쳤다.

“공주님의 손으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시렵니까.”

내 손으로? 에즈라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서 말라붙은

핏가루가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내린다. 에즈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내려다보는 히폴로테스와 눈을 맞추었다. 막을 길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뺨에 번진 피를 씻어 내렸다.

“……에즈라. 여기서 기다릴게.”

그의 부름에 에즈라는 눈물로 젖은 입꼬리를 형편없이 올려

보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몸과 여기저기 찢어진 옷가지.

그리고 눈물로 범벅된 얼굴. 조막만 한 얼굴을 더듬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추한 몰골일 테지만 상관없었다. 그에게 나는……오

“걱정마세요. 히폴로테스님.”

사실 나는 알고 있어. 그저 스스로 부정해 왔다는 것도.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칠 수 있어서.

히폴로테스는 시간을 끄는 에즈라를 못마땅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제 에즈라는 다른 선택지는 없을 테니 굳이 거짓

사랑으로 마주 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가 조급함을 감추지

않고 턱짓하자 여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탓에 고였던 눈물이

또다시 얼룩진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에즈라는 마지막으로 은빛 뉙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피로

범벅되었지만 분명 단단히 묶여 흔들리고 있는 그것을.

‘무슨 소원을 빌었어요?’

진지하게 물어 오던 붉은 눈동자가 아직도 너무 선명해서……

분에 넘치는 소원을 빌며 보냈던 시간들이 너무 아팠다. 그만큼

아파 죽어도 상관없었다. 당신을 사랑한 값이 죽음이라면, 과거로

돌아간대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거야.

“영원히 승리할 거예요.”

사람이 성벽이라면, 당신은 이미 나를 무너뜨렸으니까.

찰나가 영원 같던 그때, 여자는 지금까지 주저하던 것이 무색할

만큼 재빨리 뒤를 돌았다. 차마 이름을 부르기에도 뭣한 아주

짧은 시간. 에즈라는 투박한 돌계단을 따라 검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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