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은 무척이나 시려웠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밑에 고인 핏물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적셔 왔다. 계단 중간에서 멈춰 선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와 데몰레온만을 올려 보냈다.
아직, 아직은 자신이 배후라는 것을 들켜선 안 되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글로사의 침실 앞에 다가서자 그들을 발견한
하녀들이 꺅, 소리를 질러 댔다. 하지만 그뿐, 살상에 무뎌진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하녀들의 배를 가르고, 목을 찢었으며,
흉부에 무지막지한 칼을 박아 넣었다.
빠득빠득, 뼈가 조각조각 나는 소리가 선득해서 온몸이 달달
떨려 왔다.
“다 되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있겠습니다.”
“데, 데몰레온……"
이름을 중얼거리자 성큼성큼 멀어져 가던 그는 잠시 뒤돌아
묵례를 하더니 말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에즈라는 침을 꼴깍
삼키며 문에 귀를 대 보았다. 분명 하녀들이 내지른 신음을,
일어난 소란을 모를 리 없음에도 방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에즈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천천히 열어 보았다.
글로사가 그 앞에 대기하고 있을까 봐 단도를 확 쳐들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틈으로 급히 몸을 밀어
넣은 그녀는 널따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미명이 밝아오는 새벽, 창밖으로 보이는 장미 정원은 온통
푸르스름하다. 방 안을 밝히는 여러 개의 등불 덕에 전혀 어둡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이…… 아주 잘 보일 만큼이나.
“에즈라.”
불리운 이름에 하마터면 단도를 떨어뜨릴 “뻔했다. 에즈라는
발이 쳐진 침상에 걸터앉은 인영을 보며 한 걸음 다가섰다. 뒤를
돈 채로 창밖만 바라보던 그녀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켜 모습을
드러냈다.
에즈라는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금빛 침의를 입은
글로사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자신의 옷을 훑어보았다.
너절한 무명 키톤. 이곳저곳 튄 피에 젖은 그것은 마치
짐승의 가죽 같았다. 혈육의 피로 범벅인 손을 응시하던
에즈라는 곧 입술을 짓씹었다.
‘나를 버리지 말아요.’
그가 귓가에 속삭인 말이 되풀이됐다. 살짝 고개를 숙였던
에즈라는 천천히 눈을 들어 글로사를 노려보았다. 어디선가
들어찬 바람이 짧아진 검은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간다. 그녀는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포기해서는 안 도부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어.
“너, 미쳤구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런 모습으로 나를
찾아와. 네까짓 게 감히……"
평정을 가장하던 글로사는 에즈라가 한 걸음씩 다가오자
그만큼 물러서기 시작했다. 탁, 창틀에 등이 닿자 글로사는
장식품인 촛대를 움켜쥐며 그녀를 겨누었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글로사 님. 해,
해치지 않아요.’’
“다가오지 마. 해치지 않는다는 년이 잘도 그런 걸 들고
있구나.”
“이건, 이건……!”
“나를 협박하기 위해서겠지. 내게 대답을 들어야 하는 너는!
절대 나를 죽일 수 없어. 안 그래?”
글로사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뒤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내뱉은 말은 결국 발악처럼 방 안을 울렸다.
“글로사공주님.”
에즈라가 자신을 부른 순간, 글로사는 어딘가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무언가 이상했다. 페리도트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자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해 버리고 말 것 같은
위험함에 눈을 피하려 했지만 사로잡힌 듯 피할 수가 없었다.
일순, 디케가 찾아와 전쟁을 입에 담던 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설마설마했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자 글로사는
마구 도리질 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성벽만
멀쩡하다면 그 누구도 티텐을 멸망시킬 수 없어.
“디케를 죽였니?”
에즈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에 글로사는 비틀거리다가
촛대를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을 내는
그것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에즈라가 단도를 들어 그녀의 앞에
들이밀었다.
“말해 주세요.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법 말예요.”
에즈라 혼자서 이런 일을 벌였을 리가 없다. 히폴로테스의
계략을 모두 파악한 글로사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허공에 대고 미친 듯이 웃어 대던 그녀는 고인
눈물을 훔치며 끅끅거렸다.
“어쩐지, 어쩐지 너를 택할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정신 차려.
에즈라, 너는 그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거야.”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에 에즈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끝까지 아픈 곳을 찔러 오는 글로사가 미웠다. 울렁이는
에즈라를 간파한 글로사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그를 도와 티텐을 멸망시키면! 그가
너를 진정 사랑해 줄 것 같아?”
“대답해 줘요, 언니. 알고 있잖아요.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이 뭔지!”
“대답할 수 없어.”
글로사는 대놓고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에즈라는 제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글로사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성큼 다가가 글로사의 팔을 잡아채려던 그때,
어느새 촛대를 주워 든 글로사가 그녀를 향해 위협하듯
휘둘렀다.
“으읏!”
방심한 사이 팔을 길게 베인 에즈라가 바닥에 쓰러지자
이때다 싶었는지 글로사는 그녀의 등을 향해 한 번 더 촛대를
치켜들었다. 끝이 뾰족한 촛대를 겨우겨우 피한 에즈라는 몸을
일으켜 단도를 들이밀었다.
다가오던 글로사가 멈칫하자 에즈라가 외쳤다.
“제발 말해 줘요! 티텐을 멸망시킬 비밀이 원지 제발……-”
“닥쳐!”
여전히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휘두르는 촛대를 피해
에즈라는 글로사의 다리를 붙든 후 잡아당겼다. 졸지에 넘어진
글로사의 위를 점령한 에즈라는 단도로 글로사의 목을
겨누었다.
“그래야, 그래야 히폴로테스 님이 살 수 있대요.”
혹시라도 이 단도가 그녀의 목에 닿을까 에즈라는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그런 에즈라를 이미 알고 있던 글로사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어 보인 후 손에 들린 촛대로 에즈라의 허벅지를 푹
찔렀다.
엄청난 통증에 나동그라진 에즈라가 뜨거운 상흔을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는데 글로사는 다가와 에즈라의 목을
콱 짓밟았다. 그 한순간의 실수로 눈이 마주쳤다. 녹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에즈라는 마지 막으로 물었다.
“말해.”
“뭘 어떻게 하면 티텐을 멸망시킬 수 있는지.”
으윽! 목이 짓눌려 옴에도 끝끝내 멈추지 않았다.
에즈라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한 채로 글로사는 입을 열고
말았다.
“검은산.”
검은 산? 에즈라가 혼란스러운 만큼 글로사도 혼란스러웠다.
그저 알고 있던 사실일 뿐. 진정 검은 산에 비밀이 묻혀
있는지는 몰랐으므로. 에즈라는 그 커다란 산을 온통 뒤집어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혼란도 잠시, 진실인지는 몰라도 이것은 나라의 존폐가 걸린
비밀이 아닌가. 뱃속에 숨겨져 있던 것을 토해 내 버린 글로사는
회까닥 눈이 돌아갔다.
“너를 죽이면……! 죽이면 돼!”
막 뒤를 돌아 도망치려는데 급히 몸을 일으킨 글로사가
촛대를 들고 달려들었다. 뒤를 돌아보기 무섭게 어깨를
얻어맞고 넘어지자 글로사는 에즈라의 위를 덮치고 내리찍기
위해 촛대를 위로 들어 올렸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에즈라는 눈을 질끈 감고 단도를 치켜들었다.
“아, 아
그녀의 단도는 정확히 글로사의 턱 아래를 꿰뚫었다. 허망한
얼굴의 에즈라가 단도를 놓치자 갈라진 살 틈에서 후드득, 피가
떨어져 내린다. 밑에 깔린 에즈라의 목께를, 얼굴을 적시는
글로사의 피가 너무 많았다.
턱 아래가 반으로 나눠진 글로사는 자신이 어디를 다쳤는지
알지 못하고 손을 바둥거렸다. 그런 그녀를 퍽, 밀쳐 낸 후
에즈라는 기어서 그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 나는 주, 죽이려고 하, 한 게 아닌데. 정말 아닌데.”
죽이고 싶지 않았다. 정말 죽이려던 의도는 없었어. 살고
싶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아악!”
충격을 못 이겨 제 머리칼을 잡고 마구 신음했다. 방을
울리는 울부짖음에 숨을 헐떡이던 글로사가 큭큭 웃다가
뭉개진 발음으로 뚝뚝 끊어지는 말을 이었다.
“벌……받을거야.”
글로사의 목소리에 에즈라는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머리를 무릎에 올려놓은 에즈라는 눈물을
흘리며 글로사의 머리를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