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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27화 (27/113)

27화

잡고 있던 디케의 팔을 버리듯 놓은 에즈라는 침상에서 반

바퀴 굴러 떨어졌다. 천만다행으로 그녀의 검 끝은 피할 수

있었으나, 디케는 저를 놓치지 않았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에즈라가 차마 일어설 생각도 못 하자 디케는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다가오며 에즈라를 한곳으로 몰아넣었다.

“고, 공주님 …… 사, 살려 주세요.”

“살려 달라고?”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연기를 해 대는 말에 디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가증스러운 년! 네가, 네가 티텐을 멸망시키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에즈라가 손을 겹치며 목숨을 구걸하자 디케는 눈을

번뜩이며 크게 소리쳤다. 내지른 외침이 돌탑 안을 크게 울린다.

자신과 히폴로테스의 비밀을 다른 누군가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입만 벙긋거리자 디케는 터져 나오는 분노를 마구

표출하기 시작했다.

“지, 진짜였어 ! 내가 옳았던 거야! 너는, 너는 티텐을 망치려

드는 버러지 같은 종자라고! 이래도 내가 너를 살려 두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잔뜩 흥분한 디케가 머리 위로 칼을 치켜들었다. 눈앞으로

내려오는 칼끝이 어쩐지 느리게만 보인다. 이곳에서 디케에게

죽임당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만약 내가 여기서 죽게

된다면 히폴로테스 님은 고국으로 돌아가 죽임당할 테니까.

에즈라는 입술을 꽉 깨물며 디케에게 달려들었다. 생각지

못한 선제공격에 디케는 다리가 밀려 뒤로 넘어졌다. 자신을

향한 칼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에즈라는 디케와 함께

돌바닥을 굴렀다. 아픔도 잠시, 먼저 정신을 차린 에즈라는

디케의 몸을 자신의 여린 몸으로 짓누르며 칼을 빼앗으려

들었다.

“으윽…… 이거 놔!”

“제발, 제발요!”

칼을 쥔 두 개의 손. 뺏으려는 이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의

실랑이가 길어졌다. 디케가 몸부림을 치며 에즈라를 떨궈

내더니 재빨리 에즈라의 위를 점령했다. 결국 빼앗지 못한

칼끝이 시퍼렇게 번뜩인다. 에즈라는 자신의 목을 겨냥한

칼날을 온 힘을 다해 저지하며 소리쳤다.

“시,싫어!”

“죽어 죽으라고! 너 같은 건 죽어 마땅해!”

디케의 손을 저지한 에즈라의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목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뾰족한 칼끝에는 새까만 독까지 묻어 있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한 그녀의 치밀한 계획에 에즈라는 가슴이

와장창 깨어지는 것만 같았다.

“너무해! 너무하다고! 왜, 왜 나한테만……! 나한테만!”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이 끊어지자 참을 수 없는, 아주

오랫동안 묵혀 온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사람처럼 눈앞이 새빨개진다. 온몸이 끓어오르는

기분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휘저으며 발악하듯

내질렀다.

“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야! 나는, 나도 이렇겐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 어미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 나는, 나는 너무 억울해!

아악!”

한 번쯤은 환하게 웃어 보고 싶었다.화려한 클로크를 걸치고

당당하게 걸어 보고 싶었고, 멍 자국 대신 생기를 두르고

싶었어. 어미를 잡아먹은 죄인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이 바람이 그렇게나 욕심인 건가. 다른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살아가는 자유를 억압당할 만큼이나!

“나는 억울해! 억울하다고!”

“미친년, 죽어 버려!”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던 하녀들은 에즈라의 처절한

비명과 눈물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문을 등지고 있던 디케는 고개를 돌려 그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니. 그러려 했다.

“뭐 하는 거야…… 어?”

디케는 하녀들의 뒤로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남자들을 보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몸집이 아주 커다란 남자의 칼이 고작

반원을 그렸을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건만.

스르륵, 칼을 거두기 무섭게 다섯 명의 하녀들의 목이 하나둘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가운데가 먼저, 그다음은 양 끝,

마지막으로 문 앞을 지키던 하녀의 배에 꽂힌 시퍼런 칼날이 쑥,

사라지자 디케는 피가 식는 것을 경험했다.

디케의 몸에 힘이 풀리기 무섭게 에즈라는 그녀를 밀어 낸 후

숨을 골랐다.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에즈라는 디케가

떨어뜨린 칼을 주워 저 멀리 치워 버리려는데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는 디케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무엇을 보았길래 저런 표정을 하는 건가. 에즈라는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보아서는 안 될

것들이 늘어져 있을 것만 같아서. 에즈라는 쿵쾅거리는 심음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늦지 않아 다행이에요 에즈라.”

“……히폴로테스님.”

히폴로테스는 발치에서 나뒹구는 하녀들의 목을 발로 대강

밀어 버리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에즈라는 가뿐히 문턱을 넘는

그를 아연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무력해진 디케는

두 사람을 멍하니 번갈아 보다가 데몰레온을 발견하고는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사, 사, 살인자! 살인자야!”

“이럴 수가! 살인자는 공주님입니다. 에즈라의 방에 몰래

찾아와 독을 묻힌 단도를 들이미셨잖습니까. 그것도 모자라

하녀들까지 대동하는 치밀함을 보이셨죠.”

“화, 황자님! 아니에요.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에즈라,

에즈라를 죽여야 한다고요!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 에즈라는

티텐을 멸망하게…… 아.”

“헌데 이 방법은 제게는 너무 허술하네요. 안타깝게도 이

정도는 제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지라.”

“맞아…… 당신이었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히폴로테스의 옷자락을 쥐었던 디케는

샐쭉 올라가는 입꼬리를 발견하곤 손에 힘을 풀었다. 툭,

늘어지는 손이 허망하다. 더없이 상냥한 미소를 걸친 남자가

검을 빼 들어 디케의 목을 겨누었다.

그제서야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인지한 에즈라는 퍼뜩 놀라

디케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즈라는 번뜩이는 히폴로테스의 칼

앞에서 애원했다.

“히폴로테스 님. 거, 검을 거두어 주세요. 저는 정말

멀쩡해요. 다치지 않았어요. 그리고, 언니, 언니는……!”

“닥쳐! 누가 네 언니야!”

언니라는 말에 디케가 사나운 목소리로 에즈라의 말을 뚝

끊었다. 그럼에도 에즈라는 히폴로테스를 애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싹싹 빌었다.

“디, 디케 공주님께서는 비밀을 지켜 줄 거예요. 그, 그렇죠?”

“ 데몰레온.”

그는 대답 없이 데몰레온의 이름을 불렀다. 뜻을 읽은

데몰레온이 다가와 에즈라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는 두 팔을

잡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에즈라가 이거 놓으라며

몸부림쳤으나 데몰레온에게 그것은 나비의 날개를 잡는 것

정도의 일이었다.

에즈라에게 히폴로테스는 온화한 어투로 내뱉었다.

“에즈라, 아까와는 말이 다르잖아요. 너무하다고, 억울하다고

울부짖을 때는 언제고.”

“히폴로테스님, 그건……"

잘못한 게 뭐냐며 발악하던 자신을 떠올리며 에즈라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죄를, 마음 한구석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아주 깊은 곳에서 그리 생각해

왔던 거야.

나는…… 원망할 사람이 없어서 나를 원망해 왔을 뿐이었다.

원망할 이가 생긴 에즈라는 망연한 얼굴로 눈물 젖은 뺨을

더듬었다.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제대로 직면하자 구역질이

일었다. 역겹다, 진실로 역겨워. 피해자인 척, 벌을 받아 마땅한

척하면서 남몰래 이를 갈고 있었어. 손바닥이 패이면서도

주먹을 꽉 쥐었어.

그건, 감추어 온 증오였다. 힘이 없는 나를 향한. 그리고

원 망스러운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고마워요. 내가 조금만 원망해 달라고 했던 일. 아주 잘 해내

줘서.”

정신이 바스러져 가는 에즈라에게 그 말만을 남긴 채

히폴로테스는 칼을 쳐들었다. 운명을 예감한 듯 킥킥거리던

디케가 고개를 들더 니 입을 뗐다.

“잘 들으렴. 에즈라, 남자가 하는 사랑의 맹세는 덧없는

것이야. 사랑은 배신을 몰고 오거든.”

나지막한 어조에 히폴로테스의 칼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던 에즈라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디케와

눈을 맞추었다. 디케는 잔혹한 비웃음을 지어 보이며 신랄하게

비꼬았다.

“물살처럼 휩쓸리고 또 쓸려 나가는 게 사랑이지. 눈먼 너는

부러 그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뿐이야.”

이 가엾은 것아.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히폴로테스는 더 못 들어 주겠다는 양

칼을 내리쳤다. 서걱, 너무도 깔끔하게 잘려 나가는 목에서

치솟는 피가 천장까지 적셨다. 간헐적으로 피를 내뿜던

몸뚱이는 좌우로 비틀거리다 결국 바닥에 늘어졌다.

천장에 흩뿌려진 핏방울이 고여 뚝뚝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넋이 나간 에즈라는 고개를 올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톡, 볼에

떨어진 핏방울 하나가 주르륵 흘렀다. 톡, 또다시 핏방울이

이마에 떨어졌다. 고개를 바로 하자 이마에서 코끝을 타고

흐르는 뜨끈한 피가 비렸다.

“우욱!”

“에즈라!”

구역질을 해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괴로움에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틀자 히폴로테스는 검을 내던지고 그녀를 품어 주었다.

아무것도, 그 어떤 누구도 의지할 수 없어서 에즈라는 그의 품을

더욱 파고들기만 했다. 지금 내게 남은 건…… 오로지 이 사람

하나뿐이어서.

돌탑의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붉은 발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피범벅인 손으로 직접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자욱한

안개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피비린내를 옮겨다 주었다.

에즈라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앞서가는 데몰레온을 따라

걸었다. 그가 들고 있는 칼날에 진득하게 고인 피들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발밑이 어지러웠다. 제 발 아래서 짓이겨지는

풀잎에도 피가 묻어 난다.

“어디까지 가는거예요?’’

“남쪽 궁입니다. 글로사공주가 머무는 궁이죠.”

“아아……,”

신음 같은 대답을 흘리며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데몰레온

잠시 어깨 너머로 피에 젖은 에즈라를 살펴보다가 다시 앞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그의 걸음을 따라

자박거리는 여자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쪽 궁 앞까지 다다른 그는 문 앞을 지키고 선 병사들의

목을 거침없이 베었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새 벌어지는 살육을

그녀는 멍하니 서서 방관했다. 손안에 들린 단도는 무용했다.

이것은 저들에게 쓸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은…… 글로사,

오직 그녀만을 향해 겨눠져야 했다.

“들어가시죠.”

여자는 어디로 보나 제정신은 아닌 모양새였다. 데몰레온은

어쩐지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냘픈 여자에게 떠미는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허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그들을 뒤쫓아 온

히폴로테스가 에즈라의 어깨를 감싸며 귓가에 다정히 입을

맞추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날이 밝기 전에는 끝내야 하니까.”

“디. 디케 언니는……

“시신은 잘 수습했으니 걱정 말아요. 들킬 일은 없어요,

아직은.”

들킬 일이 없다는 말에 에즈라는 들고 있던 단도를 힘주어

잡았다. 자꾸 약해지는 정신이, 위선적인 자신이 경멸스럽기만

했다. 이미 모든 것을 내버리고 그의 삶을 선택한 일. 나를

짓누를 그 어떤 감정도 떠안고 가라앉겠다 다짐했으면서.

“에즈라, 나를 봐요.”

“히폴로테스 님, 걱정 마세요. 저는 정말로……,”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초연해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니 결국 홈러내리고 말았다. 그

위선적인 모습을 마주하며 히폴로테스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모든 게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는 에즈라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핏자국이 남은 희멀건

뺨을 슬쩍 문지르자 흐른 눈물에 피가 더욱 번졌다.

“도망칠 곳은 없어요, 에즈라. 뒤돌아보지 말아요.

무엇보다…… 이제는 너무 멀리 왔어요. 당신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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