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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26화 (26/113)

26화

‘글로사 언니는 저와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어할 거예요.’

‘내가 마주하게 만들어 줄 테니 걱정 말아요. 무엇보다……

글로사는 당신의 말에 진실을 답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를 믿어요.’

히폴로테스는 여전히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았지만

에즈라는 그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그 발아래

내려놓을 수 있었다. 죽음이라면, 그래 죽음이라도 그의 손에

내맡길 수 있었다. 그만큼 그가 너무 소중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엉망으로 잘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잠시 움켜쥐었다.

‘말했잖아요, 조금만 원망해 줘요.’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이 이렇게 쉬울 줄이야. 잔뜩 인상을

찌푸린 에즈라는 그에게서 건네받은 은빛 단도를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꽉 쥐었다. 평생에 걸쳐 새겨진 손바닥의 흉터. 그 위로

칼날의 선득함이 지나갔다.

‘당신은 도사린 거짓에서 구애받지 않는 단 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당신이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히폴로테스의 절박한 음성이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죽어도 칼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단

한가지라면.

가장 먼저 미명이 밝아오는 동쪽 궁 안. 짙은 안개 덕분에 방

안은 서로의 인영만이 보일 뿐이었다. 음산한 인기척에

집중하던 다섯 명의 하녀들은 허리를 굽힌 채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준비한 것은?”

“여기 있습니다. 일각도 되지 않아 전신에 퍼지는

독약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잠을 자듯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구하는 도중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을 만한 자를 통해 얻은 것입니다. 흔적

역시 남기지 않았습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은 곧 죽여 버렸다는 뜻이었다.

깔끔한 끝마무리가 맘에 들어 디케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다른 것은.”

다른 하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더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녀의 손 위에서 번쩍이는 물체는 분명 단도였다.

손잡이 부분이 모난 곳 없이 잘 다듬어진 그것을 집어 든 디케는

망설임 없이 칼집을 빼 들었다.

칼날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칼날은 끝이 아주

날카로웠다. 길이는 누군가의 심장을 찌르기에 아주

적당했으며 잘 벼려진 탓에 작은 힘으로도 깊숙이 살을 가를 수

있을 터였다.

“수고했다.”

흡족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모든 것은 완벽히 준비되어

갔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에 옮기는 것뿐.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죄악감을 지게 할 테지.

“……수고했어. 정말.”

중얼거리던 디케는 벌게진 눈가를 가리며 킥킥 웃어 댔다.

언제였더라. 아마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릴 적이었던 것 같다.

강아지처럼 방방 뛰어다니며 공놀이를 하다가 그 음산한

돌탑을 발견했다. 이끼가 잔뜩 낀 낡은 쇠문에 흠칫하기도 잠시,

살짝 열린 문틈에 호기심이 일었다.

과연 이곳은 뭐 하는 곳일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다가 결국

다시 돌아가려 뒤를 돌았다. 얼마 가지 않아 디케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늘에 닿을 듯 뻗은 플라타너스 가지에 매달린

판판한 그네.

디케는 텅 빈 그네에 앉아 있는 작달막한 여자아이의 등을

의아한 얼굴로 응시했다. 누구인데 저기에 았아 있는 걸까. 타는

법도 모른 채 그저 았아 있는 아이에게 막 다가가려던 찰나,

아이는 누가 볼까 바로 엉덩이를 떼며 주변을 살폈다.

거적때기와 다를 바 없는 옷을 걸친 아이는 저를 마주하곤

새파랗게 질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비쩍 마른 몸에는 알 수 없는

자국이 선명했기에 디케는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너 누구야?’

아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허리까지 낮게

수그린 아이의 등이 갓 태어난 새끼 동물마냥 바들바들 떨렸다.

저러다가는 울퉁불퉁한 바닥에 무릎이 까지고 이마가 쓸릴

것이다. 동정심이 인 디케가 아이를 일으키려 막 손을

뻗으려는데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다!’

획, 뒤를 돌자 달려오던 하녀 몇몇이 뜀박질을 멈추고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못마땅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자 하녀들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아이를 힐끗 노려보았다.

‘일어서.’

일어서라는 말에도 아이는 작은 몸을 더욱 옹송그릴

뿐이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케는 아이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고, 공주님 !’

하녀들이 기겁하든 말든 디케는 고개를 푹 숙인 아이의 검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한번 훑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주한

아이의 눈동자는 여름날의 나뭇잎 같았다. 잠시 그것을 흘린 듯

바라보던 디케는 들고 있던 인형을 적선하듯 내밀었다.

‘이거 가져.’

그녀가 내민 인형을 멍청히 내려다보던 아이는 곧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손을 내저었다.

‘어서 받아.’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입술을 떼지 않는 아이가 다시

엎드리려 하자 디케는 손을 잡아끌어 토끼 인형을 직접 품에

안겨 주었다.

‘너 가져.’

‘이, 이거……"

엉성한 모양새로 품에 안겨진 인형을 들고 있던 에즈라를

망설임 없이 뒤로했었다. 궁 안으로 들어서기 전, 나는 네가

궁금해 한번 뒤를 돌아보았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것을 꽉

품에 안던 그때의 너를 아마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알 수 없는 감정에 목울대가 꿀렁였다. 그 아이의 존재가

마뜩잖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코 염오하지는 않았다. 잊고

살던 오랜 날, 가끔 생각날 때면 덫에 걸린 불쌍한 짐승을

떠올리곤 했을 뿐.

그러니 이제 사냥할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 짐승은, 사람을

위협하는 짐승은 죽어 마땅하니까. 나는,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이 일은 너희와 나만 알아야 해. 만약 다른 이가 눈치채거나

이야기가 새어 나가 알게 된다면, 맹세컨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될 거다.”

디케는 눈을 내리깔며 엄한 목소리로 그들을 겁박했다. 부디

괴로움과 공포, 죄책감 같은 저열한 감정들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협박을 들이미는 공주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어디로

보나 정신이 나간 모양새에 그녀를 모시는 하녀들은 불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미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는 일. 그러니 거스를 수 없다면,

철저히 계획을 완성시켜야 했다.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손에

쥐어질 것들을 기대하며 그들은 공포를 죽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어디 불편하신 건 없으신지요.”

끝이 제멋대로 뻗친 머리칼을 정리해 주던 마타리가

뜬금없이 물어 왔다. 에즈라는 가만히 앉아 그녀의 손길을

받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짝 박수를 쳤다.

“그러고 보니 날이 꽤 추워져서요. 모포라도 하나 더

주시면……

누군가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에즈라는 말해 놓고도 공연히 눈치가 보여 흐지부지

말끝을 흐렸다.

“이불을 더 두툼한 것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꼼꼼하게 머리칼을 정돈해 준 마타리가 손을 털며 몸을

일으키자 에즈라는 주저앉은 채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급히

붙들었다. 그 모양새가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마타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일갈했다.

“말을 놓으셔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게다가

아래에 았은 채로 저를 올려다보시다니요. 이것도 놓으세요!”

“읏!”

팩, 치맛자락을 빼내며 마타리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은 에즈라의 머리 위로 그녀의 잔소리가

와르르 떨어져 내린다.

잔뜩 주눅이 들어 또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자 마타리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에즈라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뭐가 그리 즐거우신 건가요?”

“그게 그러니까, 음…… 무표정한 마타리가 요즘은 자주화를

내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저는 그게 더 좋아요.”

면박을 받고도 좋다고 미소 짓는 입가에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파인다. 대책 없이 순진한 여자. 마타리는 자신이

얼마나 이 여자와 함께했는지 가늠해 보았다. 고작 계절이 두 번

바뀔 정도의 짧은 시간일 뿐인데…… 고요했던 일상에

물방울처럼 떨어진 여자는 아주 작은 물살을 일게 했다.

마타리는 엊저녁 히폴로테스가 내어준 엄청난 양의 금화를

떠올리다가 에즈라의 웃음을 외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당신을 위협하는 일에 동조하고 방관했던 건 모두 제

욕심 때문이었으니까.

“이불은 내일 중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오늘만 참으세요.”

“고마워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타리의 얼굴이 위태로워 보였던 건

착각일까. 에즈라는 도망치듯 급히 방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때마침 서늘한 웃풍이

들어차자 에즈라는 제 몸을 껴안으며 살짝 떨었다. 더위가

엊그제 같은데 밤만 되면 날은 급격히 쌀쌀해졌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따뜻하겠네.”

오늘만 참으면 된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침상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살 내음이 밴 침상에 이마를 부비다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 상태로 에즈라는 잠을 청했다. 졸음이

몰려들어 눈이 가물가물하던 때, 또다시 들이닥친 얇은 바람은

단 하나의 등불을 앗아 갔다.

온통 깜깜해진 방 안을 에즈라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미

곤히 잠든 그녀의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갔고, 이내 새벽녘이

되었다. 자욱한 안개 탓에 밤보다는 새벽이 더욱 깜깜했다.

그것을 노린 디케와 하녀들은 약속한 대로 돌탑을 찾았다.

“이제부터 발소리를 죽여라. 한 발자국도 돌탑을 울려서는 안

돼.”

어린 날 보았던 것보다 훨씬 녹이 슨 철문 앞에서 디케는

주의를 주었다. 그녀를 따르는 다섯 명의 하녀들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매수한 하녀들이 문을

미리 열어 두었기에 그들은 손쉽게 돌탑 안으로 잠입했다.

이들은 곧이어 눈앞에 펼쳐진 생경한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숨이 턱 막혀 오는 답답한 공기와 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손에 걸려 드는 거미줄. 몇백 개나 되는 좁은 계단을

오르는 것은 고문이 나 다름없었다.

열 개 남짓 남은 계단 우I 돌탑을 지키는 하녀 하나가 등불을

든 채로 손을 파닥였다. 거의 다 왔다는 뜻이었기에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이윽고 넓적하고 두터운 돌문 앞에 선

디케는 품 안에 감추어 두었던 은빛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녀를

지키고 선 하녀들은 서로 눈짓하며 벌어질 일들에서 초연하려

노력했다.

에즈라가 디케를 피해 도망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하녀들의 손에도 날이 무딘 칼날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문 앞을 지키고 섰던 하녀는 받아 든 금화를 떠올리곤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열어, 디케의 입 모양에 하녀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었다.

점점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비좁고 허름한 방 안이 드러났다.

등불이 꺼진 것인지 흐린 달빛만이 들어찬 방 안은 으스스했다.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으나 디케는 곧 정신을 똑바로

부여잡으며 문턱을 넘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침상으로 다가가자 뒤를 돈 채로 잠에 빠진 에즈라의 등이

보였다.

빠르게 어깨를 잡아채 돌린 후 목을 꿰뚫는다.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던 일련의 과정. 어느새 단도를 쥔 손이

벌벌 떨고 있었기에 디케는 두 손으로 단도를 단단히 쥐었다.

스릉, 칼집을 벗기자 시리도록 뾰족한 칼끝이 나타났다.

결심한 그녀가 재빠르게 에즈라의 어깨로 손을 뻗던

그때였다. 한발 빠르게 먼저 몸을 돌린 에즈라는 다가오는 손을

콱 잡아챘다. 이윽고 디 케를 알아본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곤히 잠든 줄로만 알았던 에즈라의 반응에 되레 놀란 것은

디케였다. 찰나의 순간. 바로 정신을 차린 디케가 칼을 들어

올려 에즈라의 목을 향해 내리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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